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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운동화 한 짝

  운동화를 한 켤레를 샀다. 무거운 발에서 벗어난 시원함일까, 자신의 직분을 다했다는 충만감일까,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이 참으로 홀가분해 보인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생각나는 신발 한 짝이 있다. 그 운동화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움과 원망의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가시네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됐으니 공장에 가 돈을 벌든지 미용기술 같은 것을 배워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니 고등학교가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아 공짜로 학교에 다닌다는 말에 아버지도 더는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많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아버지한테 절대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던 내 결심과는 달리 학비를 뺀 책값 등등 모든 것이 아버지 몫이 되었다.                                                                   그래서 신고 다니는 내 운동화가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앞 두덩이 터져 발가락이 보여도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운동화는 뒤축이 떨어져 걸음을 걸을 때마다 뒤축이 찰딱거렸다. 아무리 발가락을 안으로 구부려 운동화를 눌러도 터진 두덩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너덜대는 운동화도 아버지의 무시도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구겨지는 내 자존심을 삭일 길은 없었다.     그저 내게 만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나는 징징거리며 어머니를 졸라댔다. 아버지 몰래 새 신을 산다는 것이 어두운 숲속에서 마라톤을 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 앞에서 무너지는 내 자존심을 생각하면….     시장에서 본 그 하얀 운동화, 그것은 정말 훔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울며 보채는 딸이 불쌍했던지 호랑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새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날 밤 나는 새 신을 가슴에 껴안고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다음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하얀 운동화가 빳빳하게 세운 내 흰 교복 칼라와 맞물려 백조의 날개처럼 빛났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보란 듯이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도도하게 걸었다. 푹신한 쿠션에 둥둥 뜬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등굣길이 조금 더 멀었으면 싶었다. 신문지에 싸 온 헌 운동화는 뒤축을 구부려 실내화로 신었다. 차갑던 교실 바닥이 폭신폭신했다. 온종일 콧노래가 나왔다.     집에 오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운동화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백합같이 보드라운 운동화가 흰 구름처럼 깨끗하고 사랑스럽다. 갈색 나뭇잎 하나가 팔랑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나는 행여 빨간 물이 들까 봐 얼른 나뭇잎을 치우고 운동화를 탈탈 털었다. 집에 오자마자 먼지를 털어 마루 안쪽 구석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껴서 오래오래 신어야지.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온 집안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동안 낡은 운동화 때문에 찜찜하던 기분을 싹 털어낸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다.     “저게 누구 신발이냐?”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마루 위의 신발을 보고 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아차 했다. 운동화를 아버지 눈에 안 띄는 곳에 두었어야 하는 것을 너무 흥분해 깜빡했었다.     “제 신인데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 운동화는 어쩌고”     “학교에”   “이런 맹랑한 것 봤나. 당장 가서 가져와. 한참 더 신어야 하거늘.” 아버지가 곧 나를 후려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떨어진 그까짓 운동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밤중에 가져오라고 해요. 내일 학교 갈 때 가져오라고 합시다.” 어머니가 옆에서 한마디 하자 “저 여편네가 자식들을 저렇게 망친다니까. 당장 가져와.”   나는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와 학교로 향했다. 구부러진 그믐달 아래 질척질척 걷는 내 발길이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았다. 컴컴한 골목에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보면 내 그림자가 길게 멈춰 서곤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굳게 닫힌 교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꾸벅꾸벅 졸던 수위 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교문을 열고 나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훌쩍대며 늘어놓는 내 얘기를 들은 수위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돌아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너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구나.” 다정히 등을 쓸어주는 수위 아저씨의 말에 나는 그만 또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할까,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내 머리를 휘저었다.                                         공원을 지나오다 다리 위에 앉았다. 푸르스름한 하천이 달빛을 받아 잔잔한 윤슬을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 운동화를 다시 신으라고,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가 못 버리게 한다면 내가 버릴 거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저 다리 밑으로 던져버릴 거야.”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다리 밑으로 휙 던져버렸다. 또 다른 한 짝을 던지려는 순간 아버지의 불꽃같이 노한 얼굴이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안 돼! 나는 남은 한 짝을 가슴에 꽉 움켜쥐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한테는 오다가 운동화 한 짝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 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다. 나름대로 내게 절약하는 습관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내가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아셨을 것이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하천에 던져버린 그 운동화 한 짝이 생각난다. 운동화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젠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을 주섬주섬 플라스틱 봉지에 주워 담았다.   임지나 / 수필가문예 마당 운동화 수필 운동화 위로 운동화 때문 운동화 그것

2024.07.2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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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아내와 함께했던 31년, 사랑하고 정다웠던 날들보다 아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전 아내는 서둘러 갔다.   우리가 중매로 만났을 때, 그녀는 노처녀, 나는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다. 그녀는 LA 카운티병원의 면허 간호사였고, 나는 콜로라도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LA로 와 판촉물 광고회사를 막 시작한 영세업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운 운동장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나의 자존감이나 용맹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10여 년을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온 홀아비와 장미꽃처럼 가시와 자존심이 세었던 노처녀의 결혼은 서로 간절했던 만큼 달콤했고 신혼은 아름다웠다.     내 사업은 기존 고객이 없기에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수입이 많은 아내가 마치 후원자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버텨나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아내의 주도로 흘러갔다. 아내는 내게 필요한 옷이나 구두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사이즈를 재거나 물어온 적도 없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쇼핑이나 집안 대소사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가 된 기분도 잠깐씩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보살피며 다스렸고 함께 상의해야 할 집안일도 혼자 결정했다. 하다못해 마루를 새로 깔고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집수리 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는 매달 버는 돈에서 할당받은 액수를 내놓는 것도 벅찼지만, 아내의 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집의 재정 상황은 어떤지 깜깜이였다.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왜 싸움을 안 했겠는가. 결혼에 또 실패해선 안 된다는 마치 하나님의 계명 같은 내 결심에 충실 하느라 설사 싸움이 벌어져도 일진일퇴의 부부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핀잔이었다. 나는 아내를 돌이킬 겸, 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참회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108배 절을 100일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아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우리는 한인 여아를 입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피아노에 발레, 재즈 댄스, 바이올린, 첼로, 수학 학원, 테니스 교습, 수영 등 학원과 교습소를 순례하듯 다녔다. 아내는 늘 ‘애 ㅇㅇ학원에 등록했으니 몇 시에 데려가고 몇 시에 데려오라’는 통보만 하는 식이었다.   아마 결혼생활 10년 차쯤부터였을까.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나는 삶도 사업에도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부여 없이 우울의 못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은 오히려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했다. 의사는 세 번이나 다른 약을 처방했지만 약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 발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통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괴로움도 유발된다는 사실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권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아내의 사과와 8가지 약속을 받고 이혼소송을 취하했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는 한 가지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송과 취하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짐에 가서 라켓볼을 치거나 근육운동을 하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명상에 심취했고, 명상과 트래킹을 위해 한국은 물론 미얀마나 네팔 등을 찾기도 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오면 더 고요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고 완벽주의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두 번의 암 수술 등으로 고생하다 70세도 못 넘기고 먼저 갔다. 장례식 후 화장을 해 유골은 뒤뜰 비탈진 정원에 뿌렸다. 그리고 정원에 아내 이름을 따 ‘Kyung’s Garden'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짐을 다 내려놓고 떠났다면 미움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내 생각이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정원 푯말을 보곤 했다.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내가 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곤 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잘 해주질 못해 미안했다. 아내가 남긴 연금 등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도 놀랐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길을 걷다 ‘사주 궁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늘그막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두 사람 걸 다 봐야 하니까 4만 원요." 숨진 아내의 생년월일과 내 것을 주었다.     "이 여자분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남자였으면 좋았을 만큼 대장감 사주예요. 이분 사업하시나요? 사람들을 거느리는…."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로 향하다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스리가 이렇게 싱겁게 풀리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접어주고 살지 않았을까? 나는 ‘여보, 왜 그랬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윤기 / 수필가문예 마당 미안 수필 아내 생각 아내 이름 정원 푯말

2024.07.11.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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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내가 보이면 세상도 보인다

