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추억의 수퍼블룸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 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디지털 스트리밍과 멀티플렉스가 지배하는 요즘, 단 하나의 스크린만 가진 오래된 영화관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유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LA 남쪽에 있는 ‘가디나 시네마(Gardena Cinema)’는 단순한 극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이곳은 1976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한인 이민 부부의 꿈이 담긴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놓은 딸 주디 김씨의 헌신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가디나 시네마의 시작은 주디씨의 어머니, 고 김수명 씨의 소박한 동경에서 비롯됐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던 시절, 극장을 운영하던 친구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공간’을 꿈꿨다고 합니다. 미국에 온 뒤 그녀는 남편 김수웅 씨와 함께 전 재산을 털어 이 영화관을 인수했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남편은 낮에는 극장 곳곳을 고치고 밤에는 영사실을 지키며 아내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갔습니다. 당시 가디나 시네마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가던 동네 극장이었습니다. 대형 체인 극장이 늘고 영화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작은 단관 극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김씨 부부에게 이 극장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삶의 자리였고, 성실한 노동으로 지켜낸 가족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민 1세대에게 비즈니스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습니다. 자부심이었고, 가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극장 매표소 직원의 무릎에 앉아 영화를 보며 자란 딸 주디씨 역시 그 시간을 잊지 못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부모님이 평생 지켜온 이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팬데믹의 위기와 대형 자본의 공세 속에서도 주디씨가 가디나 시네마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곳이 어머니의 마지막 꿈이었고,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지금도 티켓 부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디씨는 ‘프렌즈 오브 가디나 시네마(Friends of Gardena Cinema)’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극장 건물을 매입하고 보존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 이민 가족이 지역 사회에 남긴 문화적 자산을 공공의 기억으로 남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디나 시네마의 진짜 가치는 건물 자체보다 그 안에 쌓인 시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매표소와 마키 간판, 오래된 좌석과 카펫. 그 공간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이 극장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가디나 시네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가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요.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낡은 것’들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작은 제안을 하나 해봅니다. 요즘 남가주의 봄이 깊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사막의 수퍼블룸을 보러 먼 길을 떠납니다. 끝없이 펼쳐진 야생화를 보는 것도 물론 멋진 경험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삶과 연결된 ‘수퍼블룸’을 경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이번 주말, 혹은 가까운 시일 안에 이민 1세대 부모님의 거친 손을 잡고 가디나 시네마의 800석 객석 가운데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보는 건 어떨까요. 부모님에게는 젊은 시절 타국 땅에서 위로를 얻었던 기억이 떠오를 겁니다. 자녀 세대에게는 가족의 역사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크린 속엔 여러분만의 추억의 수퍼블룸이 펼쳐질 겁니다. 가디나 시네마는 오늘도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불빛은 척박한 이민 생활을 견디며 가족과 꿈을 지켜낸 이민 1세대의 기록이며, 그 정신을 이어가는 다음 세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강한길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수퍼블룸 추억 극장 건물 이민 가족 시절 극장
2026.03.15. 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