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친한 사이였다. 화가인 그는 당연히 친구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데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는 본래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를 한 캔버스에 넣어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 수집가에 의해 그림이 둘로 갈라져 지금은 쇼팽을 그린 부분과 조르주 상드를 그린 부분이 각각 다른 곳에 소장돼 있다. 이 중 쇼팽의 얼굴은 실루엣이 살짝 무너진 채 전체적으로 브라운 계통의 색면에 흰색을 사용해 거칠게 표현했다. 열정이 흘러넘치는 열혈 청년의 얼굴이다. 반면에 조르주 상드의 얼굴은 정서적으로 지친 모습이다. 전 남편과 싸워 아이들을 쟁취하고, 끊임없이 글쓰기에 몰두하고, 틈틈이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병약한 쇼팽을 돌보는 등 일인다역을 억척스럽게 소화해 내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상드의 모습이 아니다. 들라크루아는 상드가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 속에선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상드의 기(氣)를 그림 속에서나마 누그러뜨리고 싶었던 것일까. 현실에선 쇼팽이 여성, 상드가 남성의 역할을 했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는 두 사람이 각자의 성적(性的) 정체성에 충실한 모습을 하고 있다. 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운명처럼 들라크루아의 그림 역시 둘로 갈라져 각각 다른 곳으로 갔다. 이 걸작을 둘로 나눈 것은 물론 누군가의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림 속 두 사람이 진정한 합일(合一)을 이루고 있었다면, 한쪽이 없으면 도저히 그림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구도 속에 들어 있었다면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그것을 둘로 나누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을 서로 분리해도 무방하도록 그렸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심리적·정서적 거리를 포착한 화가의 감각이 놀라울 따름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쇼팽 연인 조르주 정서적 거리 브라운 계통
2024.12.30. 18:52
1830년 11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역에서 한 소년이 기차에 올랐다. 이름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이었다. 그 무렵 이미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의 명성을 얻어 연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그에게 고향에서 작은 소포가 배달됐다. 한 줌의 흙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국 폴란드의 흙’이라 적혀 있었다.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프랑스 여류 소설가이자 사교계의 별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 모정과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의 고독과 우울에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쇼팽은 폐결핵으로 쿨룩거리고 있었다. 연상의 상드는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간호사처럼 쇼팽을 보살폈다. 이들의 행복한 세월은 9년이 지나 끝났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찬바람과 눅눅한 기후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극약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 끝내 눈을 감았다. 39세였다. 임종 무렵 머리맡에는 19년 동안 들고 다닌 조국의 흙이 있었다.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울려 퍼졌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쇼팽의 친구가 관 위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줬다. 며칠이 지나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장례식이 거행됐다. 관도 없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 매장됐다. 그 안에 쇼팽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친지들은 쇼팽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줬다. 오늘이 쇼팽의 175주기다. 이런저런 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음악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가 말했던가. 예술에는 조국이 없다고….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쇼팽 무덤 프레데리크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역 조국 폴란드
2024.10.20.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