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이야기] 하얀 겨울을 지나며
간밤에도 제설 자동차의 눈 치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올겨울엔 지난해보다 눈이 많이 오는 편이다. 눈이 내린다 싶으면 언제 왔는지 한밤중에 제설 자동차가 들이닥쳐 눈이 쌓일 틈도 없이 쓸어내고 인부들은 염화칼슘 뿌리기에 바쁘다. 눈 오는 고장이라 제설 시스템은 철저하게 작동된다. 그러나 제설차가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뉴저지에서 카운티 별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2인치 미만의 적설량이면 바로 장비동원을 하지 않고 기다려 본다고 한다. 커튼을 열어 내다본 하얀 겨울은 세상이 멈춘 것처럼 조용하다. 가로수나 풀밭, 주변 산기슭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세상, 해가 뜨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와 눈밭을 밟아 본 뒤 차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긁어낸다. 운전할 때 시야 때문이지만 자동차 위에 눈이나 얼음을 매단 채 큰길로 나갔다간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은 썩 뒤에 안 일이다. 곧이어 딸한테서 전화가 걸려온다. “아빠, 오늘은 미끄러워 꼼짝 말아야 해요.” 눈 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걸려오는 전화다. 피난 시절 머물렀던 충청북도 영동은 소백산맥에서 내려오는 바람으로 겨울 추위가 심했던 곳이다. 강추위로 논에 얼음이 꽁꽁 언 날 썰매를 타러 나가려고 하면 외할머니는 ‘감기 걸리니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 고 붙잡으셨다. 그러나 저녁 시간 동네 사랑방으로 놀러 나가는 건 허락하셨다. 나는 버려진 탄피와 깡통으로 호롱불을 만들어 노인들이 모여 앉은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젊어지는 샘물’ 등의 이야기로 손바닥 그림자놀이를 했었다. 또래 동생들과 함께 몰려다니는 재미가 컸지만 전쟁의 상처와 혹한 속에서 살았던 그 시절은 아이들에게도 이웃에 대한 공동체 의식 같은 게 있어서 그런 놀이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세월이 또 몇 굽이를 돌고 돌아 추위가 없는 캘리포니아에서 살다 뉴저지로 옮겨와 세 번째 겨울을 맞고 있다. 여기는 눈이 내리거나 추운 날이면 산골 마을 전체가 적막감이 돌 정도로 조용해진다. 인접해 있으면서도 뉴욕과 뉴저지의 겨울 풍경이 크게 다르다. 뉴욕은 눈이 아무리 많이 내려도 여전히 바쁜 사람들, 꽉 찬 지하철, 심지어 눈 덮인 센트럴 파크에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깅하는 사람들로 붐빈다지만 뉴저지에 눈이 내리면 모두가 느리고 조용해진다. 도로는 물론 주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산과 공원과 숲에는 사람보다는 자연의 숨결만으로 가득해진다. 뉴욕의 겨울이 화려하고 역동적이라면 뉴저지는 담백하고 한적하다. 지난가을에는 추위가 일찍 찾아오고 비가 잦은 탓에 어찌하다 보니 텃밭의 가을걷이는 물론 퇴비를 덮고 객토를 하려던 월동준비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속절없이 긴 농한기를 보내는 동안 농기구와 비품들을 점검하고 실내에 토마토 고추, 가지, 바질 등의 파종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올해는 채소와 화초밭을 바꿔보고 작물의 종류도 욕심을 내지 말고 선택과 집중으로 농사의 내실을 기하기로 했다. 시화연풍(時和年?)이란 말이 있다. 천재지변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인데 시화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풍은 인간과 산업과의 의미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전론(田論)에서 ‘생명을 낳게 하는 것은 하늘이요, 기르는 것은 땅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 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사 모든 일에 사람들의 마음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겨울에는 교도소에서도 사람들끼리 등을 비비며 추위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웃 간의 관심, 연대가 없이는 연풍(年?)도 한갓 미망일 수밖에 없다. 딸네 집 텃밭까지 4마일을 오르내리는 좁은 산길에는 겨울이 한창이다. 숲속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덮여 있으나 찻길을 내느라 길섶에 밀어낸 눈덩이는 흉물스럽게 검은색으로 바뀌면서 마치 흑백 요리대전의 세트장을 연상케 한다. 더 볼썽사나운 것은 이 겨울 산골 밖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추태다. 어느 세월이 되어야 폭력과 탐욕의 시대가 가고 화평과 공존의 시대가 오려는 것인지. 산속의 검푸른 소나무 잎이라도 어서 연초록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김용현 / 언론인산골 이야기 겨울 겨울 추위 겨울 산골 겨울 풍경
2026.02.02.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