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노년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필자는 어머니 이야기를 해드린다. 몇 년 전에 92세로 세상을 떠나신 필자의 어머니는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하니?”를 생의 원칙으로 삼으셨다. 갓 돌이 지난 필자를 품에 안고서 남한으로 피난을 오실 때, 육로는 북한 병사들의 감시가 심해서 바다로 오셔야 했단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작은 배에 오르자, 선주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 애가 울기 시작하면 우리 모두가 죽게 되니, 아이를 바다에 던지시오.” 19세의 어머니가 한 살짜리 내게 어떤 말을 하셨는지, 어떻게 마음의 안정을 주셨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인천에 무사히 도착했다. 피난지 남한에서 아버지가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2년마다 이사 다녔다. 그래도 어머니가 힘드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 오히려 가난 속에서도 양식이 떨어진 먼 친척을 위해서 무거운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서 산동네에 가셔서 도와드렸다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에 여러 번 들었었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시작한 후, 2학년이 되어 이사 간 목포의 산꼭대기 집에서는 유달산의 진달래 꽃이 잘 보였다. 우리보다 더 위 쪽에 사시던 아주머니는 자주 우리 집에 오셔서, 나랑 동생 인숙이를 돌보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자상하게 도와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단다. 생활에 지쳐 있던 어머니는 그 아주머니를 따라서라면 세상 끝까지도 가시고 싶었단다. 드디어 그 친절한 아주머니를 따라서 간 곳은 작은 교회당이었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들었던 찬송가의 울림에 큰 감동을 느끼셨다고 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성경, 로마서 8장에 쓰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구절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남동생이 교통 사고를 당했을 때나, 아버지가 갑자기 직장을 잃었을 때에도 어머니는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선을 이루는 데에 일익을 하리라고 믿으셨다. 필자가 의과 대학 공부로 피곤할 때에도 옆방에서 어머니가 TV를 보시며 웃는 소리가 들리면, 편안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평양에서 멀지 않은 ‘개천’에서, 어머니는 유복녀로 태어나셨다. 외할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간 많은 빚을 갚느라 바쁘셔서 홍역에 걸린 막내 딸을 열심히 돌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홍역의 합병증으로 얻은 기관지염과 천식 때문에 어머니는 일생을 고생하셨다. 미국으로 모셔온 후 폐 기능 검사를 한 결과는 심각했다. 정상인의 약 50~60%의 폐기능만이 남아 있었고, 왼쪽 허파의 거의 반은 전혀 기능을 못하는 캄캄한 동굴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늘 미소를 지으셨다. 이러한 건강 상태에도 어머니가 총명한 정신을 유지하시며, 구십 이세가 되도록 사셨던 비결을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로 본다. 먼저, 끊임없는 몸의 움직임 또는 활동이다. 딸이 정신대에 끌려갈 것을 두려워하신 할머니가 17세에 서둘러 시킨 결혼, 이듬해에 태어난 필자를 비롯한 네 명의 자녀를 길러내셨다. 까다로운 남편과 육십 여년을 살아가시며, 어머니는 ‘죽으면 썩을 몸’으로 열심히,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셨다. 공무원 생활을 계획 없이 끝낸 후, 실의에 빠져 있던 아버지가 건축업을 시작한 것은 스코필드 박사님의 강력한 권고와 장학금 덕분이었다. 내가 연세대 의과 대학에 입학한 후다. 새집이 팔릴 때마다 어머니는 이사 짐을 싸야 했다. 반년 만에 부모님은 스코필드 박사님의 장학금을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급우가 나 대신 받도록 하였다. 쉬임없이 일하신 어머니의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라는 사명 때문이었으리라. 또 다른 비결은 넓고 아름다운 인간 관계라고 본다. 손자의 친구들이 전화를 하면, 일본 유학을 한 아버지는 당황해서 전화를 어머니에게 건네셨다. 이북에서 6학년 교육을 마치신 어머니는 손자를 대하듯 따뜻한 태도로 그들과 이야기를 하셨다. 그것은 아마 아기가 엄마와 눈을 마주치며, 사랑을 표하는 몸짓이나, 언어였을 것이다. 사랑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문법이나, 새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노인 아파트에서 사시면서 한국인, 외국인에 상관없이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셔서 장례식은 유엔 총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조문객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기도와 명상을 그치지 않으신 것도 비결이다. 카이저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필자는 당직 날 새벽 두세 시에 응급실로 불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마약을 한 젊은이가 정신 이상을 일으켜서 오거나, 조울증 환자가 분노에 휩싸여서 주먹으로 창문을 부수다가 동맥 파열로 응급실로 오는 경우, 애인이 배반했다며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급 차로 실려 오는 경우 등등 이런 밤이면, 필자는 어머니의 기도의 힘을 믿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생명을 오래 지켜준 큰 힘은 그녀의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소망이 가득한 삶의 태도였다고, 필자는 믿는다. 저 높은 곳에서 여전히 미소 짓고 계실 어머니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보내 드린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스코필드 박사님 공무원 생활
2025.10.30. 18:39
문단에 등단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다. 그동안 시집 2권과 수필집 2권, 영문 수필집 1권을 출간했다. 요즘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가 많다. 며칠 전에 한 독자가 재미 수필가협회 웹 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을 읽고 댓글을 달아 놓았다.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 최돈원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이정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구글링 하던 중에 우연히 작성하신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상상해 볼 때마다 정보가 부족해서 항상 갈증이 있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글 덕분에 처음으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혹시 한국에 계신다면,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모님과 함께 꼭 한번 뵙고 감사의 인사를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이메일은 ****@gmail.com입니다.’ 