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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게으름 권하는 사회

“실업급여 받으니까 출근 안 해요.” 한 취업 포털에 올라온 댓글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이 섞여 있다.     실업급여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제도가 너무 ‘따뜻하면’, 사람들이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고국에서는 같은 직장에서 21회 퇴사와 재입사를 반복하면서 실업급여를 1억 원씩이나 타낸 사례를 적발했다고 한다. 회사와 짜고 ‘퇴사한 척’ 하며 실업급여를 반복적으로 챙긴 것이다. 그가 받은 실업급여는 누군가의 세금이다.   미국에서도 COVID 팬데믹 시기에 정부는 실업수당을 마구 퍼 주었다.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뿐 아니라,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자영업자들이나 독립사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을 두둑이 주고, 심지어 평상시에는 6개월 동안 지급하던 실업수당을, 1년 반 동안이나 지급하다 보니 일하러 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도 생겼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때를 “공짜 돈이 만든 대퇴사 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고 불렀다. 정부는 국민을 지켜주려 했지만, 그 돈이 ‘일할 이유’를 앗아간 셈이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65세 이상 일하지 않는 은퇴자의 평균 소득이 일하는 젊은 근로자의 평균소득보다 높다고 한다. 은퇴자들은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소득에, 가지고 있는 집값은 오르고, 대출은 다 갚았다. 반면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가진 집에 세를 얻어 비싼 월세를 낸다. 어디 월세뿐이랴. 학자금 대출금과, 노인들 은퇴연금 지급을 위해 높아진 세금을 내느라 허덕인다. 일해도 남는 게 없고, “일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사회 전체에 퍼진다. 복지의 선의가 게으름의 합리화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의 역설’이다.   복지의 역설은 선진국의 경고를 넘어, 실패한 나라들의 비극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판 돈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상 복지를 약속했지만, 재정이 고갈되자 물가가 폭등하고 국가는 무너졌다. 국민을 돕겠다는 ‘선의’가 결국 국민을 굶주리게 한 것이다.     스리랑카는 감세와 무리한 보조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포퓰리즘을 택했다가 2022년 국가부도와 식량난을 맞았다.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공공요금과 생활비를 억누르며 복지를 유지했지만, 통화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폭등했다. 그리스 역시 연금과 공공임금을 무리하게 확대한 끝에 재정위기를 맞고, 실업의 수렁에 빠졌다.   이들 국가들은 공통으로 “복지의 목적이 보호가 아닌 유혹으로 바뀌는 순간, 제도는 실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민을 지키려는 제도가 국민의 근로의지를 갉아먹고, 결국 세금을 낼 사람도, 복지를 유지할 돈도 사라졌다.     복지는 산소다. 공기가 부족해서 헐떡거리는 사람이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도록 임시로 산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업급여는 ‘쉬게 하는 돈’이 아니라 ‘다시 일하게 하는 돈’이어야 한다. 연금은 ‘나이 들어 편하게 받는 보상’이 아니라, ‘평생 성실하게 일하며 납부한 은퇴자금을 돌려받는 결실’이어야 한다.     교활한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적인 인기만을 노리고 만든 그릇된 복지정책이 젊은이들에게 ‘게으름을 합리화’하거나, 일하고 싶어지지 않게 하는 순간, 그 사회는 무너지는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게으름 사회 무상 복지 사회 전체 학자금 대출금

