광고닫기

최신기사

[이아침에] 베트남을 다녀와서

늦은 나이에 이민 와 오랫동안 자영업을 하며 미뤄 두었던 여행에 대한 갈증을 은퇴 후에야 풀고 있다. “여행은 내 영혼의 비상식량”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난다.     친구의 제안으로 갑작스레 떠난 베트남 여행도 그랬다. 친구와의 동행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베트남 하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선친의 친구인 파월 장병, 임 상사 아저씨가 귀국하며 가져온 도시바 냉장고와 텔레비전은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김일과 천규덕 선수가 출전하는 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 집 마루에 모여들었다.     비행시간만 18시간이 넘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만석의 이코노미석에서 긴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기내 영화 ‘The Dumpling Queen’이었다. 두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이주해 길거리에서 만두를 빚어 팔며 생계를 이어간 여인의 실화 속에서, 나 역시 막막했던 이민 초창기의 시간을 떠올렸다. 베트남 최대의 경제 도시 호치민은 활력이 넘쳤다.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들만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했다. 피하려 애쓸수록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알아서 피해 갔다.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시원, 달콤한 음료를 마시거나 코를 박고 쌀국수를 먹는 사람들에게서 가난해도 서두르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여유가 느껴졌다. 메콩 강의 짙은 녹음 아래를 배로 지나며 맛본 자연의 깊은 평온함도 오래 남았다.   여행의 기억은 늘 뜻밖의 순간에 깊게 새겨진다. 두 번째 도시 호이안에서 우리는 60년 만의 대홍수를 만났다. 시가지는 순식간에 물에 잠겼고 창밖에는 자동차 대신 배가 떠다녔다. 일정이 모두 취소된 채 호텔에 머물며 식사를 해결하고 마사지를 받는, 뜻밖의 ‘강제 호캉스’를 보냈다. 호텔 문이 폐쇄되어 창문으로 빠져나와 작은 배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할 때는 재난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조상숭배와 불교가 일상생활 속에 깊이 녹아 있어서일까. 그 와중에도 찡그리거나 불평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홍수는 거부해야 할 재앙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삶의 일부처럼 보였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흙탕물 속에서 우리의 트렁크를 머리에 지고 옮겨 주던 모습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순박한 미소는 사람 사이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실패와 좌절이 있어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 나라의 밝은 미래가 엿보였다.   홍수로 몇몇 일정을 생략한 채, 하롱베이와 하노이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안개에 잠긴 하롱베이의 기암들은 묵묵히 힘든 시간을 견뎌온 얼굴 같았다. 다시 분주한 일상이 흐르는 하노이의 거리에서, 나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저당 잡혀 살았던 일상을 떠올렸다.   베트남의 흙탕물 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애쓰지 않아도, 삶은 제 나름의 흐름과 속도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배웠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곳에서 배운 느린 호흡과 내려놓음이 일상의 매 순간 조용히 나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최숙희 수필가이아침에 베트남 베트남 여행 베트남 최대 도시바 냉장고

2026.05.04. 18:57

썸네일

[이 아침에] 세월의 주름만큼 사랑은 깊다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비자 신청용 사진을 집에서 찍을 때였다. 모자와 안경을 벗은 남편의 얼굴이 휴대폰 화면에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성긴 머리칼 사이로 고스란히 드러난 두피, 깊게 팬 주름, 그 위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민 생활의 무게와 세월의 덧없음이 남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결혼 초, 남편은 어린 시절 만화영화 주제가 속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Z’처럼 강한 사람이었다. 힘쓰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고, 그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살이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타국의 삶은 우리를 조금씩 단련시켰다. 한정된 수입과 비싼 인건비 탓에 ‘직접 고쳐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남편은 이제 유튜브라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집 안팎의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맥가이버로 거듭났다.   자신하던 건강마저 세월 앞에선 무력하다. 요즘 들어 허리가 아프다며 한의원을 찾았다. 척추협착증이란다. 우연히 받은 경동맥 초음파에서는 좌우 혈관이 20퍼센트가량 좁아졌다고 한다.     의사는 아직 치료가 필요 없다며 운동을 권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뇌로 가는 혈류가 서서히 막히는 초기 단계라고 한다. 생활 습관 관리와 정기검진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읽었다. 문득 내가 기댔던 나무가 예고 없이 흔들리며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지 하나가 부러질 수는 있겠지만, 뿌리째 뽑힐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하고 살았다.   나 또한 멀쩡하지만은 않다. 오른손 둘째 손가락에 퇴행성 관절염이 찾아와 병뚜껑을 열기조차 힘들다. 정기검진에서 부정맥 소견이 나와 심장전문의 리퍼럴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은퇴는 인생의 쉼표이자 반환점이다.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자녀를 돌보느라 소홀히 해온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볼 시간이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찾아오자, 성수기가 끝난 휴양지처럼 마음은 텅 비어버렸다. 허무와 상실감이 밀려올 때 그것을 채울 방편으로 우리는 여행을 택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추억을 쌓는 일이야말로 남은 생의 여백을 가장 따뜻하게 채우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며 몸이 약해지고 여러 질병이 찾아온다 해도, 그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며 주저앉지 않겠다. 여행의 추억은 언젠가 반드시 닥칠 가장 추운 겨울을 버티게 해줄 든든한 저금이 될 것이다. 비록 젊은 날의 체력은 사라졌어도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되고 싶다.   늘 내 편에 서서 내 손을 꼭 잡아준 사람, 그 손을 놓지 않을 사람,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오늘도 나는 그 손을 꼭 잡고 살아간다. 우리의 손등에는 세월의 주름이 겹겹이 쌓여 있지만, 그 주름만큼 사랑도 깊어졌다고 말하련다.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세월 주름 베트남 여행 이민 생활 생활 습관

2025.11.03. 19:55

썸네일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