당나귀와 같은 근성에 휘두르는 회초리가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탔던 당나귀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교훈이다. 당나귀 가는 길에 몸에 두른 옷을 벗어 깔아 놓고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당나귀는 착각 현상에 빠져 붕 뜰만도 하지 않았겠는지?   칭찬과 자화자찬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옛 성인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 당나귀 회초리다. 일반적인 의미의 회초리가 아니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다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약이다. 세속적 도발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것에 약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놓아버리게 된다. 눈길을 따라 들락날락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휩쓸리는 짓거리가 보이면 즉시 두문불출로 대응한다.   내면으로 숨어드는 내공의 연습도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바닥이 보일쯤이면 어느새 1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명상 중에 흘러갔던 것들을 기록한다. 때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성, 오래전에 있었을 법한 무의식에서 걸어 나오는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지? 본적도 느낌도 없는 관계지만 마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시공을 넘어와 포개 앉은 다리에 무릎을 부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쳐내 버린다.   삶과 피안의 세계 경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손짓이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튀어나온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왜 아우성처럼 느꼈는지? 곱씹으려 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는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까불고 팔랑거리다 못해 촐싹거리는 어린아이가 나의 자화상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규정지어 주는 것이 싫다. 그대로 붙들려 그것처럼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이다.   별스러운 자화상 없이도 과거에 붙들림 없이 잘 지내왔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존재라기보다는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 눈이 예쁘네, 어디서 했수?” “아, 내 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탐색의 코드부터 엇갈리기 시작하면 차라리 용모 지상주의 선전포고를 인정하여 맞장구를 치는 재미도 있다. 숨어있던 자화상이 기어 나와 나 역시 침을 튀길 기회다.     젊은 날의 초상까지 보여 주면 대화는 지속한다. “리모델링한 거 아니지?” “나, 40대에도 교인 할머니가 자기 아들 중매 서겠다고 찍힌 거 알아?” “알지, 저이가 누구누구 차 타고 교회에 왔다가 그이 누이한테 딱 걸려서 노총각 혼삿길 막을 셈이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편의 부탁으로 타고 온 것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의 인정하기 싫었던 자화상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포장으로 부풀리는 거짓 자아다. 이 때문에 당나귀 회초리는 모욕을 가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헤이, 주책없는 당나귀야,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히힝거리지 말아라.” 때로는 “이 늙어빠진 당나귀야 나대지 말고 잠잠해라” 하면 신기하게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소곳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독이 오른 뱀처럼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그러나 갚으려고 기회를 노릴 것도 괜한 감정 낭비로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만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길들여야 한다. 길들이지 않는 자아는 분노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진다. 자아는 상처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방어기제에는 능하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조용한 시간에 촛불을 마주하고 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를 길들인 사람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무척 평화롭고 빠르다. 그러나 초보자는 단 십 분도 견디기 힘들 것이겠지만 분노 오해 등 부정적 속성인 자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앉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분심 잡념의 방해도 심하다. 자아를 길들이는 일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통제를 받는 자아는 충고와 모욕에 순응하며 주인을 알아본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당나귀 회초리 아우성 오래전 부정적 속성인

2024.07.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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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뜬구름 잡기

얼마 전 운전을 하다 한 편의점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을 봤다. 1등 당첨금이 10억 달러가 넘는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었다. 당첨만 된다면 대대손손 부자로 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미국 전역이 복권 관련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때다. 당시 그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보다도 낮다고 했다. 그만큼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록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발표 전까지는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 복권을 산 적이 두 번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직장을 다닐 때였다. 회사 동료들과 단체로 복권을 샀는데 그때도 1등 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때 복권 구매에 참여한 것은 일확천금의 불로소득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뜬구름 잡는데 참여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성직자 한 분은 “복권을 사는 것은 노숙자 돈을 갈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까지 한다. 매달 주 정부나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복지 지원금을 복권 구매에 탕진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란다.   복권과 관련해 25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음식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3명이 일을 끝마치고 공동으로 즉석 복권을 사기로 했다. 당첨되면 3명이 똑같이 당첨금을 분배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여러 장의 복권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이 5000만원에 당첨됐다. 당시 그 액수를 3등분 하더라도 이들이 20년 동안 저축을 해야 만질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은행이 문을 열면 당청금을 찾기로 하고 그 복권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혼자 챙기려는 욕심이 생겨 동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그 복권을 갖고 줄행랑쳤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나머지 두 명은 즉시 은행에 지급 정지를 요청했고, 복권을 들고 도주했던 욕심쟁이는 결국 절도죄로 체포가 됐다. 욕심은 정신적인 것에 두어야지 물질적인 것에 두면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종류의 복권이 있는 미국에도 복권 당첨자 관련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복권 당첨으로 인생 역전을 이뤘다가 끝내는 노숙자로 전락한 남자 이야기다. 그는 복권 당첨 후 자가용 비행기까지 몰고 다니며 돈을 물 쓰듯 낭비하고 허세를 부리며 다녔다. 그 결과 당첨금을 3년 만에 모두 날려 버리고 노숙자가 됐다는 것이다.     한 조사 기관에서 거액의 복권 당첨자들을 추적 조사했더니 그중 99%가 거액이 생긴 후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며 복권 구매가 후회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씁쓸해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복권 1등에 당첨되면 그 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일확천금이 일단 수중에 들어오면 마음이 변한다고 한다. 나 또한 불로소득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며 교만과 허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 할 수 있는가.   내가 근무하는 양로 보건 센터에 한국에서 온 대학 졸업반 학생이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 학생과 점심시간에 식사하며 우연히 복권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학생은 자신은 복권을 한 번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일시에 일확천금이 생긴다면 자신의 꿈과 도전은 사라지고 안일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인생에 파멸이 올 것이라고 했다. 땀 흘려 일한 만큼,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니냐고 나에게 반문하였다. 순간, 그 학생한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청년의 사고방식이 너무 듬직해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그 학생처럼 삶의 철학이 건전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어떤 것이든 ‘뜬구름 잡기’는 여기서 멈춰야 겠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 마당 뜬구름 수필 복권 당첨자들 복권 이야기 복권 구매

2024.07.04. 18:00

[문예 마당] 자이언 캐년을 다녀와서

나이를 먹어도 여행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남전도회 회원들은 며칠 전부터 시간 나는 대로 모여 여행에 대해 의논했다. 은퇴하고 빠듯한 살림을 쪼개 여행을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최대한 호텔 비용을 줄이고 음식도 뷔페로 정했다. 75세를 넘기면서 이런저런 고질병들이 있는 나이라 이것저것 가려 먹으려면 여러 가지 중에서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전도회 회장님이 여행 경험이 많은 분이라 무척이나 다행이다.   드디어 여행가는 날 아침 8시. 교회 앞 주차장에는 24명의 남녀 노인들이 모였다. 이번 수련회는 부인들을 동반한다. 갑자기 응급 상황이 생겨도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큰 의미를 포함했다.   목사님 두 분이 운전사를 자원해 교회 차 앞 좌석에 앉으셨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다. 얼마 전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출구로 차를 몰고 들어가 나를 당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 한때 본인이 GPS라며 운전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던 남편인데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바스토우에서 잠깐 쉬었다가 곧장 라스베이거스를 지나, 모스키트라는 곳에 있는 버진 리버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이곳에서 오며 가며 2박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이 호텔에 머물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제 일어난 일도 기억 못 하는데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이곳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넷플릭스에서 본 버진 리버라는 드라마는 미국에 있는 시골 도시 이름이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모아 드라마로 만든 것인데 여 주인공이 간호사였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간호사인 나도 적극적으로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게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배웠다.       저녁은 프라임 비프다. 잘 익은 고기에 옥수수와 감자 구운 것 하나로 통일한다. 13달러짜리 고기치고는 맛이 좋다. 좀처럼 고기를 안 먹는 회원들도 맛있게 먹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다음날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돌아가는데 그 어마어마한 암벽에 새삼 하나님의 작품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라 세상은 파랗다. 바다만 파란 것이 아니라 산, 들도 파랗게 변했다. 암벽은 붉은색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회색이고 까만색도 있다. 바위 사이로 이름 모를 선인장과 잡초가 있다. 이를 본 일행들은 무지개떡이나 시루떡 같다고도 하고, 생강을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모두 시장한지 보는 것마다 음식으로 통한다며 깔깔 웃었다. 신비한 경치는 70이 넘어도 16세 소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게 하나 보다.   협곡에는 곳곳에 등산로가 있었다. 잠자리가 바뀌어 제대로 잠을 못 잤다는 몇몇 회원은 한 곳만 골라 올라가자고 한다. 하얀 바위(White Dome)에서 30분 정도 등산을 했다. 멀리서만 보던 바위를 직접 가 보는 것은 이번 여행만의 특혜였다. 바위 사이사이로 다닐 땐 바람과 그늘이 있어 콧노래를 불렀는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을 걸을 땐 옷을 한 꺼풀씩 벗어야만 했다. 콧노래를 부를 때도, 암초에 걸려 허덕일 때도 있는 우리네 인생길 같다. 인생 곳곳에서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길가에 있는 작은 풀잎 하나에도 꽃을 피우시고 왜 그들이 거기에 있는지 모든 게 당연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생긴 것으로 보이니 내 생애에 생긴 작은 일에도 감사가 절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사막에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조슈아트리가 서 있다. 인간의 성격이 다르듯 나무도 각자 개성이 있나 보다. 산을 반으로 잘라 만든 도로는 오가는 길이 1차선이다. 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말을 타고 다녔을까?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은혜다.   몸은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누군가 선창으로 시작된  4부 합창은  웅장했다. 성가대 생활을 수십 년 한 회원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말 그대로 달리는 합창단이다. 서로 덕담도 주고받고 농담하니 오가는 길이 먼 것같이 느껴지지 않고 너무 웃어서 시간 가는 것도 잊었다. 한때는 24시간이 모자라는 듯 바쁜 생활을 한 청춘이었지만 아이들 다 기르고 부부만 남은 회원들이 감사하는 여행을 해보니 이번 수련회는 하나님을 찾고 자연을 찾아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몇몇 회원이 비용 부담을 자청해 가든그로브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곳엔 담임 목사님이 우리 버스를 보고 반갑게 손짓을 하고 계셨다. 우리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준 사람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기다리는 담임 목사님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달라졌다.     요즘엔 여행을 갔다 텅 빈 집에 오는 게 퍽 외롭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교회에 일이 있다며 먼저 가신 목사님이 우리 밥값을 내셨단다. 예상치 않은 일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로도 해서 밥값만큼 남은 돈은 교회에 헌금으로 대신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고 많이 웃어서 행복했다.  김규련 / 수필가문예 마당 자이언 수필 바위 사이사이로 장거리 여행 남전도회 회원들

