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며
“임종 과정 20분 동안 평소 가장 좋아하셨던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들으며 떠나셨습니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오인동 박사의 유가족이 보내온 글의 한 구절이다. 오 박사는 평소 음악을 좋아해서, LA 필하모닉 이사로 오래 활동했고, 헐리웃보울 가족 지정석을 40년간 가지고 있었다. ‘신세계’라니 참 의미심장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는 시작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신세계는 그가 생전에 꿈꾸던 통일된 조국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 나는 어떤 음악을 들을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 아니면 김민기의 〈아침이슬〉…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이다. 스코트는 100세 생일에 즈음하여, 곡기를 끊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스코트의 의연한 자세와 그 과정을 완성으로 승화시킨 헬렌의 사랑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헬렌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며 반쯤 소리 내어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중얼거렸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고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이 당신과 함께 가요.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잘 있어요.”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식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다. 생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마감방식이다.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이 몸에 밴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던 스코트에게 참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아내 헬렌은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스코트는 장례식이나 추모식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원해서 죽은 지 2주일째 되는 날, 마을회관에서 조촐한 추모식이 열렸다. 스코트의 백 번째 생일날 이웃 사람들이 축하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찾아왔는데, 그 깃발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서 공부하고 준비해야 한다.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적 준비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 노인 인구가 늘면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든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작별하고 싶지만, 집에서 죽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통계에 따르면, 재택 임종은 14%에 불과하고, 노인 10명 중 7명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미국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의료화’를 내세우며, 자연사를 인정하지 않는 의료계 현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 나답게 죽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마무리 스코트 니어링 신세계 교향곡 미완성 교향곡
2025.09.18. 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