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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샤토 부부의 따뜻한 유산

LA한인타운에서 테니스를 치는 이라면 ‘샤토(Shatto)’ 공원 코트를, 배드민턴을 즐기는 이라면 샤토 공원 체육관을 한 번쯤 이용해봤을 것이다. 월셔 불러버드와 3가를 잇는 샤토 플레이스, 그리고 4가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샤토 공원은 한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지명들이 LA의 초창기 개발자이자 자선가였던 조지 R. 샤토(George R. Shatto)와 클라라 샤토(Clara Shatto) 부부의 이름에서 비롯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조지는 1850년 8월 15일 오하이오주 메디나 카운티에서 부유한 농부 가정의 8남매중 7남으로 태어났다. 농사보다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성인이 되자 도시로 나가 점원으로 일하며 돈을 모아 잡화상점을 차렸다.   꼭 26번째 생일인 1876년 8월15일 그는 아내 클라라와 결혼했다. 부부는 미시간주 여러 도시를 다니며 작은 소매상 가게를 운영하며 돈을 벌었고, 그랜드 래피즈로 이주했다. 그후 부동산 개발업과 백화점 사업으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첫 아들 월터를 생후 8개월 만에 잃는 아픔도 겪었다.     결혼 10년차가 되던 1886년 부부는 미시건에서 LA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부부는 익숙치 않은 곳에서도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LA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 대형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1887년, 현재의 굿사마리탄 병원 부지에 지은 고급 주택 ‘샤토 맨션’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품격 있는 주택으로, 지역 상류층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두 번째는 카탈리나섬 개발이다. 부부는 샌타 카탈리나섬을 15만 달러에 매입한 뒤 관광 산업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휴양지 개발에 착수했다. 섬의 지도를 만들면서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의 이름을 샤토로, 항구는 샤토 항구로 부르자는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조지 샤토는 이를 고사했다. 대신 전설 속 신화의 섬 이름에서 따온 ‘아발론(Avalon)’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조지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따라 거리나 시설명을 짓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LA 이주 7년 만인 1893년 LA시 경찰 커미셔너에 임명돼 명성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해 5월30일 그는 열차충돌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지가 사망한 뒤에는 아내 클라라가 사업을 이었다.   부부는 사업적 성공만큼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조지는 생전에 35에이커의 땅을 LA시에 기부했고, 이는 1918년 프랑스 독립전쟁 영웅을 기리는 ‘라파예트 공원(Lafayette Park)’으로 조성됐다.   남편이 숨진 뒤에는 클라라가 기부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녀가 기부한 커먼웰스 선상 5가와 6가 사이의 대지는 LA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 중 하나인 ‘제일회중교회(First Congregational Church)’의 터전이 됐다.   이외에도 여러 교회에 예배당 부지를 기부하고, 생후 8개월 만에 떠난 아들을 기리기 위해 포모나 대학에 장학금도 기탁했다. 이처럼 클라라는 LA의 초기 종교·교육·공공 인프라 조성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샤토 거리나 샤토 공원은 LA의 미래를 꿈꾸며 과감한 투자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한 부부의 삶이 남긴 대표적 유물이다. 길을 걷고 공원에 갈때마다 샤토 부부의 열정, 시대를 읽어낸 안목, 그리고 따뜻한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들의 이름은 도시에 남아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성공은 지역과 함께 나눌 때 더 오래 기억된다”고.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샤토 부부 샤토 공원 클라라 샤토 샤토 항구

2025.12.0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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