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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증원 역풍, 루스벨트도 바이든도 큰코다쳤다

입맛에 맞는 사법부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대공황 시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걸 손에 쥐려 했다.   당시 9명의 대법관은 보수 넷, 진보 셋, 중도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이 뉴딜 법률에 줄줄이 위헌판결을 내리자, 루스벨트는 1937년 2월 대법 증원안을 냈다. 종신직인 대법관이 나이 70세 6개월이 되면 대통령이 별도로 한 명씩 최대 6명을 더 늘리는 식이었다. 그때 이미 70세가 넘은 대법관이 6명이었으니, 계획대로라면 대법관이 15명으로 느는 셈이었다.   이런 식의 법원 물타기를 '코트 패킹(court packing)'이라 한다. 비좁은 공간에 뭔가 억지로 쑤셔 넣는다는 뜻을 법원에 갖다붙인 표현이다.   여야는 모두 들고 일어났다. 국정 파트너인 존 가너 부통령도 반대했다. 대법관 증원을, 삼권분립 따위는 개나 줘버려 하는 식의 우격다짐으로 본 것이다. 가너가 코트 패킹이란 말의 작명자는 아니지만, 그가 공개석상에서 언급하면서 세간에 널리 퍼졌다. 여론 역시 부정적이었다. 갤럽 조사에서 반대 53%, 찬성 47%로 나왔다. 상원 법사위는 '부적절' 보고서를 채택했고, 법안은 그해 7월 표결 없이 철회됐다.   루스벨트는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1938년 중간선거에서 코트 패킹 역풍에 휘말린 민주당은 하원에서 72석, 상원에서 6석을 잃었다. 공화당은 하원에서 무려 81석을 추가해 종전의 배 수준인 169석으로 의석을 불렸다. 상원에서도 8석을 추가했다.   이 파동을 계기로 코트 패킹은 금기어가 됐다. 그러다 84년이 흘러 2021년 바이든 정부 때 민주당은 교훈을 잊은 채 다시 코트 패킹에 나선다. 보수 우위의 대법원을 자기편으로 바꾸기 위한 물타기 시도였다. 도널드 트럼프가 첫 임기 중 보수 대법관을 3명이나 지명한 데 따른 반발이 컸다.   ▶바이든 의원 때 '보크 낙마 파동' 이끌어   여기엔 바이든의 판단 미스도 작용했다. 발단은 1992년 6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원 법사위원장이던 바이든은 조지 H 부시의 임기 말, 뜬금없는 말을 한다. "대선이 가까운 시점에 대법관 공석이 생긴다면 지명은 차기 대통령에게 맡겨야 한다." 대법관 공석이 없었기에 다들 흘려들었다.   그러다 오바마 정부 마지막 해인 2016년 2월 대법관 안토닌 스캘리아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석이 생겼다. 오바마가 메릭 갈랜드를 새 대법관에 지명하자,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바이든 룰'을 꺼냈다. 대선이 가까우니 차기 대통령에게 맡기자며 청문회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갈랜드 지명은 철회되고, 대신 트럼프가 2017년 닐 고서치를 지명했다. 바이든이 트럼프 좋은 일 시켜준 셈이 됐다. 갈랜드는 훗날 바이든 정부의 법무장관이 된다.   이듬해 또 공석이 생기자 트럼프는 브렛 캐버노를 지명했다. 이때도 민주당 반발이 컸으나 표결로 통과시켰다. 트럼프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했을 땐, 민주당이 '바이든 룰'을 주장했다. 트럼프는 깡그리 외면한 채 에이미 코니 배럿을 지명했다. 민주당은 이를 '법원 탈취'라고 불렀고 당내 대선 주자들은 대법 증원을 거론했다. 민주당 강경파가 코트 패킹을 추진한 건 그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또 실패하고 만다. 공화당이 반발한 건 물론이고 민주당에서도 망설이는 이가 많았다. 복수의 조사에서 모두 반대여론이 찬성의 배에 달했다. 제리 내들러(하원), 에드 마키(상원) 의원 등이 대법관을 13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하원 법사위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민주당 좌파인 버니 샌더스는 코트 패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똑같이 할 게 걱정이다." 그런 좌고우면 없이 쓱싹 해치운 사례로는 차베스 정권의 베네수엘라가 꼽힌다. 미국 언론도 코트 패킹을 다룰 때 흔히 베네수엘라 사례를 거론한다. 하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말이다.   공화당이 코트 패킹에 반대하면서도 대법관 지명에 전투적인 데엔 배경이 있다. 레이건 정부 말기인 1987년, 될 줄 알았던 인준이 민주당의 무자비한 공세에 밀려 무산됐다. 청문회 역사상 최대 혈투로 불리는 '보크 파동'이다.   그해 루이스 파웰 대법관의 은퇴로 레이건은 엘리트 법조인 로버트 보크를 후임에 지명했다. 