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비스와바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두 번은 없다’,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16. 아이가 죽었다. 생전에 깃털처럼 가볍던 디만시아란다가 세 살이 되도록 부모도 모른 채, 장애를 갖고 살던 땅을 떠나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이 땅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란다는 시 정부 기관에 의해 생후 6개월쯤으로 추정되는 때에 장애 고아원에 위탁되었다. 아이티 현지 스태프 조나단이장애고아원의 아이 둘이 폐가 안 좋다는 연락을 한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병원을 가보지 그러느냐는 이야기는 한가한 소리였다. 아이들이 치료받을 만한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공립병원의 빈자리를 어렵게 찾았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기에는 의약품도 의료진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란다는 너무 늦게 병원을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수도 포토프린스에서 가장 현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갱들의 약탈로 무너졌다. 12월에는 아이티에서 제일 큰 병원이 다시 개원하는 날 갱들이 총격을 가해 기자 두 명을 포함해 세 사람이 사망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지난해에 환자와 의료진이 갱들의 공격을 받은 이후 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며 아이티에 있는 여러 병원의 문을 닫았다.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경찰도 아프면 병원을 찾고, 갱들도 다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폭력적이기만 한 갱들의 만행은 병원을 파괴하고 가뜩이나 무정부 상태인 나라의 의료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도 거의 없거니와 문을 열고 있는 공립병원은 열악한 시설에 의약품이 부족하다. 갱들이 세력을 넓히면서 의료진도 손을 놓은 경우가 많아서 생명이 위험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렵다. 아이티는 지금 겨울이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낮 최고 기온이 화씨 90도 안팎, 밤 최저 70도 안팎인데, 이런 날씨에도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곤 한다. 고아원 아이들은 아프면 말이 없어지고,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도 못 하는, 평소보다 더 얌전해진 아이들을 버려두다가 병을 키우고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된다. 거기에다가 치료받을 병원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감기가 유행인 요즈음 우리가 돕는 고아원 원장 중 세 사람이 독감을 앓고 있고, 아이들도 상당수가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다, 샬롬고아원의 쟌 목사는 기침을 계속하면서 피를 토한다고 조나단이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들이나 고아원 스태프가 아프면 우리는 긴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꾸 슬픔을 상상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고아원을 짓누르고 있을 때 우리도 예견된 슬픔을 겪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슬퍼하셨다. 우리는 아이티와 아이티 고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막막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슬픔을 미리 삼킨다. 아이티 고아원에 지원할 의료비를 송금하면서도 닥쳐올 슬픔은 더욱 커지고, 우리는 이미 예견하고 있던 아란다의 슬픔을 고이 싸매고 있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예견 슬픔 아이티 고아원 고아원 스태프 장애 고아원
2025.02.27. 17:45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관객을 웃겨야 하는 것이 광대의 운명이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광대’는 이런 애환을 그린 오페라다. 주인공 카니오는 유랑극단의 광대이다. 그에게는 네다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하지만 네다는 실비오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이번 공연이 끝나면 실비오와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카니오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네다에게 연인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지만, 네다는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네다와 카니오가 출연한 공연의 내용이 그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네다가 맡은 컬럼비나 역은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역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카니오는 극 중 상황과 실제의 상황을 혼동한다. 그래서 컬럼비나가 정부 아르레치노에게 “나는 항상 당신의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만다. 카니오는 무대에 등장해 네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말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네다는 자신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 분노한 카니오는 칼로 네다를 찌른다. 네다는 죽어가면서 “도와줘요, 실비오”라고 말하고, 그제서야 실비오가 정부라는 것을 안 카니오는 실비오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는 객석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희극은 끝났소.” 이것은 정녕 희극일까? 아니면 희극의 외피를 입은 비극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광대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니까. 카니오가 부르는 ‘의상을 입어라’는 이런 광대의 처지를 토로한 것이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아! 웃어라! 광대여! 그대의 깨어진 사랑을! 네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그 슬픔을 웃어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광대 슬픔 이번 공연 입고 관객 존재 자체