그러니까 63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 수속을 밟고 있었다. 5명의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해 피천득 교수님, 장왕록 교수님, 정병조 교수님, 스코필드 박사님, 사범대학 학장님이시고 영문학자이던 이종수 교수님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제출했다. 얼마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시에는 유학 가려면 신체검사가 필수 조건이었다. 대학에서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결과가 나왔다. 너무나 놀라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진단서에는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23세 곱디고운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 동생 김영교 시인은 먼저 미국에 유학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대한민국학술원 원장이셨던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계셨다. 나는 모든 꿈이 무너진 현실에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큰 오라버니 소개로 인천 송도 적십자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하기 전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님은 기도와 함께 성경책과 기독교 책을 몇 권 주시면서 위로해 주셨다.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라고 믿고 늘 기도했다. 전심전력으로 투병 생활을 한 결과 완치가 되어 퇴원하게 됐다. 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도전하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재발 위험이 있으니 유학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고등학교 2급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교편생활도 분필가루가 폐에 절대적으로 해롭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치의가 반대했다. 결핵을 앓았던 터라 결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보건사회부에서 WHO(세계보건기구) 결핵 고문관이었던 유진 로우 박사(Dr. Eugine Low)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보건사회부 장관 명의로, 영문으로 나가는 모든 영문 서류는 내가 작성해 다시 장관의 결재를 받아 외국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로우 박사의 영문편지도 타이핑해서 세계보건기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 당시 방역과장으로 계셨던 최돈원 박사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이분이 바로 나의 수필에 댓글을 달아 준 이정민씨의 외할아버지다. 재미 수필가협회 웹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은 ‘아름다운 야망’이었다. 그 수필 속에 실린 최 박사에 관한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본다. ‘…보사부 방역과장이던 최 박사는 큰 오라버니 친구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사부에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영어 실력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를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오라버니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그는 늘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동한다고 말했다. 친구 의사들은 졸업 후 대개 개업을 하거나 학교에 남았지만 최 박사는 박봉의 월급쟁이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외모가 케네디 전 대통령을 많이 닮아 나는 ’닥터 케네디‘란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레라가 창궐했고, 그 기세는 꺾이지 않고 확산했다. 최 박사는 콜레라 발생지역인 마산에 내려가 최일선에서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며칠 계속 지새우다 과로로 그만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각혈하다가 핏덩어리가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혀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평소 아주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아무도 모르게 지병(폐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그의 소식에 주위 사람들은 더욱 감동해 눈시울을 적셨다. 젊디젊은 삼 십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해 슬픔은 더 컸다. 짧은 인생이지만 멋있고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간 최 박사는 나에게 귀중한 꿈을 심어주고 간 분이었다. 최 박사의 별세를 계기로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을 비관하고 꿈을 잃었던 내가 옛 허물을 벗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병을 비관만 하고 자학만 해왔던 나와 달리 최 박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다가 순직했다. 우리 두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각각 정반대의 명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슬픔 속에 머무르던 나는 마치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최 박사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가 입원했던 송도에 있는 적십자 결핵 요양소를 다시 찾아갔다. 봄철이라 만발한 철쭉꽃이 나를 반기는 듯 함박웃음으로 활짝 피어서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면서 최 박사의 못다 핀 청춘의 꿈이 그곳에서 활짝 핀 꽃으로 눈부시게 피어 오르는 듯 했다.’ 63년 전에 만났던 최 박사의 후손 이정민씨가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인터넷을 통하여 찾다가 내 수필을 읽고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며 나에게 댓글을 달아준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이정민씨의 온 가족은 나를 꼭 만나고 싶다며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내년에 한국에 나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들과 만나면 최 박사 생각에 감회가 북받쳐 엉엉 울 것 같다. 김수영 / 수필가문예마당 인연 필연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스코필드 박사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025.05.22.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