2024.06.20. 19:27

[문예 마당] 진짜 나를 찾기

  최근 법정 스님이 창설한 시민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짜 나를 찾아라’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법정 스님의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스님이 생전에 강조한 절제, 친절, 공생 등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자기 존재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법정 스님의 어록에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친절에는 한도가 없다. 무한히 펴서 쓸 수 있는 우물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옛날과 달라서,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온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등 현대인에게 맑고 향기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다.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가 우러나는 말들이다. 이 책을 읽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나의 내면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병적으로 수줍음이 많았다. 체육 시간이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간 ’부루마‘라는 체육복을 입어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체육 시간이 정말 싫었다. 또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남이 원하는 나로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려 애쓰며 거절할 줄을 몰랐다. 친구가 영화 본 이야기를 하면 나도 본 영화임에도 안 본 것처럼 끝까지 들어주고, 학교 준비물을 이미 샀음에도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 그러니 자연히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로 산 셈이다.   서울의 변두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학교는 명문 여학교였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부자와 권력자의 딸들이 많았다. 여러 면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학생들 틈에서 점점 기가 죽었다. 시간표에 따라 가방을 싸야 하는데 매일 같은 책을 넣고 다니다 담임선생에게 들켜 교무실로 불려가 매를 맞기도했다.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꿈 많은 여학교 시절을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우리 시대부터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었다. 미국의 SAT 같은 국가고시를 보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데 시험 보는 날 토사곽란으로 시험을 망쳤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게 됐다. 대학생활에 재미를 못 붙여 학교 배지도 안 달고 다니며 수업엔 빠지기 일쑤였다. 3학년 때였다. 채플 시간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니 김옥길 총장이 설교를 멈추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 줄 모르십니까? 밖에서는 그 자리에 앉고 싶어도 형편이 안 돼서 울고 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라며 언성을 높이셨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식으로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을 낭비했다.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말썽꾸러기들과 지내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다. 하루는 손님이 다녀간 후, 큰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왜 목소리가 두 개야?” 어느 것이 내 진짜 목소리인지 나도 모르겠다.     50세 가까이 돼서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다. 새로운 삶을 자신감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LA에는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예쁘고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 여고 동창에 대학 동기, 같은 과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냈다. 그녀 역시 나의 존재감을 잃게 하였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는데 왜 자존감이 떨어지고 행복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평범한데 내 주위엔 이상하게도 예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나보다 예쁘고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니 스스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소함과 평범함의 가치를 몰랐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은 한 정신과 의사의 특별한 행복론이 담긴 책이다. 환자 중에는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해결책을 찾으러 진료실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난다.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알기 위한 여정이다. 꾸뻬씨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행복의 진리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그의 여행 수첩에 담긴 행복에 대한 첫 번째 처방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꾸뻬씨가 여행 중에 만난 노승은 “첫 번째 실수는 행복을 목적이라고 믿는 데 있다. 종종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목표로 삼지만,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삶을 즐기고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라고 말했다.   어쩌다 60세가 넘어 등단하게 됐다.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내 에세이집 '내 욕심마저 훔쳐간 도둑'이 마침 새로 출간된 김형석 교수의 '100년을 살아보니',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인 '고양이'와 나란히 전시된 걸 보고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삼성동 코엑스몰에 갔다가 우연히 그곳 관광명소인 '별마당 도서관'에 내 책이 진열된 걸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에세이집 출판 후 친구, 지인들의 격려가 나에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각자 타고난 그릇이 있다. 법정 스님의 말씀대로 자기 분수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 말년에 그토록 열등감에 시달리며 다니기 싫어했던 여학교로부터 모교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영매상'을 받았다. 졸업생은 누구나 탐내는 명예스러운 상이다. 내가 누리는 복의 작은 부분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해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나는 모르고 살아왔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 즉 타인이 원하는 것들만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떠오른다. “무엇이 되든지 자기가 되라. 남의 것을 주워 모으는 모자이크 인생을 살지 말라. 너만의 장인이 되라.”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행복 여행 법정 스님 여학교 시절

2024.06.1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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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나의 반려견

  반려견 릴리가 병이 났다.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아 키운 지가 18년이 되었다.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정성 들여 키웠다. 그런데 일 년 전부터 비실비실 활기가 없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병원에 데려갔더니 심장이 조금 부어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고 병세가 조금 호전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기침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다른 병원엘 가 보았다. 친구가 소개해 주었는데 명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곳이었다.     친구가 소개해 준 병원의 수의사는 한인이었다. 그는 애완견의 병세를 매우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선 X-ray를 찍고 CT 스캔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모두 검사를 받았다. 수의사는 컴퓨터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릴리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증세가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선 두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약을 먹였다. 놀랍게도 약의 효능 덕분인지 릴리의 상태는 아주 좋아졌다. 기침 횟수가 줄고 활기를 좀 찾는 것 같다. 그동안 밥도 잘 안 먹었는데 식사도 꽤 잘해 여간 고맙지가 않다. 수의사는 숨이 차도록 운동을 시키지 말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삼가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며칠 전에는 수의사가 전화를 걸어 릴리의 병세를 물어보았다. 증세가 많이 좋아진다고 했더니 수의사는 참 다행이라며 잘 간호하라는 당부를 했다. 미국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수의사가 직접 전화해서 아픈 개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친구의 말처럼 명의 임이 틀림없다. 참 고마운 수의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물을 잘 돌봐 주니 병원은 항상 애완동물로 붐빈다. 진료를 받기 위해 3시간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공원에 데려가며 산책을 했는데 이제는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산책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 호수의 오리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면 릴리가 흥분해 짖어대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자주 못 가게 된 것이다.   뒷마당에는 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드나든다. 가끔 땅다람쥐(gopher)가 뒷마당을 파헤치는 까닭에 고양이가 오는 것을 내 버려두었다. 고양이에게 밥도 주고 물도 주면 뒷마당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뒤지가 얼씬도 못 한다. 고양이가 아주 새까만 색깔이라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가 연상돼 무서울 때도 있지만 땅다람쥐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덩치가 큰 이 고양이가 뒷마당에 서성이면 릴리가 보고 흥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집안에서 난리다. 페티오 문을 열어 주면 쏜살같이 고양이에게로 달려든다. 고양이는 으르렁 거리며 두 앞발을 휘두르며 릴리에게 달려든다.   작은 개 페니도 질세라 고양이에게 달려들지만 번번이 위협당하고 물러나고 만다. 이 고양이도 배포가 보통이 아니다. 애완견 두 마리가 달려드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발톱으로 할퀴려 끈질기게 달려든다. 결국 애완견 두 마리는 뒤로 물러나고 만다.   릴리가 흥분하면 숨을 헐떡이기 때문에 병세가 더 악화할 수 있어서 고양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고충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고양이는 시커먼 몸체를 드러내며 왕자가 군림하듯 나타나곤 한다. 이제는 먹이도 안 주기로 했다. 땅다람쥐가 나오든 말든 릴리를 생각해 먹이를 주지 않는다.   이제 릴리는 심장이 크게 붓고 폐에 물이 차 있어 숨을 쉴 때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고양이가 아무리 뒷마당에 서성이더라도 못 본 척 그냥 있으면 좋으련만 그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무법 침입자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생 결단 짖어대고 달려드는 모습이 가상하고 기특하고 눈물겹다.   나의 반려견 두 마리는 달려들어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발톱으로 할퀴며 끝까지 버티는 고양이 앞에 주저앉아 쳐다만 보고 있다. 죽음을 앞둔 릴리는 끝까지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고양이에게 짖어대다가 죽지 않을까 염려스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주인을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지극정성이다.   나는 주님께 향한 충성심이 지극정성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고마운 나의 반려견, 릴리야! 김수영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수의사가 전화 건강 상태 기침 횟수

2024.06.0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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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기다림

