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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신년특집 Ⅱ 재산세 빼고 모든 게 다 오른다

2025년 시카고 예산안에 따라 각종 세금과 수수료가 오른다. 재산세 인상은 시의회 논의 과정에서 제외됐지만 그 외 오를 만한 것은 대부분 올라 주민들의 부담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지난 12월 16일 시카고 시의회에서 통과된 2025년도 예산안은 모두 171억달러 규모다. 브랜든 존슨 시장은 선거 캠페인 기간 도중 자신이 당선되면 재산세 인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2025년 예산안을 공개하면서 3억달러 규모의 재산세 인상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재산세 인상안이 시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인상 규모를 낮췄다가 아예 전면 철회했다. 대신 다른 세금 등을 올려 1억8100만 달러의 세수를 올리는 방안을 택했다.     올해 인상되는 각종 세금에는 소프트웨어 라이센스비가 포함됐다. 또 스트리밍 서비스나 케이블 TV 구독료에 부과되는 세금도 오른다. 소프트웨어 라이센스비의 경우 클라우드 서비스와 디지털 제품에 부과되는데 작년까지는 9%였다가 11%로 올랐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구글과 아마존, 세일스포스와 같은 거대 기업이 부담하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는 직접적인 영향을 느끼진 못한다. 대신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훌루, 스파티파이 등과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 세금은 작년까지 9%였다가 올해부터는 10.25%로 인상됐다. 이를 통해 시카고는 연간 1290만달러를 추가로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기업에 대한 일반 라이센스 조항 위반 벌금은 기존의 200달러~1000달러에서 400달러~5000달러로, 식품 도매 면허 비용은 660달러에서 1320달러로 2배 가량 각각 인상된다.   다운타운 주차 요금도 오른다. 다운타운 주차 거라지를 이용하거나 발레 파킹을 사용할 경우 기존에는 주중 22%, 주말 20%의 세금이 부과됐지만 올해부터는 주중과 주말 구분없이 일괄적으로 23.25%의 주차 세금이 부과된다. 우버나 리프트를 탈 경우에도 세금이 추가로 부과된다. 시카고 다운타운 센트럴 비즈니스 지역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 사이에 공유 차량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3달러의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비닐봉지나 종이봉지를 업소에서 구입할 때에도 작년까지는 7센트였지만 올해부터는 10센트를 내야 한다. 업소는 작년까지 봉지 하나당 2세트를 받았지만 올해부터는 1센트만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일부 거주 지역 차량 소유주들이 내야 하는 거주자 우선 주차 패스 비용도 5달러가 올랐다. 거주자 우선 주차 패스는 시간에 상관없이 항상 주차를 할 수 있는 패스로 시카고 시티 스티커와 함께 부착해야 불법 주차 과태료를 피할 수 있다. 내년에도 추가로 5달러가    또 오를 예정이다. 이 패스를 다시 발급받거나 지역을 변경할 경우에도 기존에는 5달러만 내면 됐지만 올해부터는 20달러를 납부해야 한다. 아울러 방문자를 위한 패스도 15장에 8달러에서 15달러로 올랐다.   이밖에도 더 많은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 수익을 늘린다는 복안이다.     이에 대해 시카고 34지구 시의원 빌 콘웨이는 "존슨의 예산안은 결국 가장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 가족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이고, 이 같은 균형의 예산안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존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인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존슨측의 이같은 세금과 수수료 인상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인 이들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는 "역진적"(regressive)이라는 평가다   Nathan Park•Kevin Rho 기자신년특집 재산세 재산세 인상안 주차 세금 시카고 예산안