2024.05.06. 17:55
하늘이 흐려 빌딩 뒤로 붉게 번져오는 일출을 볼 수 없습니다. 인사동 나인츄리 15층 객실 통유리를 통해 종로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천년을 세우는….’ 조계종의 화려한 꽃등이 보이고 가끔 느리게 차가 움직입니다. 5층 라운지에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습니다. 한잔은 이곳에 없는 당신에게 드리려구요. 이른 아침 커피향은 늘 정신을 가다듬게 합니다. 지난 밤 수런대던 인사동은 침묵 속에 있습니다. 시화집을 내러 시카고에서 이곳까지 왔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마음 같기만 해서 내려다 본 가로수의 행렬이 왠지 쓸쓸해 보이는 아침입니다. 키를 키우지 못한 생각의 매듭을 풀고 이른 아침 출근하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작게만 보입니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들의 대화보다 여린 어깨로 아침을 걷고 있는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듯해 정겹습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바르고 의연해 보이는 걸음입니다. 꽃이 필 때 우리는 환호하지만 꽃이 져야 열매를 맺거늘 지는 꽃을 바라보며 당신은 마음조리지 말기를, 부디 마음 상하지 않기를.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닌 것을.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을. 눈가에 잡힌 주름이 어색하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질 때, 아득히 흘러간 시간도 한때 피었다 지는 한송이 꽃인 것을, 남겨질 씨앗인 것을. 나무숲에 앉아 지저귀던 한 마리 새도 노을빛 하늘로 사라지거늘, 통속하는 세월의 한 풍경이거늘. 스치고 간 자리마다 작은 떨림으로 흔들리는 당신, 부디 아프지 마시라. (시인, 화가) 슬픔이 깊어질 때 물결은 잦아들고 한 웅큼의 말을 땅에 뿌렸다 / 긴 세월 잊혀진 말들은 / 씨가 되어 싹을 내었고 / 대지는 얼굴을 바꾸었다 / 이야기가 되어 자라나고 / 그 자리마다 채워지는 / 바람의 소리며 / 모로 눕는 햇살의 따가움이며 / 들녘의 눈물들이며 / 손짓하는 자유가 되었다 / 슬픔 이라는 말은 꽃으로 피어나고 / 외로움이란 단어는 바람으로 다가왔다 / 절망이란 손짓은 푸른 잎으로 돌아와 / 먹먹히 아파 붉어지는 시간 / 걸음마다 길이 되어 오는 / 당신의 속말은 십자가로 세워지고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숙연해진 물결은 잦아들고 / 고개들 수 없는 무거움 / 그대 안으로 한없이 세워지는 / 기억은 망각 중이거나 / 끄집어내는 거울이거나 / 보라노을은 슬픔이 깊어질 때라도 / 행복하기 위해 아픈 계절 / 높이든 빈 잔에 빨갛게 담겨지는 / 당신의 숨결 / 당신이라는 십자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슬픔 물결 노을빛 하늘 희극도 비극도 아침 커피향
2023.06.12. 14:56
누가 6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슬픈 옛날을 더듬으며 우거진 녹음 속에 숨을 죽이면서 피해 다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해마다 현충일엔 너댓명의 노병들이 죽은 전우의 이름 앞에 둘러앉아 그 치열했던 전장 속으로 빠져든다. 새파랗게 젊은 육군 소위들이 이름 모를 산야에서 적의 포탄 속을 헤매다 피투성이가 되어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래도 살아 있음을 감사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월의 증표인 백발마저 거의 다 빠진 나이 90이란 신분증에 이마의 주름살 계급장과 가슴에 단 낡은 훈장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죽은 전우 곁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음을 미안해하면서 통곡한다. 벌써 73년째, 6·25한국전쟁은 아직도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눈시울을 젖게 한다. 나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의 한 중학교(당시 6년제) 재학생이었다. 갑자기 터진 전쟁에 북한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향했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어디 나 혼자 뿐이랴. 갈 곳 없는 서울의 중학생들이 떼 지어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작정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전세가 호전됐을 때 국방부장관 명에 의해 나도 학교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차피 입영할 몸, 졸업 무렵 다시 육군간부후보생 (OCS)에 지원해 6개월 만에 소정의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모 소위’란 소리를 들으면서 전방부대에 배치돼 치열한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직전의 전투 상황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휴전 후 1957년, 미국에서 얻은 엄청난 무상 군사원조 덕에 한국군은 항공기부터 해군함정, 그리고 지상군에 절대적 장비인 전차도 갖추게 되었다. 또 군사 교육 목적으로 초급장교들의 미국 유학도 많았다. 나도 그 중 한명으로 선발돼 영화나 뉴스로만 보고 듣던 미국 땅을 밟아보는 행운을 1년간 누렸다. 뉴저지에서 유학 중이던 6월 어느 주말 오전, 시내 관광에 나서려는데 숙소 앞에 젊은 부인이 어린 자녀 2명을 차에 태운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모닝” 하고 인사하며 지나가려는데 그 부인은 “웰컴어보드” 하며 차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그 차를 타고 말았다. 