  요즘 들어 몇 가지 꼭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1주일에 서너번씩 공원에 가서 산책하는 일이다.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다. 나무들이 뿜어 내놓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내 몸의 나쁜 것들을 싹 씻어 낸 기분이다.  봄이 되면서 피기 시작한 꽃들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선화가 피고, 동백이 수줍게 피고, 튤립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군자란의 주황색 나팔꽃들은 어느 신부의 부케를 연상케 하고 연분홍 벚꽃은 새색시 얼굴처럼 쏙 내밀어 주위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어릴 때 집앞 강당에서 많이 보았던 박티나무는 밥풀 모양의 몽우리를 내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어느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이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병석에 누워있는 사촌 오빠다.       지난 늦가을에 한국에 여행 갔을 때 일이다. 가족 모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촌 오빠가 없었다. 몸이 안 좋아 연락만 했다는 것이다. 말이 사촌이지 어릴 때는 거의 같이 살았다. 방학이면 오빠는 도서관에 오듯이 책을 들고 우리 집에 와 공부를 했다. 그런 오빠를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오빠는 아침을 먹고 우리 집에 왔다. 사랑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점심때가 되면 조그마한 산 등을 내려가 자기 집(큰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온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 특히 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가곡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가고파’를 목청껏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고 난 후의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번 여행에서 우리 오빠와 사촌 오빠를  만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쓰고 싶어졌다.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일 가운데 하도 기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지나온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가난한 처지에서도 꿈을 이루신 분이셨다. 우리 자매들보다도 두 오빠는 더 열심히 들었고, 사촌 오빠는 종손답게 질문도 곧잘 해서 아버지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아버지는 두 오빠의 직업까지 정해놓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 주셨다. 다행히 두 오빠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정해 온 길을 착실히 걸어 꿈을 이뤄 가문을 빛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사촌 오빠 집에 병문안을 갔다.  듣기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빠는 운동도 좋아해서 젊었을 때 주말이면 테니스도 하고 나이 들어서는 골프도 쳤다.  원래 키가 훤칠한 호남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의 청백함은 그를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꼈다. 어떤 불의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던 오빠도 병마엔 어쩌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식사를 같이 못 해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그의 따뜻함에 사양 한번 못하고 말았다.     봄이 되면서 공원에 있는 모든 들풀까지도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못 보던 풀꽃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읊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풀꽃을 보니 조바심이 더 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에 오빠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빠는 그 옛날 우리 집 앞 강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빨강 동백을 기억할까? 꿈을 이루려 공부만 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숲 사이로 군데군데 놓여있는 벤치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곳에 앉아 그 옛날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일본 순사를 보기 좋게 혼내 주고 피신 다녔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다. 그 뒤로 오빠는 다행히 병의 원인을 찾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 기다려진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사촌 오빠 우리 오빠 고등학교 음악책

2024.05.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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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가끔 쉬어 가라고

  아침에 일어나 침상을 정리하다 허리를 끔뻑했다. 일 년이면 한 두어 번 이런 일을 겪어 고생을 톡톡히 하는데 오늘 또 기어이 일을 당하고 말았다. 허리를 다치면 그만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없어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앞으로 얼마 동안 꼬박 불편하게 지내게 될 것이다. 허리가 부자연스러우니 자연 행동도 굼떠 앉은 자리에서 한 번 일어서려면 보통 때보다 서너 배 시간이 소요된다. 일어섰다고 해도 또 걷기가 쉽지 않아 모든 움직임이 슬로비디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행동이 느리니 마음도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어차피 빨리빨리 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마음이 재빠르게 적응을 한 것인지 마음이 느긋해지니 시간 또한 느리게 가고, 생각이라는 것도 해본다.   흔히 몸에 이상이 생기는 이유는 힘이 드니 쉬어 가겠다고 하는 신호다. 이 정직한 고백에 우리는 쉽게 귀 기울이지 않아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곤란함으로 내몰리게 된다.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라는 말이 있듯 미리 단속하면 쉽게 해결이 날 일도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내 허리의 증세도 얼마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일어서거나 앉을 때 그 동작의 시작에서 척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춤했다 다시 곧추세워 일어나곤 했는데. 그런 미세한 증상을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이유는 ‘조금 참으면 낫겠지’하는 안이 함이었다. 편안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함정이었던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이런 안이함이 곳곳에 포박하고 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인간관계에도 신호가 있다. 조금만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만 더 따뜻하다면 더 나은 관계로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질 일이다.   좀처럼 화를 잘 내지 않는 남편은 유독 배고픈 것을 못 참는 사람이다. 하여 배가 고프면 화를 내는데, 예를 들어 “아직 식사 준비 멀었나?”하고 물으면 조금 참을 만한 것이고 “아직 식사 준비 멀었어요?”하고 물으면 이때는 진짜 배가 많이 고픈 것이라 화내기 일보 직전이다. 남편이 화가 났을 때 붙이는 “~요?” 자는 자신의 화를 누구려 보려고 짐짓 느리게 붙여보는 말인데, 이미 나는 그의 신호를 알아챈다. 가끔 내가 먼저 선수를 칠 때도 있다. 그의 표정을 읽고, 아직 식사 준비가 멀었으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하면 남편도 어느 정도 내 신호에 호응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신호가 말이나 표정, 몸짓으로 표현되어 전달되면 얼마나 좋으랴. 정작 우리가 제때 알아채고 제때 반응해야 하는 신호는 복잡하고 미묘하여 늘 미로 속에서 헤맨다.   예전, 나는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신호에 소홀하여 사람을 잃을 뻔한 경험이 있다. 신호를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도 적당한 대응을 못 했었다. 이때도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리겠지’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기다리다 일이 커졌다. 그 후 내가 얻은 교훈은 아무리 친한 관계라 해도 즉시, 또는 같은 방법으로 신호를 보냈어야 했다는 것이다. 관계의 오류는 지극히 상대적이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소통으로 관계 유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는 이웃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가장 가깝다고 하는 친인척에게도 소용되는 말이 될 것이다. 혼자서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일이겠는가! 아무리 바빠도 신호등을 보고 규율을 지켜야 안전하듯이, 다급하다고 신호를 무시하면 거기에 대응하는 대가가 피눈물 나게 아프다.     이제 또 한 해를 마무리할 때다. 한 해 동안 내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들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또한, 한 해 동안 나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은 없었는지 주변을 꼼꼼하게 돌아본다. 이 모든 생각이 움직일 수 없어 가만히 누워서 해보는 생각이다. 얼마나 기막힌 타이밍인가? 만약 허리 통증 없이 그저 온전하게 보내게 되었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이 모든 일을 떠올려 보지도 못한 채 그냥 한 해를 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몸이 아플 때는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휴식의 시간이다. 편안해서 함부로 대했던 사람은 없었나? 뒤돌아본다. 분명한 신호를 듣고도 소홀히 대했던 적은 없었나 뒤돌아본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곤란함으로 내몰리기 전, 아주 작은 신호에도 즉각 반응하여 “미안합니다” 하며 손 내밀어 보기로 한다.   가끔 쉬어 가라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익어 간다. 고옥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허리 통증 관계 유지 표정 몸짓

2024.05.2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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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99% 폐암입니다”

  내가 60대 중반이었던 2018년 8월 중순의 일이다. 그때 가슴이 답답하고 제대로 소화도 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 주치의를 찾아가 증세를 설명하고 CT 촬영을 할 수 있게 리퍼(refer)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어디 봅시다” 하며 청진기를 여기저기 대 보고는 “에잇! 암이 아닙니다” 라며 리퍼를 해주지 않았다.   며칠 후, 주치의를 다시 찾아가 간절히 사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며칠 고민한 끝에 위장내과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예전과는 달리 의사의 허락이 있어야 CT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의사에게 위내시경을 두 번 받은 적이 있었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흔쾌히 의뢰서를 발급해 주어 CT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촬영 후 2일이 지났을 때 주치의 사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치의 선생님이 만나자고 하니 빨리 오시라”는 연락을 받고 불안한 마음으로 클리닉에 갔다. 주치의는 거두절미하고 “CT 촬영 결과 99%, 폐암입니다”라고 말하며 “왼쪽 폐에 손바닥만 한 종양이 있다”는 것이었다. CT 담당자가 주치의에게 결과를 통보해 준 것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멱살잡이라도 하며 “그런데 왜 CT 촬영을 허락해 주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는 “보험은 있느냐?” 고 묻더니 보험이 없다는 대답에 “어허! 큰일 났구먼, 집 팔아먹겠네”하는 것이었다. 걱정해 주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의사라면 환자에게 이런 투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다면 폐암 몇기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정확한 것은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다” 는 것이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99% 폐암’이라는 진단은 ‘폐암이 아닐 가능성이 1%’라는 의미도 된다. 나는 그 1%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옛말에 병은 널리 알리라고 해지 않았는가?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병세를 알렸다. 그중 한 명이 모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자기도 그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는데 성공적이었고 수술비도 조금밖에 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병원의 응급실을 거쳐 정밀검사를 했다. 그리고 수술 절차가 진행됐다. 조직검사 결과 다행히 폐암은 아니지만 양성 종양이 너무 빨리 자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CT 사진을 찍은지 두 달 만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집도의는 일본계 여의사였다. 오전 8시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 후 안 사실이지만 종양이 너무 커서 6번 갈비뼈 일부를 절단하고 제거할 수 있었단다. 중환자실에서 5일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치료비는 10회 정도의 통원 치료를 포함하여 25만 달러가 넘게 청구되었지만 병원 자체 내 저소득층 도움센터를 활용해 내 월수입에 맞는 보험료를 부담하는 보험에 가입한 결과 의료비는 2000달러 정도만 지불했다.     회복 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위장내과 의사였다. 그에게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고마워했더니 “의사로서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수술 후 1년에 한 번씩 하는 CT 검사를 올해 여섯 번째로 받았다. 모든 게 정상이고 수술 부위도 잘 아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주치의가 왜 의뢰서 발급을 거절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면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임무에 소홀했던 것이다. 주치의 암이 아니라는 오진을 믿고 있다가 막상 암으로 발전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주치의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진찰, 검사, 진단 등 일련의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해 환자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치료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99%, 폐암’ 이라고 오진 한 그 의사를 더는 신뢰할 수 없어 나는 그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 마당 폐암 수필 폐암 진단 수술 부위도 수술 절차