민주당은 '권력의 하수인' '극우'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선봉에 선 이가 테드 케네디, 조 바이든 상원의원이었다. 보크가 대법관이 되면 여자들은 뒷골목에서 애를 떼야 하고 흑인은 백인과 같이 앉지도 못하며 부패한 경찰은 한밤중 시민의 집에 문을 부수고 들어갈 것이라는 등 근거 없는 비방을 늘어놨다. 자질 검증이나 법리 논쟁은 뒤로 밀렸다. 싹싹한 데라곤 찾을 수 없는 보크의 뻣뻣한 태도도 문제였다. 보다 못한 공화당 앨런 심슨 의원이 "오만하다는 비난을 어떻게 생각하냐"며 멍석을 깔아줬지만 보크는 "그런 데 대응할 생각이 없다"고 차버렸다.   민주당 지지단체는 보크를 비난하는 TV 광고도 내보냈다. 내레이션은 그레고리 펙이 맡았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에서 정의로운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로 출연했던 펙은 선량한 목소리로 보크를 비방했다. 청문회 전 25%였던 인준 반대 여론은 청문회 뒤 52%로 수직 상승했다. 인준은 58대 42로 부결됐다.   이 파동으로 대법관 인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지나 정치의 영역으로 완전히 건너 가버렸다. 보크의 이름을 딴 bork라는 말도 탄생했다. 정적을 악랄하게 공격하다, 정치공세를 벌여 낙마시킨다는 뜻이다. 아직도 공화당엔 '보크 트라우마'라는 집단기억이 있다. 공화당이 2016년 오바마의 갈랜드 인준을 가로막고, 2020년 트럼프의 배럿 인준을 강행한 것은 그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과잉반응이다.   2025년 6월 현재 대법관은 공화당 지명 6명, 민주당 지명 3명으로 나뉜다. 지난 50년 양당의 집권기간이 2년 차이라는 점에 비춰, 기운 건 사실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지자 재직기간도 크게 늘었다. 50대에 지명돼 25~35년 일하며, 4~6명의 대통령을 겪는다. 이념성향이 다르면 서로 불편해질 수밖에.   '보크 파동' 이후 판사 인준을 둘러싼 정쟁은 판을 깨는 수준으로 격화됐다. 미국에선 헌법 3조에 따라 890명에 달하는 연방법원 판사를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이 인준한다. 이를 '아티클Ⅲ 판사'라 한다. 이들을 자기편으로 채우려는 양당은 급기야 '핵 옵션'을 쓰기에 이른다. 김정은이 좋아하는 핵이 아니라, 인준 절차의 금기를 깨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선거 이기기만 하면 사법 독식 가능해   2013년 다수당이던 민주당이 처음 썼다. 오바마의 판사 지명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무력화하기 위해 필리버스터 종료 결의 정족수를 60표에서 50표로 낮춘 채 인준표결을 했다. 먼저 원내대표 해리 리드가 필리버스터를 단순 과반으로 종료시킬 수 있냐고 의장에게 질의한다. 의장이 안 된다고 하자, 리드가 이를 뒤집는 표결을 제안해 52 대 48로 통과시킨다. 의장은 자신의 결정이 뒤집혀 단순 과반으로 필리버스터를 끝낼 수 있게 됐다고 선포하고 필리버스터 종료와 인준표결을 진행한다. 상원 다수당은 이런 식으로 필리버스터를 봉쇄한 채 인준을 강행했다.   피폭당한 공화당이 가만있을 리 없다. 2017년 다수당으로서 고서치 대법관 인준에 똑같이 대응했다. 2019년에도 핵 옵션을 써 지방법원 판사를 인준했다. 이로써 사법부 인사에 대한 소수당의 저항은 의미를 잃었다. 이제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독식할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진영 전쟁이다. 양당이 주고받았으니 어느 한 편을 탓할 수는 없다.   미국엔 수십 년에 한 번쯤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판결이라는 게 나오곤 한다. 이때 판사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세상의 궤적이 크게 달라진다. 행정부 정책도 법원에서 자주 가로막힌다. 트럼프 정부의 불법체류자 추방, 출생지 시민권 박탈 조치 등이 줄줄이 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LA 폭동에 군을 투입한 것도 소송에 걸렸다. 법관 인사에 진영 논리가 강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정작 판사들은 자신을 지명해준 당의 노선에 따라 똘똘 뭉쳐 판결할까.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명 대법관들이 의견일치를 본 판결은 전체의 81%지만, 공화당 지명 대법관들의 의견일치 판결은 35%에 불과했다. 진보는 뭉치고, 보수는 흩어지나.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루스벨트 대법원 대법관 증원 보수 대법관 대법관 공석

