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불빛은 꺼지고 마음은 켜지고
빛이 사라졌다. 동네는 숨을 죽인 듯,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잠겼다. 다행히 낮 동안 햇빛을 머금은 썬라이트가 현관 앞을 은은히 밝힌다. 집 안의 불빛과 기계음이 모두 멎자 고요가 스며들고, 주변은 깊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문명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의 일상은 전기가 멈추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졌다. 조금 전까지 열기를 내뿜던 히터가 꺼지자 찬 공기가 집 안 구석까지 파고든다. 휴대폰 배터리가 바닥을 드러내자 마음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갑작스러운 정전 속에서 가족들은 본능처럼 한곳으로 모였다. “다들 괜찮아? 조심해.” 짧게 오가는 말 한마디가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마음을 밝혔다. 빛이 사라지자 손으로 주변을 더듬고 귀를 기울이다 보니, 청각과 촉각은 한층 더 예민해졌다. 빛 한 점 남지 않은 집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전등과 초를 찾아 작은 불빛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전류가 멈추자 집 안의 전자제품들도 일제히 침묵했다. 가사를 도와주던 청소기와 세탁기, 나의 메신저가 되어 주던 컴퓨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던 TV까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익숙하던 생활의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묵직한 정적만이 감돈다. 그 틈으로 창밖에서 그동안 들리지 않던 생명의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기계음에 가려 잊고 있던 소리들이 조용히 귓가에 스며든다. 서너 개의 촛불이 가까스로 어둠을 밀어낸다. 거실에 희미한 불빛이 번지자 벽에는 아련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는 춤을 추고, 그곳은 작은 극장이 된다. 아들과 딸은 손으로 새와 나비를 만들어 벽과 천장에 날려 보내고, 작은 불꽃은 벽을 캔버스 삼아 이야기를 그려낸다. 어둠은 반드시 불편함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빛이 사라진 공간은 오히려 마음이 모이는 자리로 바뀌었고, 각자의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우리는 한곳에 모여 예고 없이 찾아온 시간을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새겼다. 어린 시절, 정전은 낯설지 않았다. 온 동네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아버지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셨고, 우리 형제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가리키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그 유래와 전설을 듣곤 했다.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달 속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는 형체를 발견하고는 정말 그곳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토끼에게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하자 언니들 따라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캄캄했던 집안이 다시 빛으로 채워졌다. 냉장고는 낮은 숨을 고르고, 시계는 잃었던 박동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안도감 속에서도 어둠이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해진 거실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낯설게 다가왔다. 잠시 멈춰 섰던 시간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자주 잊는다. 늘 옆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 영원할 것만 같던 건강과 시간, 그리고 아무 일 없어 보이던 일상까지도. 누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잠시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쉼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아침, 그날의 어둠을 떠올리며 평범했던 하루를 다시 마음에 담아본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불빛 마음 불빛과 기계음 휴대폰 배터리 시절 정전
2026.01.29.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