2024.05.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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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1.5도 마지노선

  매주 토요일 새벽이면 바다에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물 한잔을 마시고 사과와 바나나를 챙긴다. 두어 시간 모래 위를 걸어 다니려면 땅에서 걷는 것 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하다. 한 주가 다르게 배구공이 파도에 휩쓸려 나갈 우려가 들 만큼, 모래사장의 폭이 아주 좁아지고 있다.   그래선가? 공놀이하는 그룹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도 해수면 높낮이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바닷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가 하면 운동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걷고 뛰면서 젊음의 기량을 뽐내는 것은 원초적인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특권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청지기의 특권을 남용했고 돌보는 마음을 잃어버린 탓이 아닌가 한다.   해수면 상승이 빈말이 아니다. 모래사장 가운데에 놓여있던 쓰레기통들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일들이 빈번해져 아예 걷어가 버렸다. 배구장 네트에 가까이 넘어들어온 바닷물이 저러다가 때가 되면 빠져나가겠지 하는 느긋함 또한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런데 빠져나갈 기미가 없이 점점 쓰레기통이 줄어들며 나머지는 해변 내려오는 입구 쪽으로 옮겨놔 버렸다. 주워 모은 쓰레기가 무거워지면 한 블록 이상을 걸어가서 버려야 한다. 크고 튼튼한 바스켓을 사용하는 것도 봉지보다는 무겁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편리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느 누가 귀찮은 짓을 자청하겠는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쓰레기를 줍기 위해 일주에 한 날은 새벽잠을 설치며 청소부 여자를 따라 운전을 해주는 한 남자는 해수면 범람으로 모래사장 폭이 좁아져 가는 현실을, 그윽한 눈빛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바로 저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거든. 바다야~ 바다야~ 빨리빨리 덮어라~.” 헥, 무슨 심보람 “운동하고 산책하는 저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어떡하긴 인간들이 바다에 가까이 해봐야 쓰레기밖에 더 버려?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게 바다를 위해서 더 좋은 거야.” “내 할 일이 없어지는 데 좋긴 뭐가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이렇게 따라다니는 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남의 쓰레기 치우고 다니느라 강산이 두 번 변했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계산 좀 하고나 살지.”   해수면 상승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그 회심의 미소에는 이유가 있다. 바닷물이 모래밭을 덮으면 여자는 청소부 노릇을 그만둘 것이고 남자는 제대로 새벽잠을 자게 된다. 남자의 각본이 임박해진 현실을 예고하듯 기후 학자들도 2050년쯤이면 캘리포니아 반경 1200마일이 바닷물에 잠길 거라는 예상과 사막화를 경고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기후난민 대이동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상이 그냥 기우로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일밖에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작은 일들뿐이다. 그야말로 쓰레기를 주우며 작은 일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어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만족과 행복감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   때로는 만족스럽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가 있다. 조건이 붙는 행복은 자기만족을 위해 원하는 것을 구하고 채우는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될 때가 있는데 기후를 상승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온실효과를 가중해 지구 공동체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기만족을 꾀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누구나가 이것을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좋은 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소망이다.   나는 나에게 주워진 특권을 많이 포기했다. 아니, 지구와 자연에 반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지구와 자연이 치유될 때 우리의 후손들 또한 고통을 겪지 않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삶을 지속시키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조건이 붙을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자기만족에 갇혀있게 되면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이기심의 고질병을 앓게 된다. 지구 공동체가 피폐해지지 않도록 삶의 도덕적인 측면을 고려할 수 있는 자비심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마음을 지켜내지 못하면 우리의 삶과 지구는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남태평양의 가난한 섬나라들은 해수면 상승 때문에 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주어진 특권을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쓰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시대의 요청에 귀 막고 살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 5도의 마지노선을 꼭 붙잡아 두려면 자기만족을 반납하는 용기와 측은지심이 최선일 것이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마지노선 수필 지구 공동체 특권 의식 기후난민 대이동

2024.05.02.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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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길을 잃은 사람들

  며칠 전 나는 연로하고 노쇠한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는 피 끓는 청춘의 강을 건너느라 힘들고 아팠던 사연들을 저마다의 가슴에 훈장으로 새긴 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어쩌면 저들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나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예감에 사로잡혀 입술을 뚫고 나오는 노래는 자꾸만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스물을 꿈꾸었다. 스물이 되었을 때는 삼십을 꿈꾸었고, 삼십일 때는 사십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십일 때는 육십을 생각하지 않았고, 육십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구인들 나이 들어감을 꿈으로 생각하겠는가.   두 번째 노래가 끝나도록 그림 같이 앉아만 있던 어른들은 손뼉을 유도하는 몸짓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늙음과 질병이 그들의 즐거움을 느끼는 기관까지 잠식했는지 얼굴까지 무표정이다. 아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몸이 고단하고 힘이 들 때는 그 힘들고 아픈 것에 에너지가 다하여 다른 것에는 미처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만사가 귀찮다는 것을.   4곡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다시 4곡의 노래를 부를 때는 분위기가 훨씬 나아져 몇몇 어른들은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춰 주셔서 오히려 우리가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가 망고나무에는 망고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아보카도도 이쁘고, 반질반질하게 열려 있었다. 처음치고는 별 무리 없이 공연을 마친 우리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나오는데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놓고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넷째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즈음 나는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무척 예민해져 있었는데 이유는 언니 오빠가 다 칠팔십대 고령이라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될까 봐 지레 불안한 탓이다. 전화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 형제의 웃 세대로는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친척분을 어제 모 요양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구십을 넘기신 분은 안 가겠다고 떼를 쓰셨다는데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주일 정도는 전화와 방문을 자제해야지만 요양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것이니, 그 일주일 동안은 전화도 방문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양로원을 떠나면서 무언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나는 평생 그 어른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밖에는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단절의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고 계실 그분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에 무거운 쇳덩이를 얹어 놓은 듯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4살 때 제 삼촌을 따라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캠핑하러 간 적이 있다. 엄마와 떨어져 처음으로 밤을 보내게 되는 일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당시 시동생이 그 교회 전도사였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보냈다. 그러나 밤 열두 시가 넘어 아이는 반실신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많이 보채고 힘들게 했느냐고 묻는 나에게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보채지도 않고 힘들게도 안 했어요. 밤에 잘 자나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아이가 얼마나 소리도 없이 많이 울었는지 베개가 다 흥건히 젖어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맞이했던 그 밤의 익숙하지 않은 방과, 침대와 엄마 없음은,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과 설움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그 어른 심정 또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양로원이나 요양 병원은 매일 의사나 간호사들이 상주해 있고 간호조무사들이 정성스럽게 환자들의 일 거수 일투족을 거들어 주니 연세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어른들께는 더없이 안락한 곳일 수 있다. 오늘 내가 다녀온 곳만 하더라도 태평양을 배경으로 세워진 최상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에 즐거운 곳이어도 연습 없이는 낯선 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수십 년 동안 친숙했던 것들과의 갑작스러운 생이별은 심신이 허약한 노인들께 치명적인 아픔과 슬픔이 될 것이다.   자식이 태어나 서너 살이 되면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보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며 공동생활에 적응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처럼 노인들에게도 시설로 들어가기 전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서 나 또한 앞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만, 바라건대, 나부터라도 늙고 병들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온 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곳이라는 사고를 마음에 새겨 좀 더 단단한 노년을 준비해 보리라 다짐을 한다.   매달 한 번의 양로원 방문은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앞서는 일이지만 슬픔의 돌이 슬픔에 부대껴 저 스스로 둥그러질 때, 나 또한 그 무게에서 조금씩 놓여나 조만간 이곳으로 올 때 연습이 되어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다음 달에 부를 노래의 악보를 손에 들고 잘 굴러지지 않는 혀로 팝송을 부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뼉을 친다,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래, 지금 저 어르신들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길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이리라. 고 옥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양로원 방문 어른 심정 전화 내용

2024.04.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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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속삭임의 삶

