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후버길에 새긴 이민 가정 성공기
LA 한인타운의 동쪽 경계를 긋는 후버 거리(Hoover Street). 이 길을 지날 때면 으레 미국의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1874~1964)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우리의 상식을 비켜간다. 이 거리의 이름은 대공황 시대의 대통령이 아닌, 19세기 초반 스위스에서 건너와 LA의 황무지를 개척한 한 이민자 가문의 땀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바로 ‘후버 가문’의 성공기다. 이야기는 서부 전체가 황금을 향한 열망으로 들끓던 ‘골드러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9년, 스위스 출신의 의사 레온스 후버(Dr. Leonce Hoover)는 새로운 삶을 찾아 가족을 이끌고 머나먼 미국 땅을 밟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까지 지냈던 엘리트였지만, 그는 낯선 땅에서 과감히 의사 가운을 벗어 던졌다. 펜실베니아주로 이민온 그는 수잔나 리드와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펜실베니아주, 인디애나주에서 거주하다가 1849년 아내와 아들, 두 딸과 함께 LA로 이주했다. 기록상 그가 LA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는 흔적은 없다. 대신 그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포도 농장을 일구며 LA 와인 산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와인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판매 사업에도 뛰어들어 큰 재력을 얻었다. 그의 선택은 미지의 땅에 풍요와 산업의 씨앗을 뿌린 개척자의 결단이었다. 아버지 레온스가 대지에서 희망을 일구었다면, 그의 아들 빈센트 후버(Vincent A. Hoover)는 도시의 뼈대를 세웠다. 20대 청년 빈센트는 아버지와 달리 은행업과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어 신흥도시 LA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74년 LA 카운티 은행(Los Angeles County Bank)의 초대 행장으로 도시 경제의 기틀을 다졌고, 탁월한 수완의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오늘날 LA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의 헌신은 경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859년부터 186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LA 시의회 의원으로 봉사하며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황량한 평원에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서는 도시 개발의 최전선에는 이민 2세 빈센트의 도전 정신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LA시는 그의 지대한 공헌을 잊지 않았다. 1875년, 도시는 그의 이름을 붙인 ‘후버 스트리트’를 헌정하며 한 이민자 가문의 역사를 LA의 심장부에 새겼다. 이는 개인의 성공을 넘어, 낯선 땅에 뿌리내려 도시의 주역으로 우뚝 선 개척자 가문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빈센트 후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1883년, 50대 초반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비록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 우리가 무심코 걷는 길 위에, 그리고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LA의 역사 곳곳에 뚜렷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후버 거리를 지날 때면, 170여 년 전 LA를 개척했던 한 이민자 가문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후버 가문의 개척 정신은 한인을 포함한 후대의 이민자들에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김영옥 대령을 기념하는 5번 프리웨이 구간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10번.110번 프리웨이 교차로 인터체인지처럼, 새로운 이민자들이 정착해 역사를 만들어가며 도시의 풍경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 넣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길 위에는 LA의 잊힌 역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과거의 사실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민자의 꿈이 도시의 역사가 되는 땅, LA는 오늘도 그렇게 새로운 후버들을 기다리고 있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후버길 성공기 이민자 가문 부동산 개발업자 후버 가문
2025.09.08.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