2025.01.0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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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직원들과 상생" 1988년 무진년 창업 한남체인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지난 1988년 무진년 6월 17일 LA한인타운 올림픽과 베렌도에 첫 매장을 오픈한 한남체인은 남가주 곳곳에 있는 매장들을 통해 한인 커뮤니티의 경제적 구심점이자 한인상권 확장의 선구 역할을 해 왔다.   올해로 창립 36주년을 맞은 한남체인의 창립 모토는 한국과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남가주 지역의 한인들에게 언제나 반가운 고국의 정취, 고향의 참맛을 전해주고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1호점 오픈 이래 한인마켓을 운영하기에는 거주 한인수가 적은 지역 공략에 나서 1993년 토런스점에 이어 1998년 부에나파크점, 2001년에는 다이아몬드바점을 오픈했다.     개장 초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마켓 입점 영향으로 주변에 한인상가, 업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결국 한인 인구 유입과 함께 한인상권 확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2007년에는 한인 인구가 급증하던 랜초쿠카몽가에 매장을 오픈했으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경기침체로 한인들이 급감하면서 폐점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2009년에는 뉴저지점을 오픈하면서 동부지역에 진출했으며 2012년에는 오렌지카운티 첫 매장인 라팔마점을 개장했다.     2022년에는 토런스에 델아모점을 오픈함으로써 매장수가 7개로 늘어났다.   한남체인 구정완 사장은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한남체인이 한인상권 확대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자랑스러운 발자취”라고 말했다.   매장 확장과 함께 직원 수도 크게 늘어 첫해 80여명에서 현재 500여명으로 500%가 넘게 늘었으며 취급 제품수도 1만5000여개에서 2만5000개로 67% 증가했다.   이 같은 성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구 사장에 따르면 창업자 하기환 회장이 가장 중시하는 덕목인 ‘정직’을 바탕으로 ‘정직한 마켓,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는 마켓, 고향 같은 마켓’을 추구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구 사장은 “한인 커뮤니티의 경제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대표 마켓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벤더와 홀세일러와의 상생경영을 바탕으로 임직원 모두가 경영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매진하고 있다”면서 “마켓의 지속성장을 통해 커뮤니티 발전에도 기여하고 나아가 주류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마켓으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내실을 다지고 있다”고 밝혔다.   직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남체인이 있을 수 있었다고 강조한 구 사장은 “한남체인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오너가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다. 10년 이상 장기 근속하는 직원 비율이 타업체들에 비해 월등히 많을 정도로 우리 직원들의 주인의식은 업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일터 분위기가 좋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구 사장은 올해 용띠해 목표에 대해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고객 중심의 마켓으로 직원이 신명나게 일 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힘쓰겠다”면서 한인들의 꾸준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했다. 박낙희 기자고객중심마켓 구심점 한인상권 확장 한인 커뮤니티 한인상권 확대 한남체인 하기환 신년특집 용띠해 창업 무진년 장수 기업

2023.12.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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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된 원스톱 서비스" 1976년 병진년 창업 한스전자

LA한인타운 유일의 가전제품 전문매장 한스전자의 한재민 대표에게 갑진년 새해 벽두는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스전자가 지난 1976년 병진년 용띠해에 창립된 것은 물론 한 대표도 1940년 용띠해인 경진년생으로 올해 용띠해를 맞이한 것. 십이지신 가운데 용은 건강, 정직, 신뢰를 상징하며 용꿈은 태몽으로는 최고이자 돼지꿈과 함께 길몽으로 간주된다.   올해로 창립 48주년을 맞은 한스전자가 남가주 한인들에게 가전제품 전문점으로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정직과 신용’을 경영 철학으로 고수하고 있는 한 대표의 신념에 있다.   급변하는 LA 한인타운에서 50년 가까이 가전제품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대표의 전문성과 사업 노하우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 제대 후 전자제품 회사에 다녔던 한 대표는 1969년 캐나다 이민 길에 올라 냉동 냉장 기술을 배우고 1972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의 높은 물가와 복잡한 생활에 지친 한 대표는 여동생이 거주하는 LA로 와 에어컨 회사에서 근무하며 중고 냉장고 매매에도 나섰다.     한 대표는 “1976년 올림픽가에서 개업하고 냉장고 수리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잘돼 냉장고, 세탁기 등 부피가 큰 제품들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1979년에 현재 2만5000스퀘어피트 규모의 웨스턴 건물로 확장 이전했다”고 밝혔다.   한인타운서 냉장고, 세탁기 전문매장으로 입지를 굳혀가던 한스전자는 TV 등을 앞세운 가전제품 전문매장들이 속속 오픈하며 경쟁이 불가피하게 됐다.   한 대표는 “업체들이 우후죽순 난립하며 15곳으로 늘었다. 잦은 개업, 폐업 세일 여파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 고생하기도 했다. 특히 지점망을 갖춘 대형 업체의 공세가 있을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업체들이 파산하면서 사라져 현재는 한스전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온라인 쇼핑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베스트바이, 코스트코, 홈디포, 아마존과 경쟁하고 있지만 한 대표는 한스전자만의 고객서비스를 내세워 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 대표는 “가격과 환불을 앞세운 대형업체들을 통해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 가전제품을 한 번이라도 구매해본 고객들이 배달비, 설치비, 설치부품비, 인건비 등 명목으로 비용이 추가되는 데다가 배송도 수주가 걸린다면서 우리 매장을 찾는다”면서 “경쟁력 있는 가격뿐만 아니라 구매부터 무료 배송, 무료 설치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앞세워 고객들에게 만족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대형업체들의 경우 전시모델 외에 재고가 없어 당일 구매가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한스전자는 1만5000스퀘어피트의 창고에 다양하고 충분한 재고를 보유하고 있어 고객이 필요할 때 바로 제품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한스전자가 있게 된 것은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남다른 고객 서비스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한 대표는 “지금까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한인 고객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덕분에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용띠해를 맞아 한인들의 건강과 힘찬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는 한 대표는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에 힘쓰겠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말을 맺었다. 박낙희 기자병진년 병진년 용띠해 la한인타운 유일 용띠 한스전자 가전 전문점 신년특집 가전제품 용띠해 창립 장수 기업

