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을 읽었다.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라고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혼녀인 주인공은 연하의 유부남과 폭풍보다 심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그녀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린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그 남자만을 생각하며 넋이 나간 상태로 보내고 그 남자만을 기다리는 일 이외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녀의 일상, 몸,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도 잊게 하는 열정으로 그에게 깊게 빠져들어 간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명품이나 저택 혹은 지적인 삶이 사치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한 남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게 되면 사랑에 끌리는 정신적 교감이나 지적인 대화가 배제된 단순한 욕망만 드러내고 나열했다는 질타를 받을 수 있겠다. 이 글을 전개해가는 형식에 있어서 그녀는 감정 상태의 미묘하고 복잡한 내면세계를 묘사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그 사랑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평평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사실만을 적어 내려감으로써 독자는 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한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며 긴장감을 즐기는 대중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도 제목을 ‘Passion Simple’이라고 붙였다. 그녀는 생생하고 강렬하게 거의 광적으로 묘사하여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과 충격, 당혹감까지 자아내게 한다. 날마다 애타게 그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만남을 위해 준비하고 황홀한 섹스를 한다. 그 이후로는 그와의 정사를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결국 1년 2개월 후 그는 본국으로 떠난다. 1년 후 꿈속에서처럼 다시 한번 만난 후 그녀는 그 기억을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단순한 열정’을 출간하기로 결심한다. 작가는 이별의 괴로움과 과거에 대한 기억은 풍화되기 때문에 어쩌면 단어들로 그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한 것이 아닐까. 오죽하면 혹시 그가 에이즈라도 남겨주지 않았는지 검사를 해보고 싶었을까. 작가에게 그는 그녀의 상대로서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재고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는 그 사람 덕분에 그녀를 남들과 구분시켜주는 어느 한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그녀는 온몸으로 인간이 어떤 일에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무분별한 신념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이 책은 그녀에 관한 책도, 그에 관한 책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인해 그녀에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열광과 악평으로 나뉘었다. 말과 글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외와 상처를 표현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작가의 말이다. 칼날 같은 글쓰기의 작가로서 그 용기와 단호함에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적으로 충만한 ‘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준 다리 역할을 해준 본인의 경험을 담담하게 적은 개성적인 글이다. 어린 시절 가난과 무지한 부모 밑에서 자라지만 학교에서 사회 계층을 알게 되면서 심한 충격을 받는다. 총명한 그녀는 신분 상승을 위해 공부하고 대학교수가 된다. 바흐를 듣고 책을 쓴다. 자신의 출신이 부끄럽고 그런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고 그 수치심을 글로 드러내는 일이 자신을 낳아준 계층을 배반하는 일이기에 더욱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펜의 힘은 칼보다 강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순수 열정 passion simple 노벨 문학상 감정 상태
2023.04.07. 17:52
슬픔은 마지막 순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참 신기했다 /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만 보였다 / 유독 다가오는 것은 나와 닮았고 / 모양뿐 아니라 생각의 틀도 닮았었다 / 오늘 나는 눈을 뜨고도 심하게 넘어졌다 / 서로의 간극이 너무 커서였을까, 그럴 리 없다 / 바다와 하늘은 멀어도 맞닿아 서로의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는데 // 자유롭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 한 순간 스치는 생각을 벗지 못하는 / 슬픔은 무거움이란 생각이 든다 /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멍에란 생각에 잠을 설쳤다 / 결코 그럴 리 없다 손을 저어도 옥죄이는, 자유를 침해하는 무례는 / 누구도 받아드리기 힘든 짐이 되었으리라 // 늦은 밤 창문을 통해 나를 내려 보는 별들의 반짝임도 / 발자국 소리를 따라 깨어나는 새벽의 밝아옴도 /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때까지 혹독한 열병을 치를지라도 / 다시 태어나 당신의 세상으로 날아가리라 / 눈을 감고서야 보이고 입을 다물어서야 전할 수 있는 세미한 음성이 되어 / 푸르게 피어날 봄의 향기로 전해올 때까지 // 나 한 밤을 뜬 눈으로 지샌 반가움으로 다가갈 수만 있다면 / 내 마지막 순수의 노래로 당신을 뜨겁게 맞이할 수만 있다면 / 이게 다가올 세상에 가능하기만 한다면 세익스피어 ‘리어왕’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이 난다. 초도의 군주 리어왕은 숨이 끊어진 딸 코델리아를 안고 무대 위를 걷는다. 이 모습은 비극적 상실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이자, 슬픔의 무게에 대한 은유다.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 ‘참을 수 없는’이다. 그러나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짐이다. 슬픔이란 미처 체험 하지 못한 우리의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 된다. 무한에 대한 열망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슬픔은 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은 자기 욕구가 거절 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슬픔은 상실감과 희생을 거부하는 감정 표출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슬픔이 있어 기쁨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현재의 삶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삶을 향한 회한이 담겨 있다는 증거이고 희망을 향한 첫 걸음이 아닐 수 없다. 슬픔에 잠겨있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경이로운 삶의 국면이 펼쳐진다. 슬픔 속에는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듯한 침잠과 무기력과 공허함이 따라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삶의 역동성이 잠재 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사고란 무한을 향한 갈망과 불리 될 수 없기에 거기서 오는 슬픔 또한 가슴 저미는 우리를 돌아 보게 한다. 과연 무엇이 슬픔인가? 슬픔의 본질은 무엇인가? 슬픔이란 단순한 감정을 표현한 단어지만, 그 속에는 수 많은 의미와 서로 상반되는 경우의 감정이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괴롭다, 슬프다, 울고 싶다는 절망의 편에 자주 선다. 슬픔은 무언가의 불일치에서 일어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무언가 충족 되지 않는 결핍감이 심해 질 때,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슬픔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슬픈 것이다. 슬픔뿐 아니라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행복감 등 우리 감정 대부분이 현실에 대한 신체감각의 반응이다. 그 중에서도 슬픔은 뭔가를 잃고 빼앗긴 상태에서 시작 되기에 모든 사람들은 남이 모르는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미소가 있지만 눈 속에는 슬픔이 가득한 사람들도 많다. 행복해 보이는 데 안으로는 슬픔을 숨기고 살아가는 힘든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나는 여기서 자유와 승화라는 두 단어를 떠 올렸다.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하거나 또는 그처럼 지낼 수 있는 상태인 이 자유는 모든 사람의 중요한 권리 가운데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억압이나 제약이 없는 상태, 나쁜 것이나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의지를 말한다.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와 어떤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 이 두 가지 자유로부터 우리가 겪는 슬픔은 극복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어떤 현상이 더 높은 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승화의 정의다. 어떤 물질이 액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무엇이 더 높은 경지나 상태에 이르는 것. 슬픔이라는 참담함을 오히려 꿈과 이상을 통해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힘. 충동이나 욕구를 예술 활동이나 종교활동으로 사회적, 정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꾸어 내는 것. 나를 누르는 슬픔의 무게를 자유와 승화의 정신으로 내려 놓는 일. 그래서 더 높은 뜻과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말 잘 살은 인생이 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순수 마지막 순수 감정 표출 우리 감정
2022.12.05.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