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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더하기와 빼기의 삶

요즘은 노자(老子)를 읽고 있습니다. 전에 혜거 스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은 왕필의 노자 주를 읽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습니다. 좋은 구절이 많고. 깨달음을 주는 글귀가 많습니다만, 다 기억은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몸과 마음 어딘가에 걸려서 오랫동안 자연스레 머물기 바랍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몸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왠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자연스러운 공부와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어색한 모순도 보입니다.   노자에서 제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구절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말입니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매일 더해야 하는 것이지만, 도를 위해서라면 날마다 덜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배움도, 학문도 생각해 보면 집착입니다. 배워서 드날리는 명예도 욕망입니다. 늘 그 점을 잊고 삽니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척하는 삶입니다. 도(道)라는 말은 ‘깨달을 각(覺)’으로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하나씩 떨어뜨리며 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마저도 집착이라는 선사(禪師)들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는 것은 더하고 빼는 일의 반복입니다. 계속 더하거나 계속 뺄 수 있다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지나면 무언가 더해져 있고, 무언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종종 내가 오늘 더한 것과 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것은 더해서 자랑스러웠고, 어떤 것은 더해서 부끄럽습니다. 어떤 것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어떤 것은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 욕망을 봅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이고, 무엇을 위한 깨달음일까요? 자랑스러움, 부끄러움, 다행, 아쉬움이 모두 욕망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쳐서 괴롭습니다.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경우에도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집착은 제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네요. 아니 온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눈을 부라리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리고 심장이 뜁니다. 이른바 편도체 활성화입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죠. 평생 살면서 편도체 활성화는 내게 괴로움으로 남았습니다. 먼 옛날 조상 때부터 내 몸속에 익숙해진 괴로움일 겁니다.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죠. 다만 배우는 목적이 문제일 겁니다. 더하기 위해서 배우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서 가려고 하면 숨이 차겠죠. 배우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찰 수밖에 없습니다. 더하여도 숨이 차오르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노자를 읽는 것도 배움이기는 하나 덜어내는 배움이 아닐까요?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까요? 아니 무엇을 더하려고 하고. 무엇을 빼려고 할까요? 저는 오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습니다. 더해지고, 굳어집니다. 어서 빼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빼내려는 생각은 오히려 그 생각을 곤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덜어내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저는 글을 씁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사람으로, 좋은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어느새 잡생각이 빠져나갑니다. 덜어지는 삶입니다. 위각일손(爲覺日損)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하기와 빼기 이야기였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빼기 편도체 활성화 부끄러움 다행 모두 욕망

2025.11.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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