그 부인은 나를 본인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갔다. 처음으로 미국교회에 출석해 예배드렸고 부인 집에 초대되어 점심 대접도 받았다. 그날 관광 계획은 당연히 포기했다. 부인은 쌀밥에 채소를 버무려 김치처럼 만든 샐러드와 푸짐한 프라이드치킨,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부인의 7세 아들, 5세 딸과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미군 정복을 입고 육군 상사 계급장을 단 건장한 남성 사진을 발견했다. 부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남편이고 애들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냐고 되물었더니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남편은 한국전쟁 휴전 한 달 전에 한국전에서 전사했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순간 나는 “오 마이 갓”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그 부인은 이어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분명 남편이 그나라를 도와줬다는게 감사한 일이죠” 하면서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선하신 하나님, 어쩌면 저렇게 마음씨 착하고 어린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에 슬픔을 주십니까?” 나는 신앙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했다. 전쟁의 유물은 과부와 고아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하나님, 이 잔인한 6월에 저토록 큰 슬픔일랑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슬픔 한국전쟁 휴전 육군 소위들 주름살 계급장
2023.05.31. 20:14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고독만큼 같이 지내기에 좋은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대개 방 안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외롭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항상 혼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 중에서 소로는호수의 아비새와 휠튼 호수가 외롭지 않듯 스스로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목장에 핀 한 송이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그리고 뒤영벌이 외롭지 않듯’ 자신도 외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수시로 생의 뒷덜미 치는 허무와 허리뼈 뭉개고 달아나는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생명 있는 것들은 아프다. 태양도 달도 별도 생명 없는 것들도 슬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외로움의 깃발을 생의 곳곳에 꽂는다. 고목도 강물도 비오는 날이면 슬픔의 눈물 흘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슬프다. 세월이 담쟁이 넝쿨로 온몸을 휘감으며 생채기를 남기는 동안 사랑을 하고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대 품속에 있을 때도, 그대 떠난 창가에 홀로 서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람을 견디지 못해 세월이 조금씩 바위에 흠집을 내는 동안, 그대 향한 사랑의 꽃다발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마른 꽃잎으로 시들어갔다. 고독은 혼자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고독은 영어로 ‘Solitude’로 번역되는데 바른 표기는 못 된다. Solitude 는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배제된 혼자 있는 상태로 명상이나 창작, 수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독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슬픔이다. 소중한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그려져 있지 않다. 고독은 인생의 여백이다. 보이지 않는 생의 슬픔을 담는다. 여백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외로워도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여백은 비어있는 것들을 채워주고 슬픔을 잠재운다. 공백이 생략된 공간이나 단순히 비어있음을 뜻한 데 비해 여백은 공백이 주는 공간적 빈자리를 극복하고 고독을 견디는 새로운 장을 펼친다. 고독은 창의성의 원천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말한다. 수많은 위인이나 예술가들은 고독의 강을 건너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도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고독을 통해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고독은 ‘나 하나로, 나 혼자’라도 충분해지는 생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개나리 세 그루를 뒷마당에 심는다. 사랑 듬뿍 주면 밝고 샛노란 꽃잎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환한 미소로 다가올 것이다. 코발트빛 봄 하늘을 병풍 삼아 봄노래 중얼거릴지 모른다. 외롭지 않기로 했다, 더 사랑하고 껴안고 가까이 가기로 한다. 고독은 외로움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슬픔이라 해도 고독을 위해 생의 몇 부분을 남겨 놓는다. 고독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동행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프다 해도 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크고 우람한 붓질을 남겨두리라. 그대 사랑이 지나간 여백의 화선지에 사랑의 꽃 한 송이 새겨두기로 한다.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존재 슬픔 동안 사랑 그대 사랑 담쟁이 넝쿨로
