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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연습

어느덧 머리 위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나이가 되어서야 곁에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당당했던 젊은 날의 어깨는 어디로 갔는지, 삶의 무게를 버텨내느라 조금은 처진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지나온 고단한 시간을 짐작해 본다. 앞만 보며 달려온 시간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도착하게 될 종착지는 과연 어떤 빛깔로 물들어 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뒤 작업실로 가려는데, 거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보며 시간을 좀 보내야 하지 않을까? 당신 따로, 나 따로 이렇게 쉬는 건 너무 밍밍하다.” 텔레비전이라도 함께 보자는 말이었지만, 우리는 취향이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거로 골랐다며 너스레를 떠는 날, 못 이긴 척 옆에 앉아 있어 보지만 남편은 이내 휴대전화를 보거나 잠이 든다. 같이 있어도 각자의 시간이 되는 저녁, 그 풍경은 어느새 우리 부부에게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신혼 시절의 나는 마주 앉아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를 꿈꿨다. 와인 한 잔을 사이에 두고 하루의 자잘한 일들을 나누며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밤을 상상했다. 하지만 바깥일에 지친 남편에게 집은 오직 쉬는 공간이었고, 나는 그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홀로 시간을 채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고민하고 기대며 키우고 싶었지만, 육아의 무게는 늘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어쩌다 꺼낸 마음의 이야기는 종종 서글픈 오해로 끝났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시킬 여유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는 이제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데, 남편은 대화가 무거워지는 걸 조용히 피한다. 이만큼의 시간을 살아오고서도 아직 이런 바람을 품고 있는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여전히 꿈꾸고 있는 건지 스스로 묻게 되는 날들이 있다. 때로는 한탄하듯 “늘 그렇지 뭐. 인제 와서 얼마나 알콩달콩 깨를 볶겠다고 애를 쓰는 건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한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며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다르니, 같은 공간에 다른 두 사람이 그저 사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꿈꾸던 부부의 모습은 아니지만 인제 와서 모든 걸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발을 맞추려고 애쓰기보다 서로가 다치지 않게 나란히 걷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보다 이미 우리 곁에 있던 것들을 정성껏 닦아내는 연습을 하려 한다. 가끔 치는 골프와 피클볼을 하며 땀 흘리고 웃는 그 순간의 생동감, 매일 내 입맛을 살피며 커피를 내려주는 손길에서 행복의 의미를 기억해야겠다. 마음의 소리를 다 꺼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말하는 듯한 그의 투박한 눈빛 뒤에 남아있는 조용한 언어를 조금 더 읽어보려 한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라고 생각하며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부족함을 채우려 애쓰기보다 이미 가진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일, 그것이 앞으로 내가 더 연습해야 할 마음일지도 모른다. 내 방식대로의 아름다움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아도 작은 것들이 빛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 또한 사랑의 한 모습 아닐까.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했던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서로의 곁을 지켰기에 이 소풍이 외롭지 않았노라고, 함께여서 더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조용히 아름다운 마무리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경하 / 화가·수필가문예마당 마무리 연습 마무리 연습 시간 이야기 저녁 식사

2026.03.12. 21:2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향수

어제 늦은 귀가로 인해 숙소로 돌아 오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 보니 2시10분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6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누웠지만 잠은 깊이 들지 못했다. 글을 써서 보내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어 창문을 마주한 책상에 앉아 인사동의 밤 풍경을 바라 보고 있다. 간간히 빌딩의 불이 켜져 있지만 대부분 가로등을 제외하고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 펼쳐진 조계종 에서 잔잔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한밤중 들려오는 목탁소리는 왠지 내면의 깊은 성찰과 고뇌의 소리로 묻어난다. 어둠에 잠겨 있는 세상을 깨우고 있는 듯 마음 속을 파고 들어온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차로 이동하지 않고 걷기로 했다. 명동을 걸어 나와 종로 2가를 지나 내가 묵고 있는 인사동 NineTree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 직원이 커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육층 커피 라운지를 추천해줬다. 숙박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인사동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쪽으로 둥근 테이블들이 소파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취향대로 커피를 내려 창가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추억은 대학 2년에 불과했지만 50년 가까이 우정을 유지하게 된 이유는 그 기간 동안 서로의 머리 속에 각인되고 또 가슴에 담겨 지울 수 없었던 희노애락의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고작 2년이었잖아.”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래 그 2년 동안 쌓였던 시간과 추억들이 하나 둘 나오며 우리 이야기도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한 친구는 광화문 쪽으로, 두 친구는 다시 인사동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헤어졌다. 우리는 미로처럼 알 수 없는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들은 늘 행복으로만 점철된 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고난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리라. 모두들 잘 살았고, 충실히 제 갈을 걸었기에 오히려 어려움은 목표를 향한 디딤돌이 되었음에 틀림 없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와 만난 산골 마을 서산 여미리의 새벽은 아름답다 못해 한편의 시로 다가오고, 넓은 평붓으로 그려낸 수려한 그림 같이 담겨져왔다. 산 골마다 피어나는 산 안개는 오래된 동양화 한편을 감상하듯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300년 된 비루나무를 보러 가는 길가로 불그레 번지는 산등성이, 그 위로 하루가 밝아 오고, 황금 빛으로 익어가는 들판은 절로 정지용의 ‘향수’를 떠오르게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줄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돗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봄이 되면 노란 수선화가 산길을 덮고 가을엔 코스모스가 지천에 피어난 풍경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듯했다. 먼 산 틈을 비집고 동이 트고 있다. 붉게 타는 산 언덕을 걸으며 늘 그려왔던 마음의 고향을 마음껏 담아내고 있다. 가을은 깊어가는데 오랜 친구들의 눈망울도 깊이 붉어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향수 시간 이야기 커피 라운지 수선화가 산길

2022.10.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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