  ‘거룩한 천사의 음성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이/어두운 밤  지나고 폭풍우 개이면 동녘엔 광명의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 앞에 어린다.’   멀고 먼 추억 속 무대에서 짐 리브스의  ‘희망의 속삭임’이 맑고 구수한 음성으로 들려 온다.  이 노래는 원래 셉티머스 위너가 1868년 에 발표한 곡이라고 한다.   늘 가족들에게 미소와 사랑을 나누어 주신 처형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은 처형의 90세 생일 축하 특별 이벤트로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합창하기로 했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배우려 유튜브의 노래 교실을 통해 수십번 따라  불렀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음을 잡을 수가 있게 됐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흥얼거리며 잠을 청하고 가사를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또 얼마나 필요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믿고 따라준 사람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만 인생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늘 위기의 연속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리 밑은 강물이요, 뒤로는 갈 수가 없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넘어야 하는 항상 아슬아슬한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노년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이 가장 문제다. 나는 아내의 깊은 숨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몇 년간 계속한 투석이 너무 힘에 겨워 중지하고 한동안 주사와 약으로, 그리고 또 다른 치료법으로 몇 년을 견디어 왔다. 팔순이 넘어 병들고 부자연스러운 몸이 되다 보니 과거의 강인한 개척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누군가 도움을 받을만한 인연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리 왕년에 잘 나갔다 하여 큰소리를 쳐봐도 세상엔 독불장군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나야  행복하고 주변을 살피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우리 부부도 예외 없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 기고만장하던 패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딸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엄마, 아빠 함께 살자”고 권유했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딸의 권유가 고맙기만 할 뿐이다.   팔순이 넘다보니  왜 이리  신체의 고장이 많은지. 청력이 약해지다 보니 아내와  주고받는 대화도 늘 반문이 따르게 되고 아내는 그것이 불만이다. 아내도 몸이 쇠약하다 보니 자연히 목소리가 잦아져 좋게 말해서 우리 부부는 속삭임의 대화가 계속된다.     최근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비대면 접촉이 권유되면서 기업들의 재택근무 도입이 늘었다. 이렇게 도입된 재택근무는 팬데믹이 끝난 요즘도 더욱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도 한 사람은 아래층에서, 또 한 사람은 이층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어 우리 부부는 업무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한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작아진 이유도 있지만  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습관이 생겼다. 늘 조용조용 사랑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한다. 속삭임의 삶을 사는 셈이다.     귀가 밝은 딸은 우리 부부의 대화 내용을 다 알아듣고도  모른척 빙그레  웃곤 한다. 가끔 “네 흉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딸에게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귀가  밝은데 우리  시니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나의  속삭임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반드시 우리에게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 내 귀를 두드려,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의 햇빛이 눈 부시게 비칠 때, 아슬아슬한 인생의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오늘 밤도 콧노래를 부르며 잠을 청해 본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재택근무 도입 노래 교실 건강 문제

2024.04.1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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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함께 나누는 대화

며칠 전 커피숍에서 무엇인가 아쉬운 마음으로 나오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친우들과의 대화 내용은 몸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 자식 이야기, 손자 이야기 그리고 남 이야기가 주였다. 은퇴 후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친구들, 또는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조심해야 할 소재들이 있음을 느낀다.   주위에 나이 든 사람이 많다 보니 몸 곳곳에 아픈 십자가들을 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문제는 본인의 아픈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이런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대화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본인의 과거 이야기, 자식 또는 손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나온다. 대부분이 자랑거리다. 하지만 아무리 자랑스럽고 좋은 이야기라도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듣는 사람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 사생활 (privacy)을 중시하는 미국 사람들은  본인의 이야기, 혹은 자식이나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잘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 소재다. 한국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한국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자기주장이 강한 논쟁보다는 차라리 토론 형태로 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논쟁은 누가 옳은지 흑백을 가리자는 대화이기에 서로 열을 받게 되지만, 토론은 무엇이 옳은지를 찾는 것이기에 언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작다.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직접 할 수일은 별로 없지 않은가. 더구나 본인이 미국 시민권자라면.     우리는 본인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 대부분이 좋지 않은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가 주고받았다는 이야기 내용이 흥미롭다. 소크라테스는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플라톤 이, 특히 크세노폰 등이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우가 “네 친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라고 말하자,  소크라테스가 먼저 세 가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친우: “네 친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소크라테스: “나에게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네가 직접 들은 이야기인지 혹은 다른 사람한테 들을 이야기인가?”   친우: “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소크라테스: “그러면 너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모르는구나. 그런데 그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인가, 아니면 안 좋은 이야기인가?”     그리고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다.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가? 만일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질문에는 “사실이 아닌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전하지 말라”는 내용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좋지 않은 내용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그리고 “만일 그 내용이 좋지 않더라도 내 생활에 경각심을 울리는 이야기”라면 듣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좋은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하고 참석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상대방의 대화를 중간에 끊지 말고, 존중하는 자세로 경청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고려와 예의를 차리는 것이 건강한 대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와 더불어 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지난 일보다는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책을 읽고 나 자신이 말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명렬 / 작가문예 마당 대화 수필 이야기 자식 손자 이야기 이야기 내용

2024.03.21. 19:21

[문예 마당] 마음은 언제나 30대

“우리 새 가게 이름을 ‘Forever 31’으로 지으면 어떨까?”   나보다 딱 10살이 많았던 사장님의 부인과 직원들이 오손도손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사장님의 부인은 항상 거침없이 대화의 주도권을 이어나가는 분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그녀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30분의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 오픈하는 의류 지점의 상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화제였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그 당시 31살로 막내였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굳이 서른 한살이 영원하다면 무엇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나 혼자만 공감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모두 40대 였던 동료 언니들은 미시족 고객이 대상인 만큼 그 이름이 좋다고 모두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장님의 마지막 결정 과정에서 미끄러졌는지 새로운 가게 상호는 ‘포에버 31’이 아닌 다른 것으로 결정됐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내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을 때 문득 동료 언니들의 격한 호응이 떠오르면서 과거 나의 서른한 살 때가 많이 그리워졌다. 사실 당시에는 올망졸망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느라 내 30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나는 주위 친구 가운데 가장 먼저 아이를 낳고 키웠다. 당시 독신주의를 외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의미 없이 10년의 세월이 지나간 줄만 알았다.   아이들에게 ‘어서 자라라’ 하며 시간이 달려가기만을 소망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세월은 비호처럼 날아가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어 돌아보니 내게는 30대 시절이 인생의 전환점이 아니었나 싶었다. 젊고, 순수했지만 웬만한 사랑 타령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시절이었다. 물론 신혼 초라 가끔 사랑싸움 때문에 며칠씩 다툴 때도 있겠지만 그 당시 남편은 금세 미안하다며 사과도 잘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사랑싸움도, 미안함도 필요 없는 척하면 다 아는 사이로 변했지만…. 지금은 결혼 초 투덜투덜 사랑싸움이 왠지 그립기도 하다.   나의 30대 시절, 아이들은 세상에서 엄마가 전부인 것처럼 나에게 의지했다. 13살 이후 사춘기가 와서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진 딸을 보며 낯설어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 30대는 끝이 났던 것 같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말끝에 “그때 해맑았던 너의 모습이 그립다”고 했더니 눈치가 빠른 딸이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영원한 36살이야”라고 한다. 딸은 엄마가 좋아하는 말인 걸 알기에 “항상 엄마는 늙지 않는 것 같다”며 립서비스를 해주곤 한다. 미용실에라도 다녀오면 무뚝뚝한 아들도 “오늘은 엄마가 좀 젊어 보이네”라고 한마디 툭 던진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잠깐 한 적이 있다. 돌잡이 미만 아이들부터 5살 정도까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이 30대였다. 그들을 대하면 마냥 밝고 이쁘게 보여 젊음이 참 부럽기까지 하다.   과거 20대 시절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옆에 있던 지금의 내 나이쯤 된 분이 수줍어하는 나에게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시더니 “젊어서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마 지금 똑같은 상황이 되면 나도 그분처럼 수줍어하는 아가씨 등을 밀어주며 똑같은 말을 할 것 같다.     가끔 30대의 엄마들이 어린 자녀와 함께 가는 뒷모습을 보면 예전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순수했던  예전 모습을 찾고 싶어서.     왜 나는 30대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까? 그때는 폴더용 휴대폰이라 사진도 많이 못 찍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나는 매일 애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던 거 같다. 이제 아득한 아기 엄마 때의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영원한 31세로 살아야겠다.   문득 거울에 보이는 새치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팔자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휴대폰 글자 크기를 키운다고 기죽지도 말아야겠다.   앞으로도 ‘포에버 40년, 50년’, 마음 먹은 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오늘 하루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며 즐겁게 보내야겠다. 이선경 / 독자문예 마당 마음 수필 아기 엄마 사랑싸움 때문 30대의 엄마들

