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끝은 어디일까? 하늘의 끝 다음에는 또 무엇의 시작일까 하는 의문이 시작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 후 학교만 꼬박 27년을 다녔는데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 사춘기에 가졌던 철학적 명제 가운데 가장 절실했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창조주를 알게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면서 명쾌해졌다. 하지만 화창한 젊음 가운데 생각해보던 죽음은 아직 추상이었다. 몇 년 사이로 정말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삶의 구성원으로 생생하게 듣고 보아온 이들을 결별하게 하는 죽음은 어떤 질의 답변과도 상관없이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볼 때의 현기증과 함께 속절없는 상실감을 동반하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바람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사라지는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켜낼 수 없다. 전날 통화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 주검으로 발견되는 현실은 어지럼증을 동반한다.신학적으로나 임상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또 부서진 인간 관계, 삶의 애환과 질병, 영적인 공격을 받는 상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죽음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이간이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성경에서 죽음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을 때다. 두번째로 죽음이 언급된 것은 사탄의 입을 통해서다. 뱀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다. 이것이 사탄이 인간에게 한 가장 치명적이고 또 최초로 한 거짓말이다. 사탄의 최우선적인 공격 대상이 하나님이며 그 다음이 인간을 속이는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바로 생명을 파괴시키고 죽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인간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탄의 말을 들음으로써 죽음이 현실이 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긍휼과 자비로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청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두번째 아담으로 예수를 인간 세상에 파견했다. 그 분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활과 영생을 증거시켰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인 성정에 따라 살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다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다. 죽으면 끝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들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 허무와 절망, 그리고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는 배경이 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믿는 마음 상태라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또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영원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그런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천명한다. 믿음은 설명할 수 없어도 믿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화잍헤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세속을 초월한 지속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분이 창조한 이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인한 지독한 상실감 때문에 현기증과 구토, 애간장이 오그라드는 슬픔을 감당할지라도 재회의 소망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하늘의 끝은 아직 헤아릴수 없어도 그것을 만든 이를 믿을 수 있다면 감사하지 않겠는가.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 창조주 하나님 아담인 예수 상실감 때문
2022.01.28. 15:09
손으로 물을 쥐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행복을 들 수 있다. 행복은 쉬이 잡힐듯하다가도 놓치는 아쉬움이 있어 파랑새로 비유되기도 한다. 어릴 때나 젊어서는 남들이 하는대로, 세상이 가르쳐주는대로, 사회가 당연시 여기는대로 삶을 정의하며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남이 아닌 자신이 정의하는 삶과 인생, 행복과 불행의 의미에 대해 숙고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의 정의로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들의 합계를 생각한다. 서로 서로 좋은 일, 궂은 일을 알아주고, 축하하거나 기념할 날을 기억해주고, 친절한 말과 소소한 선물을 통해 관심을 주고 받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치 있는 사람으로 들어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상태로서의 행복이다. 그런 일들은 한결같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즉 행복은 선택이다.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관계의 방향이 결정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행, 불행의 여건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날마다 매순간마다 행, 불행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그렇게 지속되다가 유한점에 다다르는 날이 온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는 삶을 약속한다. 구원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는 길이다. 인생에서의 행, 불행의 선택처럼 하나님을 믿거나 거부하는 것 또한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생과 사에 대한 즉석 선택에 대한 좋은 예가 구약에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떠돈 지 38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사건이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 심한 불평을 했다. 그 불평의 대가는 사막에 나타난 불뱀에 물린 사람은 다 죽어 나가는 벌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와 고통가운 데서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과 모세에게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며 모세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은 먼저 청동으로 만든 구리뱀을 막대에 달도록 한 후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는 말씀으로 죽음을 면하는 처방전을 내리셨다. 신약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막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면 살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면 산다는 답을 주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허망하기까지 한 처방전은 비웃음을 사고, 외면당하고, 괄시를 받아왔다.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따위로 몸 속에 든 독이 가시겠냐고 실소하며 자신의 지식과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끝내 죽어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련만, 평소에 하나님과 모세를 믿지 않고 불신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막대에 달린 불뱀 사건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생사에 관한 처방전임에도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웃기는 이야기이거나 실소하며 간과할 내용 이상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극한 죄로 정의한 인간의 교만이다. 어차피 인간의 지식으로는 죽음 저편의 내용이 가늠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쉽게 선택하고 기대해 볼 수 있는 영생의 처방전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일 것이다. 나중에는 어찌 되거나 당장 원하는대로, 몸에 붙은 습관대로 살리라는 나태한 이유에서거나, 누가 내린 처방전이든 자신이 이해하고 판단하는 내용대로 죽으면 끝이라는 나름 확실한 소신파들이다. 공짜로 천명된 처방전, 예수가 요한복음(3:14)에서 직접 하신 말씀을 보라:“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인 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원한 행복의 기회마저 저버리는 선택 또한 각자의 몫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 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처방전 생사 생사 처방전 처방전 예수 인생 행복
2021.11.12.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