2025.10.20. 19:34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게으름 권하는 사회

“실업급여 받으니까 출근 안 해요.” 한 취업 포털에 올라온 댓글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이 섞여 있다. 실업급여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제도가 너무 ‘따뜻하면’, 사람들이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고국에서는 같은 직장에서 21회 퇴사와 재입사를 반복하면서 실업급여를 1억 원씩이나 타낸 사례를 적발했다고 한다. 회사와 짜고 ‘퇴사한 척’ 하며 실업급여를 반복적으로 챙긴 것이다. 그가 받은 실업급여는 누군가의 ‘세금’이다.   미국에서도 COVID 팬데믹 시기에 정부는 실업수당을 마구 퍼 주었다.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뿐 아니라,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자영업자들이나 독립사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을 두둑이 주고, 심지어 평상시에는 6개월동안 지급하던 실업수당을, 1년 반 동안이나 지급하다 보니 일하러 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도 생겼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때를 “공짜 돈이 만든 대퇴사 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고 불렀다. 정부는 국민을 지켜주려 했지만, 그 돈이 ‘일할 이유’를 앗아간 셈이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65세 이상 일하지 않는 은퇴자의 평균 소득이 일하는 젊은 근로자의 평균소득보다 높다고 한다. 은퇴자들은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소득에, 가지고 있는 집값은 오르고, 대출은 다 갚았다. 반면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가진 집에 세를 얻어 비싼 월세를 낸다. 어디 월세뿐이랴. 학자금 대출금과, 노인들 은퇴연금 지급을 위해 높아진 세금을 내느라 허덕인다. 일해도 남는 게 없고, “일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사회 전체에 퍼진다. 복지의 선의가 게으름의 합리화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의 역설’이다.   복지의 역설은 선진국의 경고를 넘어, 실패한 나라들의 비극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판 돈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상 복지를 약속했지만, 재정이 고갈되자 물가가 폭등하고 국가는 무너졌다. 국민을 돕겠다는 ‘선의’가 결국 국민을 굶주리게 만든 것이다. 스리랑카는 감세와 무리한 보조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포퓰리즘을 택했다가 2022년 국가부도와 식량난을 맞았다.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공공요금과 생활비를 억누르며 복지를 유지했지만, 통화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폭등했다. 그리스 역시 연금과 공공임금을 무리하게 확대한 끝에 재정위기를 맞고, 실업의 수렁에 빠졌다.   이들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복지의 목적이 보호가 아닌 유혹으로 바뀌는 순간, 제도는 실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민을 지키려는 제도가 국민의 근로의지를 갉아먹고, 결국 세금을 낼 사람도, 복지를 유지할 돈도 사라졌다. 복지는 산소다. 공기가 부족해서 헐떡거리는 사람이 계속해서 생존할 수있도록 임시로 산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업급여는 ‘쉬게 하는 돈’이 아니라 ‘다시 일하게 하는 돈’이어야 한다. 연금은 ‘나이 들어 편하게 받는 보상’이 아니라, ‘평생동안 성실하게 일하며 납부한 은퇴자금을 돌려받는 결실’이어야 한다. 교활한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적인 인기만을 노리고 만든 그릇된 복지정책이 젊은이들에게 ‘게으름을 합리화’하거나, 일하고 싶어지지 않게 만드는 순간, 그 사회는 무너지는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게으름 무상 복지 사회 전체 학자금 대출금

2025.10.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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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관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인명 피해로 인해 인권 문제가 큰 이슈로 대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전쟁 자체가 폭력과 파괴의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전쟁 상황에서 인권이 보장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은 전쟁 상황에서도 일정한 행동 강령과 제한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정의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우선 인권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위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의 전체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창조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 중 그의 형상을 지닌 유일한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는 인간 존재의 사실과 본성 양면에 창조주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인권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람 가치에 상응하게, 사람으로서 충실히 그 존재 목적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연적, 절대적, 종합적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어떤 정치체제나 구조도 인간을 위한 조직과 방편이지, 인간 가치 이상으로 평가되거나 인간 목적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 역시 인간의 무한한 개별적, 사회적 존재가치를 이념적, 실제로 인정하는 사상이다. 그러기에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의 진정한 개념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경제적 안정, 사회와 문화적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그 혜택을 향유할 기회, 그리고 각자 인간으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제도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고 그 혜택을 향유하기 전에, 우선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에 따른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책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의무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행동을 요구하는 창조주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시스템공학에서 사용하는 신뢰도 계산법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시스템이 100개의 나무 조각을 연결해서 만든 물통이라고 가정할 때, 99개의 나무 조각이 아무리 잘 맞물려 있다고 해도 그중 한 조각의 높이가 낮으면 물이 그쪽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것은 1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에서 99개 부품의 신용도가 완벽해도, 그중 한 부품의 신용도가 낮으면 전체 시스템의 신용도가 그 부품의 신용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이론이다. 나 자신을 사회라는 물통의 한 나무 조각으로 볼 때, 만일 나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물통 속에 담긴 물이 나로 인해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각 개인은 사회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나 홀로인 개인은 없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결국은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웃의 허다한 마음이 모여 하나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정립할 수 없다. 나에 대한 어떤 결정은 나의 인간상을 만들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형태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선택에는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이 포함되는 것이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열린광장 존엄성 사회 사회적 관계 개별적 사회적 사회 전체

2023.11.2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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