2023.04.16. 15:32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고독만큼 같이 지내기에 좋은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대개 방 안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외롭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항상 혼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 중에서 소로는 호수의 아비새와 휠튼 호수가 외롭지 않듯 스스로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목장에 핀 한 송이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그리고 뒤영벌이 외롭지 않듯’ 자신도 외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수시로 생의 뒷덜미 치는 허무와 허리뼈 뭉개고 달아나는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생명 있는 것들은 아프다. 태양도 달도 별도 생명 없는 것들도 슬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외로움의 깃발을 생의 곳곳에 꼽는다. 고목도 강물도 비 오는 날이면 슬픔의 눈물 흘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슬프다. 세월이 담쟁이 넝쿨로 온 몸을 휘감으며 생채기를 남기는 동안 사랑을 하고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대 품 속에 있을 때도, 그대 떠난 창가에 홀로 서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람을 견디지 못해 세월이 조금씩 바위에 흠집을 내는 동안, 그대 향한 사랑의 꽃다발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마른 꽃잎으로 시들어갔다. 고독은 혼자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고독은 영어로 ‘Solitude’로 번역 되는데 바른 표기는 못 된다. Solitude는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배제된 혼자 있는 상태로 명상이나 창작, 수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독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슬픔이다. 소중한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그려져 있지 않다. 고독은 인생의 여백이다. 보이지 않는 생의 슬픔을 담는다. 여백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외로워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여백은 비어있는 것들을 채워주고 슬픔을 잠재운다. 공백이 생략된 공간이나 단순히 비어 있음을 뜻하는데 비해 여백은 공백이 주는 공간적 빈자리를 극복하고 고독을 견디는 새로운 장을 펼친다. 고독은 창의성의 원천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말한다. 수많은 위인이나 예술가들은 고독의 강을 건너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도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고독을 통해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고독은 ‘나 하나로, 나 혼자’라도 충분해지는 생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개나리 세 그루를 뒷마당에 심는다. 사랑 듬뿍 주면 밝고 샛노란 꽃잎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환한 미소로 다가올 것이다. 코발트빛 봄 하늘을 병풍 삼아 봄노래 중얼거릴지 모른다. 외롭지 않기로 했다, 더 사랑하고 껴안고 가까이 가기로 한다. 고독은 외로움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슬픔이라 해도 고독을 위해 생의 몇 부분을 남겨 놓는다. 고독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동행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프다 해도 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크고 우람한 붓질을 남겨두리라. 그대 사랑이 지나간 여백의 화선지에 사랑의 꽃 한송이 새겨두기로 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존재 슬픔 동안 사랑 그대 사랑 헨리 데이비드
2023.04.04. 14:08
버지니아 애난데일 한인 상가에서 12일 발생한 대형 화재 사건에 대한당국의 사고 조사가 한창인 가운데, 수십 명 한인들이 '생활의 터전'을 잃고 신음하고 있다. 화재를 당한 업주들은 피해 규모 확인과 업소 이전, 보험 및 보상 요구 작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들 업소에서 일해왔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당장 '실직'과 '생활고'라는 암담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됐다. 사고 이틀째를 맞은 13일, 버지니아 페어팩스 소방당국은 정확한 사고 경위와 원인 파악을 위해 분주하다. 이번 화재 사고의 현장에서 당국과의 연락 및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총영사관 김봉주 영사는 본보에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인 가운데 한인업소 4곳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발생한 피해규모를 현재 파악중”이라고 알렸다. 김 영사는 “건물주와는(13일 오후 현재) 아직 연락이 안 닿은 상태이고 업주들과의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부분 업주들이 화재보험에 가입을 한 상태이긴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 영사관 차원의 서류발급 및 법률 자문 변호사 지원의 조력을 해 나갈 방침이다”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이번 화재로 피해를 입은 한인 업체 관계자들은 망연자실한 가운데서도 피해규모 산출과 업소의 새 시작 여부를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다. 워싱턴 지역 수백개 한식당 중에서도 '숨은 맛집'으로 유명했던 '토속집' 식당 업주 캐빈 대표는 “오늘이 직원들 월급 주는 날인데... 