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부치지 못한 편지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마음으로 쓰는 편지이다. 숙이, 60년째 내 가슴에 담고 놓지 못하고 있는 이름이다.   꽃샘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던 삼월 어느 날, 산골 초등학교 운동장에 큰 트럭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우리들은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트럭 안에는 수십 명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한 명 한 명 내려서 운동장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맨발이었고, 나중에 보니 발은 동상에 걸린 듯 붉은빛으로 변하여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몇 날이나 씻지 않았는지 까만 얼굴에 눈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쟁고아들이라 했다.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고아원에 살게 되었고 우리 학교에 다닐 거라 했다. 무서웠다.   트럭에서 내린 아이 중 하나였던 숙이. 짧은 단발머리 안에 부스럼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꼬질꼬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꼬마 아이. 그가 내 짝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내 인생 첫 시련이었다.   깡마른 몸, 버짐이 피어 있는 얼굴, 땟국물이 흐르는 애가 나는 싫었다. 그렇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는 아이의 모습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지였던 우리 마을은 학교에서 십 리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오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했다. 비만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사라져 버렸기에 자연스레 학교를 쉬었다. 그런 날이면 고학년 언니들은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유난히 작고 어린 나에게 학교 가는 길은 고행길이었다.   숙이가 그 길을 동행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 집 가는 길목에 있는 고아원이 숙이의 새 보금자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숙이의 얼굴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옷도 깨끗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숙이가 아니라 늘 함께 붙어다니는 짝꿍이었다.     등굣길에 숙이는 내가 올 때까지 징검다리에 앉아 기다려 주었고 하굣길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헤어졌다. 혼자 집에 갈 때 사람만 나타나도 무서웠던 시골길이 둘이 되자 마냥 웃고 떠드는 즐거운 길이 되었다. 가끔 고아원 남자 아이들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숙이랑 함께 있을 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60년대, 당시 내 고향 영산은 6월이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햇보리도 아직 타작을 못했고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감자 농사를 지어서 그 시기에는 도시락도 주로 감자를 삶아 싸 주었다. 어느 날 청소 시간에 숙이가 다가와 네 도시락 뚜껑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도시락이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점심으로 먹을 하지 감자를 다 먹어버린 것이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한 친구가 숙이가 가져다 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나는 설마 하며 숙이를 바라보았다. 숙이는 아니라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숙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듣지 않고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도둑년이라고 소리 질렀다. 자기가 저질러놓고 나에게 시치미 뚝 떼고 도시락 뚜껑이 열렸다고 말하는 얌체 같은 계집애라고 퍼부어 댔다.     그러자 숙이는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깨어났을 때는 집에 누워있었다. 엄마는 자초지종을 아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3일 동안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갔다. 숙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징계했는지 숙이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숙이의 빈자리는 커져만 갔다. 등하굣길에 함께 다니며 조잘대던 친구가 사라졌다. 늘 징검다리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숙이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었다. 겨우 3개월 남짓 그녀와 함께했었다. 그동안 날마다 십리 길을 함께 오가며 쌓은 정이 아니든가, 그제야 내가 숙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하였다.   전쟁고아였던 숙이, 나는 한 번도 그 아이에게 가족 얘기를 묻지 않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도 없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느냐고 위로해 주지도 못했다.     더럽고 초라한 몰골로 트럭에서 내렸던 아이, 고아원에 사는 불쌍한 아이라는 편견을 짝꿍이며 등 하굣길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라는 이유로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 나는 숙이의 소식을 듣고 싶어 몇 번이나 고아원에 찾아갔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다시 찾아오지 말라던 아저씨의 눈은 ‘너 때문에 떠났는데 왜 찾아오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 한구석에 화두처럼 박힌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감자 몇 개가 뭐라고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숙이가 정말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설사 먹었다 하더라도 배고픈 친구의 마음을 왜 살피지 못했을까.   문득문득 그녀가 보고 싶을 때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매번 보낼 곳을 알지 못해 허공에 날릴 뿐이었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이사를 했다. 10년 뒤 고향을 찾았을 때 친구들에게 숙이의 소식을 물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떠난 이후 그녀는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 친구 숙이, 그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단발머리 소녀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지금도 감자를 먹을 때면 숙이가 생각나곤 한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유년 시절 짧은 만남 후 아프게 헤어진 한 소녀를 60년 세월 동안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정길 / 원불교 교무·수필가문예마당 편지 수필 산골 초등학교 우리 학교 고아원 남자 
                                    2025.10.23.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