2024.03.14. 19:52

[수필] 렌터카

지난가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  둘째 딸 부부가 한 학기 안식년으로 한국을 간다기에 우리 부부도 동행했다. 코로나 탓에 6년 만에 형제자매 친지들을 만났다. 조금씩은 변했지만 건강하게 사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반가웠다. 여행 기간을 2주로 잡았기에 계획대로 바삐 움직였다. 노래 가사처럼 서울, 대전, 광주, 임실, 보성 등을 점만 찍고 다녀야 했다.     이번 여행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떠날 때 자식들과 굳게 약속했다. 나이도 있고 오랜만에 가니 길도 많이 변해 운전이 위험해서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짐을 간단히 하려고 신경을 썼지만 반갑다고 주고받는 선물은 여행 동안 큰 짐이 됐다.     사위가 미국인이라 대전에 갈 때는 KTX를 이용했다. 발전된 한국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서울역 광장 계단을 올라야 했고 기차 플랫폼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가방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렌터카 생각이 간절했다. 애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대전을 떠나 호남 지방을 갈 때는 차를 빌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딸 부부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틀 후 딸은 우리를 전송하러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고속버스와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일렀다. 그런다고 했지만 남편과 나는 이미  렌터카를 예약했기에 미리 부른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이 렌터카 회사로 향했다. 딸과 사위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았다. 우리 사정을 말로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고 걱정만 더 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서 여직원 두 사람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반기며 설명을 잘 해주었다. 특히 내비게이션 사용법은 몇 번이나 반복해 일러주었다. 남편의 반복되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너무 정확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놀랄 정도였다.       차 트렁크에 가방 두 개를 넣고 자잘한 짐들을 뒷 의자에 놓고 우리 부부는 먼저 기도를 드렸다.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즐거웠다. 휴게소마다 들러 국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오후 1시쯤 사촌 시숙께서 정성껏  관리하신 임실 시댁 선산에 도착했다. 술잔을 올리며 그분들의 삶을 기렸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만 찍고 다음 장소로 또 이동해야 했다. 시어머님과 큰형님, 사촌 형님께서 왜 그렇게 총총 가느냐고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속으로 “해 있을 때 가려고요”라고 답하며 광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친절하고 낭낭한 목소리는 여행길을 즐겁게 해주었다.     순창, 담양 등의 이정표가 보였다. 그리운 조국의 시골 마을이다. 고추장, 떡갈비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광주에서 5시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부지런히 달려 4시 반쯤 도착했다. 서울에서 온 두 동생과 함께 약속된 음식점에서 여고 동창들을 만났다.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마치 매일 만난 친구처럼 격이 없었다.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모두가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고향인 보성 득량으로 향했다. 두 동생을 차에 태우고 고향산천을 달리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내비게이션 아가씨는 낭낭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다.     산소에 가기 전에 고향에 오면 항상 들리는 꼬막 정식을 먹으려 벌교를 찾았다. 대충 지리를 아는 터라 들판만 건너면 되리라고 아무 의심도 없이 내비게이션 아가씨 말대로 들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길이 없어졌다. 큰 도로에서 200미터는 족히 들어온 후였다.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는 수로가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후진해야 했다. 남편은 창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뒤를 보며 후진을 했다. 차바퀴가 자꾸 난간으로 갔다. 두 동생과 나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 뒤에 서서 “핸들 돌리지 말고 고개 내밀지 말고 백미러만 보고 내가 손짓하는 대로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서 와라”고 했다. 남편은 고집이 있는 터라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 양쪽 수로에 바퀴가 빠지면 일이 복잡해지니 내 손짓만 믿으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서로 소리를 지르니 막내는 놀라 아무 말 못 하고 난감해하는데 다른 동생은 멀리 앉아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결국 남편은 내 손짓과 말을 들으며 무사히 후진에 성공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웃던 동생이 “언니, 요즘 내가 웃음을 잃었다고 의사도 친구들도 걱정했는데 드디어 오늘 웃음을 찾았네”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런 치유를 주시려고 그런 고통을? 동생이 다시 웃게 됐다니 무얼 더 바라리.      2박 3일의 성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차를 반납했다. 미국에 있던 큰딸이 전화로 칭찬했다. 대중교통 잘 이용한다고. 나는 더듬거리다가 고백했다. 차를 빌렸다고. 그리고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짐 없는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렌터카 렌터카 회사 렌터카 생각 내비게이션 아가씨

2024.03.0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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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들어도 꽃은 꽃이다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 눈사람.’                     겨울이 되니 나도 모르게 이런 옛날 동요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은 아직 동심의 세계를 헤매고 있나 보다. 가끔 나는 내 나이를 잊어버리고 화장대에 앉아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낯설어지기도 한다.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왼뺨에 희미한 반점이 여러 곳 보인다. 입술 언저리에는 아무리 화장품을 발라도 자글거리는 주름살들이 결단코 자리를 비켜 주지 않고 좌정하고 있다. 마음은 차마 청춘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렇게까지 늙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내 모습에 절망한다. 아! 이젠 아주머니가 아니고 할머니구나.  손자가 여러 명 있으니 진짜 할머니인 것은 틀림없지만, 누군가 할머니하고 부를 때면 나는 못 들은 척 한다. 나를 부르는 소리인데도….   사실 말이지 식당에 갔을 때, 웨이트리스가 “어서 오세요, 할머니” 보다 “아주머니”라고 할 때 좀 듣기가 괜찮다. 괜한 주착인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탱탱하던 볼이 호물호물해지며 때깔 곱던 손등에 굵은 심줄이 돋아 값비싼 반지를 끼워도 어색하기만 하여 보기 민망하다. 마음은 갓 잡아 온 물고기처럼 팔팔한데 마음과 몸이 함께 가지 않고, 마음 따로 몸 따로 놀면서 굵은 나태가 느직느직 거리는 몸이 한심스럽다.   젊은 날, 나이 많은 어른을 뵈면 저분들은 겉모습처럼 마음도 늙었겠구나 하고, 나는 절대로 저렇게 꼬부랑 할멈은 안 될 거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누구를 차별하고 특혜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나라고 팽팽한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말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권위의식 같은 것 부리지 않고 알량한 설교 따위로 젊은이들의 눈총 맞으며 꼰대 소리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그러면서도 쉽게 노여워하고 걸핏하면 삐지기를 잘하는 감정은  늙은이의 안쓰럽기까지 한 철딱서니 없는 옹졸한 감정인가 한다. 겉으로는 의젓하고,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노인네로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속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열등감 같은 게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자고 마음은 늙지 않고 육체만 늙느냐 말이다. 안팎이 달라서 뒤집어 입을 수도 없는 옷처럼 때론 자신도 난감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아들하고 백화점에 갈 기회가 있었다. 잡동사니들을 사고 난 후, 한 편에 한국산 옷들이 걸려 있기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가 브래지어를 한 개 샀다. 계산대를 지나 걸어 나오던 아들이 “엄마도 그게 필요해요”라고 했다. 늙은 엄마는 이젠 여자도 아닌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엄마, 허리까지 약간 휘어진 늙은 여인, 아들 눈에는 엄마가 중성으로 보이겠지 하면서도 섭섭했다. 마음만 이팔청춘이면 뭘 해, 비싸고 예쁜 옷으로 휘감고 덕지덕지 화장품 떡칠을 해도 자글거리는 터키 목주름은 ‘늙었다고’ 나팔 불고 있잖은가.     지금은 성형외과에 가서 재건축하여 몇십 년 젊은 사람으로 둔갑도 한다지만, 고린 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여염집 여인이 살, 기름 빠져 주굴 거리는 얼굴에 많은 돈 들여 재포장하는 일이 그리 쉬운가.         하나님이 인생을 그만큼만 살고 오라고 정하신 기한이 있을 거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육신이 힘을 잃고 살가죽은 찌그러지고 힘도 빠진다.     뉴질랜드 산 사슴뿔로 만든 명약을 먹어도 나이는 숨길 수 없다. 새해 인사가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다. 그 소리가 전에는 고맙고 듣기 좋았는데 나는 그런 소리가 별로다. 오래 건강하면 다행이지만, 낡은 뼈는 삐끗거리며 피둥거리던 살갗은 부대조각처럼 퍼석거린다. 거기다가 더 늙어 대소변을 못 가려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너무 오래 살면 우선 자식들에게 부담을 준다. 아니면 양로원에 가서 하늘만 쳐다보고 누웠다, 앉았다 할 꼴을 상상하면 치가 떨린다.   옛날엔 육칠십만 살아도 환갑,진갑 다 지나 장수했다고 하고 적당한 때에 죽었으니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모두 섭섭하고 슬픈 아름다운 이별을 했었다. 그러나 늙은이가 백 살을 살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장수라는 것은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아닌 것 같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하는 덕담이 듣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아는 분이 어떤 이해득실에 걸린 재판에서 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했다고 한다. ‘백삼십 살까지 살면서 잘해 보라고’     그 말은 저주였다. 쭈그러들고 청포묵처럼 흐물흐물해진 넓적다리가 지탱해주고 있는 몸, 힘은 빠졌어도 마음은 따라서 늙지 않고 남은 생을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살아가는 늙은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들은 엄마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그냥 엄마일 뿐이다.  김명선 / 소설가수필 엄마 허리 꼬마 눈사람 터키 목주름