화재로 10년이상 함께 일 한 9명이 일자리를 잃어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고 말 끝을 흐렸다. 캐빈 대표는 “고객들이 위로 전화와 함께 새 가게 자리를 알아봐 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고객들 성원에 보답하고 다시 함께 우리 직원들과 일하기 위해 곧 애난데일 다른 장소에 가게를 재오픈 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한미택배 애난데일점 김 진 대표는 “일요일 아침 화재 사실에 대한 연락을 받고 매우 놀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대표는 “고객들의 택배가 접수되면 당일 챈틀리 본사로 이송되는 시스템이라 다행히 큰 피해는 없는 상황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수의 피해고객에 대해서는 화재원인을 파악한 후 보상 청구에 대해 보험회사와 논의할 것”이라며 “애난데일점 한미택배 이용 고객들은 웰빙모아 내 대리점을 이용해 줄 것을 알려달라”고 기자에게 당부했다. 한편, 정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으나 이번 화재가 최초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는 한국식 치킨 전문체인 '본촌' 측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해당 업소의 직원들은 '출근 불가' 통보를 받았으며, 차후에도 매장 재개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본촌'은 지난 2021년에도 당시 버지니아 페어팩스 지점이 화재로 전소돼 매장을 이전한 바 있다. 박세용 김윤미 기자 화재 슬픔 이번 화재 대형 화재 가운데 한인업소
2023.03.13. 15:10
슬픔에도 무게가 있을까.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가족을 잃는 슬픔일 것이다. 오랜 지인이 외아들을 잃었다. 훌륭한 안과의사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아 종합검사를 했는데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아들은 곧바로 입원해 치료에 들어갔지만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가족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슬픔을 덜어 줄 수 있을까. 정말로 난감했다. 슬픔도 나누면 이겨나갈 수 있으려만… 그러기에는 슬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궁리 끝에 옛 이야기가 생각났다. 석가세존이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3대 독자를 잃은 한 미망인이 삶의 의욕을 잃고 부처님을 찾아가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는 지금 마을로 내려가 사람이 죽지 않은 일곱 집을 찾아 쌀 한 움큼씩 얻어 오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방책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부처님 말씀대로 마을로 내려가 온종일 돌아다녀 봤지만 어느 한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지 못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 부처에게 전후 사정을 말했다. 부처님은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면서 그 여자 스스로 체험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의 삶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한 번은 죽는다. 다만 조금 일찍 또는 조금 늦게 죽는 차이일 뿐이다. 죽음에는 차례가 없다. 그럼에도 아깝게 일찍 죽는 것과 천수를 다하는 차이에 따라 슬픔의 무게도 크게 달라지는가 보다. 이산하·노워크독자 마당 슬픔 무게 부처님 말씀 정신적 공황상태 급성 백혈병
2022.03.18. 18:32
지난주 수요일에 세탁소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사실 하루에 세탁소로 걸려오는 전화가 한 두 통이 아니건만 그 전화는 특별했다. 세탁소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다. 자기가 맡긴 옷이 다 되었는가를 묻는 일부터 가게 위치며 세탁비에 관한 내용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러니 세탁소에서 전화 통화할 때 내 목소리는 늘 메말라 있는 편이다. 그러나 수요일에 걸려온 전화는 내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게 하는 그런 종류의 사사로운 것이었다. 수화기를 들면서 발신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주 낯이 익은 이름이었고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석 달을 훌쩍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론의 아내의 것이었다. 론과 그의 아내는 그저 손님이 아니라 잠깐씩이라도 개인적인 마음을 나누는 나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론의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작년에 마지막으로 세탁소에 들르고 일주일 후에 세상을 뜬 것이다. 10여 년 전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이 있어서 론의 사망 소식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쓰리고 아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은 작년이지만, 늦었어도 내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So sorry’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건조하던 내 목소리에서 울음이 묻어 나왔다. 나는 어떻게 그 전화 통화를 마무리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 남편과 아들의 기억 때문에 무척 아팠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더는 사랑을 전할 수 없는 그 아픈 마음 한 자락을 꺼내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김학선·자유기고가독자 마당 슬픔 자락 전화 통화 사망 소식 자기 남편
2022.03.11.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