2023.12.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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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그리며 지원한 독립운동이 이민사 뿌리

한국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미주 지역에 지정된 한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는 하와이, 쿠바를 포함해 92곳이다. 이중 캘리포니아주는 북가주와 남가주로 나뉜다. 북가주에는 초창기 한인들이 모여 활동하던 샌프란시스코, 다뉴바와리들리를 중점으로 몰려 있으며, 남가주에는 한인타운을 형성한 LA와 리버사이드에 있다.     ▶북가주   2006년 발행된 독립기념관 매거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1905년 4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회관 자리,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의거지인 페어몬트 호텔, 페리 부두,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공동체였던 상향한인감리교회,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장을 역임한 이대위가 묻혀 있는 사이프리스 공동묘지가 유적지로 꼽힌다. 그러나 현재 한인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고 있는 유적지는 한 곳도 없다.     상항한인감리교회의 경우 현재 중국 절이 운영 중이다. 한인이 운영하는 한인역사박물관이 있으나 유적지는 아니라 커뮤니티의 관심이 덜한 편이다.     ▶남가주   남가주의 경우 남아있는 유적지도 있고 보존 운동도 활발하다. 지난해 한인사회에 유적지 보존 운동이 일어난 LA흥사단 옛 건물이 좋은 예다.     지난해 흥사단 옛 단소 건물(3421-3423 S. Catalina Street)이 헐리고 재개발된다는 소식이 나온 후 LA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등이 나서서 사적지 지정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LA시 문화사적위원회도 한인 커뮤니티의 요청에 수차례 공청회를 열고 커뮤니티 의견을 수렴했으나 아직 사적지 지정 여부는 결정하지 않았다.   현재 가장 보존이 잘 돼 있는 곳은 도산 안창호의 가족이 살던 주택이다. 이 집은 1937년부터 46년까지 도산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부인 이혜련 여사와 자녀(안필립, 안수산, 안수라, 안필영)들이 살며 당시 한인사회의 커뮤니티 구심점이 된 곳이다.   1920년대 지어진 이 가옥은 미국의 전형적인 정사각형 단독 주택으로, 원래는 USC 주차장이 위치한 37가에 있었으나 이 지역에 재개발이 진행되자 USC는 지반을 통째로 떼어내 캠퍼스 안으로 이전시켰다.     2004년 도산 가옥을 옮긴 USC는 이후 동문과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1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도산 가옥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해왔으며 2009년부터 이곳을 한국학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옥은 2014년 LA시 사적지로 지정됐다.   사적지 보전이 잘 돼 있는 또 다른 곳으로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을 꼽을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성립된 해외 한인 독립운동 최고기관이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1번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로 꼽히는 만큼 관련 자료도 굉장히 방대하다.     제퍼슨 가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총회관은1938년 신축된 건물이다. 지난 2003년 처음으로 복원 공사를 한 후 20년 만인 지난해 말 재단장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자동으로 미주 한인사와독립사를 보여주는 최첨단 전시 시설을 설치해 한인 2~3세들의 역사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3년 첫 복원 공사를 진행한 대한인국민회는 당시 미주 한인 독립사와 이민사 관련 각종 자료와 유물을 천장에서 발견한 바 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2004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 발족했으며 이후 재단이 자료 및 전시관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다. 당시 발견된 자료는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되기 전인 1900년대 초반부터 해방 이후까지 생산된 문서들로 문건류 6300여점, 도서 및 각종 물품 400여점이다. 이 가운데에는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 저격 사건에 따른 변호사 비용 모금 내용 공립신문, 신한민보 원본 및 축쇄본 1930, 40년대 국민회 각 지방 공문 등이 포함돼 있다. 기념재단은 발견된 자료를 USC에서 디지털 작업을 한 후 한국 독립기념관에 관리 및 보존을 위해 이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옆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도 역사적인 곳이다. 1938년 신축된 이 건물은 미주 한인 기독교사를 보여주는 유적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최근 새롭게 유적지로 등장한 곳은 한인사회의 첫 타운으로 평가받고 있는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다. 파차파 캠프는 도산 선생과 한인 초기 이민자들이 세운 첫 코리아타운으로 대부분 농업 노동자들인 이들이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일궜던 커뮤니티다. 당시 지역 신문 등에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도산 선생은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쓰고 추방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한인들과 살았다.   총 300여 명의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살았지만 1913년 남가주에 들이닥친 한파로 오렌지 농사가 망하자 한인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파차파 캠프도 사라졌다.     파차파 캠프는 2012년 당시 UCR 한인 학생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인 임시 거주지’라고 적힌 오래된 지도를 시작으로 지역사회와 한인사회에 남겨진 기록을 파헤치고 연구한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장 교수는 “중가주의 다뉴바, 리들리, 윌로우로부터 이주해온 한인들의 중심지로 이후 한인 이민 선조들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또한 국민회의 중요 회의가 개최됐던 중심지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장연화 기자신년특집 사적지 미주 상향한인감리교회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한인 독립운동