2024.02.29. 19:30

[문예마당] 내 고향은 어디인가

한국 체류 중이던 지난해 10월 미국에 사는 5명의 친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중 3명은 여행사 단체여행 상품으로 왔다가 개인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모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인데 하필 그때 발가락을 다쳐 뉴욕에서 온 친구 한 명만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미국서 함께 살다 한국에서 만나면 더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었을 텐데 전화 통화만 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기도 했다.         LA로 돌아온 후 그중 한 명을 만났더니 “한국은 타향이니 이제 고향인 LA에서 만나야죠”라고 말한다. 그 말에서 ‘옛 친지가 그리워 한국을 찾았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고 낯선 도시만 헤매다 왔다’는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 졸업 직후 유학을 왔거나 유학생 배우자를 따라왔으니 반세기 훌쩍 넘게 고국을 떠나 살았다. 한국에서 산 날보다 미국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이젠 미국이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아련한 향수에 잊지 않고 고국을 찾는 분들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자주 한국을 찾는다. 그런데도 친지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만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불쑥 나타나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것은 무리다. 앞으로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지에게만 귀국 소식을 알려야겠다.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이주를 고려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민 와 고생하다가 애들도 다 커서 독립했고, 형제자매가 있는 한국서 살고 싶다”, “늘 마음속으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한국적인 문화가 더 친숙한 것 같아요” 등 이유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고향이 그립기 때문일 게다.  대체 고향이 뭐길래!   오랜 세월 미국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소위 ‘미국물’이 든다. 오랜만에 돌아가면 한국은 말이 잘 통하는 또 다른 외국일 수 있다. 달라진 한국 문화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또 미국생활을 청산해서 한국에 들어와 살기 힘들 정도로 한국의 주택가격과 물가가 올랐다. 어쨌든 목표가 뚜렷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 중에는 “미국과 한국,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이 물음에 나는 “한국에 가면 한국이 좋고, 미국에 오면 미국이 좋다”고 답한다. 공연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남편은 한국에 살고, 애들은 미국에 살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미국과 한국이 늘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그러면 내 고향은 어디인가?       타국 땅에 수십 년을 살아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내 나라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 한국에 가도 모두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기억 속의 옛 모습은 다 사라졌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나라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내 몸이 머무는 땅이 우리나라가 된다.       한국은 ‘우리나라’라는 의미보다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갈 땅이 미국이라면, 한국은 나의 고향이다. 고향인 한국이 잘되고, 살고 있는 나라도 잘되는 것, 그것이 이민자가 품고 있는 이중적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LA에 ‘hi-5’ 라는 5명의 친구 모임이 있다.  전부터 인연이 있거나 새로 알게 된 친구들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직도 LA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지만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이다.     미국에 ‘hi-5’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5명의 친구 모임인 ‘오색회’가 있다. 학연으로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내가 외국에 나가 사는 동안 그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해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빨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내가 많이 아팠고 서로 시간을 맞추느라고 이제야 만나자고 연락한다.”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봄눈 녹듯 사라졌다.  5명이 모두 모였다. 한 명은 침대에서 떨어졌다며 가슴 둘레에 거북이 등 같은 보장구를 하고 나왔고, 또 한 명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귀가 잘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야만 소통이 되는 친구도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으며 보장구를 착용한 친구에게 “야, 너 검투사 같다”며 웃어버렸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려고 나와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 귀갓길 전철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양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된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고려 말 길재는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고 탄식했다. 오늘날 한국은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변해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옛 친구들은 여전하다. ‘산천은 간데없고 인걸은 의구하네’라는 생각을 한다. 오랜 친구들이 나를 변함없이 반겨 주는 곳, 그곳이 내게는 고향이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고향 고향인 한국 친지가 한국 한국 문화

2024.02.08. 19:52

[수필] 소름 끼치는 지구 재앙

탈 성장만이 지구의 재앙을 늦추거나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믿고 있는 세상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해 유럽의 몇 나라들이 애를 써왔지만, 조금씩 가난해지는 길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경제 부흥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경지에까지 오른 황금만능의 위력 앞에서 지구 온난화는 하찮고 귀찮은 걸림돌일 뿐이다. 풍요로움에 길든 이 습성은 변화될 기미가 거의 없다. 귀담아듣고 볼 수 있는 능력보다 쾌락과 흥미 위주의 발포성 흥분을 더 탐하는 문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존층 파괴로 아프리카 대륙은 빈민국과 기후 난민이 늘고 있다. 기후학자들은 항공노선 증가로 인한 일산화탄소 증가가 기온 상승과 오존층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 경고하지만 일반인들은 이에 무관심 하다못해 항공 여행을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형 쿠르즈 한 척의 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4300대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1년에 두세 번은 쿠르즈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이들이 업을 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웨덴의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15세 때 피켓을 들고 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전 세계 청소년들과 공유하게 된다. 그녀의 엄마는 유럽에 알려진 오페라 가수였기 때문에 자주 항공 여행을 했다. 그러나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해 활동 반경을 항공 여행이 필요 없는 국내로 한정했다고 한다. 수입 감소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툰베리는 UN유엔 연설에서 각국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와 당신 자녀들의 미래를 도둑질했다”라고 일갈하는 바람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툰베리는 풍속으로 항해하는 배를 타고 이동하느라 스웨덴과 뉴욕을 오고 가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던 이 소녀의 행로는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고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지구를 병들게 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환경을 위해 15가지 생활 규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10가지 정도만 나누고자 한다.     주변에는 “나 한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랴” 하는 무력감을 가진 분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지구 공동체를 떠날 날이 닥쳤을 때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를 숙고해 본다면 “몰라서 못 했다. 너무 하찮아 신경 쓰지 않았다”라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회한을 어찌 감당할 것인지? 큰일 작은 일을 따지다 정작 놓쳐 버린 시간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흔적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물병·텀블러를 갖고 다닌다. 〈발암 물질인 PFAS와 쓰레기를 줄인다.〉   *온·냉방기 사용 없이 28년 동안 계절에 적응해 살았다. 〈건강 유지에 필수다〉   *옷가지를 줄이고 세탁기 대신 손빨래를 즐기며 숱하게 사들인 옷 무덤에서 해방되었다.   *수도꼭지를 콸콸이 아닌 졸졸로 조절. 〈가주는 물 부족이 심각하다. 앞으로 정화한 폐수를 식수로 전환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니 매우 슬픈 일이다〉     *주로 냉수를 사용하고 온수는 필요할 때만.   *샤워 시간 줄이기. 〈온수를 틀고 만족한 샤워를 좋아했던 나는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천으로 만든 그로서리 가방과 망사 백을 사용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많이 줄인다.〉   *스마트폰 사용 자제. 〈신문과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릴 확률도 줄어든다. 〉   *온라인 쇼핑 자제.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   *소비주의 억제. 〈탈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개인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런 현실은 오지 않겠지만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자발적 가난의 이름으로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다만 의식화된 무소유의 정신과 실천 없이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스페인에는 ‘하느님은 늘 용서하시고, 사람은 가끔 용서한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걸 뒤집어 본다면 자연은 우리가 행한 대로 베풀든지 아니면 복수를 한다는 의미가 아닐지?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최경애 / 수필가수필 소름 지구 지구 환경 지구 온난화 지구 공동체

2024.02.01. 19:14

[수필] 제자의 고백

그 시절은 6·25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움의 기억이 까마득한 데 오랜 세월이 지나갔건만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학교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강당을 여섯 개의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와서 공부했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맞아 주었던 3학년 1반 남아들이었다.   학생들의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벌겋게 부어 있는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 대견했다. 그중에는 산 넘고 들길을 1시간 이상 걸어온 학생도 있었다. 전쟁 중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지내는 학생도 3명이 있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을 핑계 대고 보육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3명의 학생이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시설은 너무도 비참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양지바른 곳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웅크리고 않아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먹을 것만 신경 쓰고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 당시 보육원은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여운 아이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은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일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월 기성회비(학교 운영비)를 담임이 독촉하여 걷는 일이었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우리 반이 항상 꼴찌였다. 무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형벌처럼 전교 학급에서 수납된 기성회비는 나에게 다 가져왔다. 서무과장에게 매일 통계를 내어 돈과 함께 보고하는 업무를 내게 맡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다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받은 기성회비를 교실에 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 돈이 없어진 것이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속만 태우고 조심하지 않은 나의 실수라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땀을 흘리며 친지께 사정하여 겨우 해결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서산을 바라보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의 고운 빛깔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삭막한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듯 황홀하고 포근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 다가왔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는 얼굴의 똑똑한 반장, 조윤모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반장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에서 피난 나올 때 부모를 잃고 작은 엄마와 둘이 삽니다. 작은 엄마는 돈 벌어 오라며 밥도 안 주고 매질까지 해요.” 윤모는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어할까, 마음이 쓰렸다. 나는 저녁을 먹이고 위로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할 말이 있는듯한데 눈치만 보고 망설이다 말을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근무했던 4년간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대전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기며 고향을 떠났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하루는 해군 제복 차림의 말쑥한  군인이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 왔을까? 그는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선생님. 저 조윤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가 고맙고 반가웠다. 제자는 단정히 앉아 망설임 없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선생님의 돈을 훔쳤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제자가 그 일로 인해 오랜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러면서 제자의 진정한 고백에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제자를 안아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용서하는 기쁨, 용서받는 기쁨, 그 순간의 감동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모진 세파를 겪으며 참고 견디었으니 잘 살기를 마음 깊이 빌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 만고풍파 겪으며 살았을 불쌍한 아이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이 된 제자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겠지 싶다.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인연이 있다 생각한다. 제자는 진심으로 양심 고백을 할 수 있는 심성을 가졌으니 틀림없이 올바르게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정직하게 정도를 걸어온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와 축복을 받을 것이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몇이나 있으랴. 잠시 있다 가는 인생길, 많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발자취 남기고 싶다. 이복자 / 수필가수필 제자 고백 양심 고백 강당과 교실 반장 조윤모

2024.01.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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