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가톨릭 보수진영, 허니문 끝나나
전임 교황 프란치스코가 멀리했던 전통을 존중하고 논쟁적인 사회적 쟁점에 거리를 두면서 보수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교황 레오 14세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이민 정책을 비판하면서 가톨릭 내 보수진영과 허니문이 예상보다 일찍 막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레오 교황은 지난달 30일 기자들과 만나 "낙태에는 반대하지만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에 동의한다는 사람을 과연 '(생명을 우선하는) 낙태반대자(pro-life)'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레오 교황은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들 발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프로라이프'라 칭하면서도 사형제와 강경 이민 정책을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피트 헤그세스 장관이 군 수뇌부 회의에서 "방어가 아닌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해 데 대해서도 레오 교황은 "매번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국방부 장관에서 전쟁부 장관으로 직함을 바꾼 것 역시 단순한 수사이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또 최근 시카고 대교구장 블레이즈 수피치 추기경이 가톨릭 신자인 민주당 딕 더빈 상원의원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려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해 온 점 때문에 보수층의 반발을 산 사건도 언급했다. 교황은 "구체적인 사안은 잘 모르지만 40년간 상원의원으로 봉직한 전체 업적을 봐야 한다"고 밝혔다. 교황의 발언은 즉각 파장을 불렀다. 미국 보수 가톨릭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판했던 조셉 스트릭랜드 전 텍사스 주교는 소셜미디어에서 "생명의 신성과 교회의 도덕적 명료성에 혼란을 초래한다"고 레오 교황을 비판했다. 보수 가톨릭 진영의 블로그인 '로라테 카엘리'에도 "교황의 인터뷰에 지쳤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라"는 불만이 올라왔다. 트럼프 행정부 측도 반발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교황의 '비인간적 대우'라는 표현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바티칸 측근들은 레오 교황이 이민자 처우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으며 비판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묶겠다는 교황의 사명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레오 교황 전기 저자인 엘리세 앨런은 "레오 교황이 언젠가는 미국 보수 세력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며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카엘 체르니 추기경은 "레오 교황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때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따르고 있다"며 각 지역 교회와 신자들이 복음을 살아내도록 격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레오 교황은 선출 전까지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민자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 헌신했다. 앨런은 "교황은 낙태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이민 문제를 그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레오 교황은 즉위 이후 전임자와 다른 모습을 보여 보수층의 기대를 키웠다. 즉위 첫 공개석상에서 프란치스코가 입지 않았던 붉은색 교황 예복인 모체타를 착용했고 프란치스코 시절 바티칸 내 자리에서 밀려난 보수 성향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과 로베르 사라 추기경을 잇따라 접견했다. 버크 추기경은 이번 달 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라틴어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버크 추기경의 미사 집전을 거부했다. 하지만 레오 교황은 지난달 LGBT 가톨릭 신자를 돌보는 미국 성직자에게 고위급 면담을 허용해 보수층 일각의 비판을 받았다. 포덤대학 '종교와 문화 센터'의 데이비드 깁슨 소장은 "보수 가톨릭 신자들이 레오 교황의 통합 시도를 자신들의 전체 의제에 대한 지지로 착각한 측면이 있다"며 "레오 교황은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교황은 다른 인물이지만 모두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중심을 지향한다"고 평가했다. 레오 교황은 보수층의 전폭적 대변자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교회의 중심을 지키며 사회적 쟁점에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해석이다. 레오 교황의 최근 발언은 한편으로 교황청이 전통적 생명 존중 교리를 낙태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사형제와 이민 정책, 사회 정의 전반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안유회 객원기자미국 보수진영 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가톨릭교회 보수 가톨릭
2025.10.20.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