2025.06.1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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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분열과 갈등 변곡점 된 연방대법원

지난 일을 쉽게 잊는 것이 사람인지라 요즘같이 미국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된 적이 없는 것만 같다. 최근 미국인의 85%가 국가의 향방에 대해 부정적이다.     2022년 대량 총기 살상사건이 하루 평균 1.7건 발생하는데도 110년된 뉴욕의 ‘총기은닉휴대 면허법’이 위헌이 됐다. 40년만에 폐지된 낙태권은 진보와 보수의 격돌장이 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환경보호국(EPA)은 발전소에 대한 온실가스 배출 규제권이 없다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지난 6월말 2주 사이에 쏟아진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분열과 갈등의 변곡점이 됐다. 보수 대법관이 과반수 이상인 대법원은 ‘선례 구속력의 원칙(stare decisis)’을 던지고 총기규제법, 낙태권, 환경법 등의 행정권을 연방정부에서 주 의회로 넘겼다. ‘권력 분리(Separation of Powers)’ 논리에 따라 연방 행정기관은 의회가 명확하게 준 권한만 행사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에 진보적인 주는 더욱 진보적인 법을, 보수적인 주는 더욱 보수적인 법을 제정하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정치적 성향이 같은 주들은 유사한 법을 경쟁하듯이 제정했다. 개인적으로 정치나 문화적 이념에 따른 삶을 추구하려면 본인에게 합당한 주를 선택해 거주해야 가능할 수 있게 됐다.     고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의 자리에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가 앉기 전에는 중도파 대법관의 목소리가 컸다. 대법원의 보수적 판결은 ‘헌법의 원래 의미와 뜻을 찾는 원론주의(originalism)’에 근거한다. 인공지능을 쓰는 21세기 사람들의 삶이 55명의 긴 머리 가발을 쓴 백인 남성들이 만든 1787년 헌법 문구의 해석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친다.   헌법 문구는 짧고 모호해서 주관적, 이념적 해석이나 좌우 불균형적 판결도 합법이다.     또 헌법에는 여성, 교육, 건강, 환경 권리와 같은 21세기에 당연한 기본 권리와 민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법관의 평생 임기도 대법원이 정치화하는 이유가 된다.     10월에 대법원 새 회기가 시작되면 첨예한 이슈들을 심리할 것이다. 그 중 2건이 벌써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주 법정의 감시 없이 주 의회가 연방선거 투표법의 단독 권한을 갖는 것에 대한 심리와 대학 입학 시에 적용되는 ‘인종차별 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심리다.     앨라바마 주 의회는 주 전체 인구의 27%를 차지하는 흑인 주민들을 7개 중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하려고 하며, 노스캐롤라이나 주 의회는 대선과 연방 선거의 독자적인 권한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하버드와 노스캐롤리나 대학 입학 허가 심리를 통해 1978년 이래 입학 심사에서 특히 흑인과 라티노에게 혜택을 주던 공정입학법의 존폐가 결정될 것이다.     100년 래에 가장 보수적이라는 대법원의 힘을 이용해 정치적 입지를 견고히 하거나 지향하는 문화를 장착하려는 정치적 기류가 감돈다. 보수 대법관들은 이념적 잣대와 판단으로 심각한 오류라고 여겨지는 판례들을 급하게 뒤집었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갈등과 분열은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외적 요인과 더불어 국가 흥망의 주요 원인이 됐다. 사회가 이념 갈등에 갇히고 불신과 대립에 함몰되면 국격을 잃고 국력은 쇠퇴한다.     정치적 양극화로 분열과 갈등이 심각한 때에 연방대법원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정치화는 위험하다.     연방대법원은 삼권분리 원칙에 입각한 사법기관으로 미국의 긍정적 미래에 일조하는 균형적인 판단 기준을 확립해주어야 한다. 정 레지나 / LA 독자기고 연방대법원 변곡점 보수 대법관 보수적 판결 중도파 대법관

2022.07.1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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