2023.01.0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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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 딛고 이룩한 빛나는 발자취

가난과 망국·전쟁 때문에 정든 땅을 떠나 낯선 땅을 찾은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년을 맞는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인들이 있기까지 그 여정은 혹독했지만, 도전과 성취로 가득했다.       한 세기 전 선배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서     1902년 12월 22일. 살을 에는 엄동의 날씨였다. 인천항 항구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벽보에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배만 곯지 않는다면 족했다.       가슴 속 뜨거운 희망을 가지고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에 오른 122명. 경유지인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약 20일만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대한민국 최초 공식 이민자들이다.         ▶혹독했던 하와이의 삶   1903년 1월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는 65편의 배를 이용해 7800여 명의 한인 노동자가 도착했다. 이들은 하와이 전역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흩어져 일했다.       이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다. 당시 일당은 69센트. 무더운 태양 아래서 사탕수수와 에네켄(용설란 일종)을 수확하며 온몸이 찢겼다. 허리가 아파 잠시 일어서면 말을 탄 감독이 가죽 채찍을 내리쳤다.     언어 문화 차이는 고통을 더했다. 한 예로 영어를 못해 달걀이라도 사려고 하면 식료품점에서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암탉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를 내야 하기도 했다.       하와이 노동자들 가운데 2000여 명은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지로 재이주했다. 1000여 명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편 찾아온 ‘사진 신부’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사진 신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한국의 중매쟁이가 건넨 사진만 보고 남편을 찾아 하와이로 온 여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다.     현지 환경은 열악했고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다. 사진 속 저택은 온데간데없고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인 여성들은 이내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녀를 키워냈다. 가정들이 이루어지면서 한인사회는 비로소 공동체를 형성했다.   ▶새로운 이민 물결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당시 존 F.케네디 대통령은 유럽인으로 편중된 이민법을 개혁해 아시안에 대한 이민 제한을 제거했다. 실제로 1940년 센서스 당시 전국 한인은 8570명에 불과했으나 80년에 들어서 35만4593명으로 거의 40배가 급증했다.     특히 70년대 들어 한국인들의 집단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몇십 달러만 가지고 맨땅에서부터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대한항공이 정기 노선을 개설한 것도 1972년이었다.     한인 이민이 정점을 찍은 것은 1985~1987년대. 연간 3만5000여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향했고,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에 이은 3대 이민국이 되기도 했다.     ▶LA한인타운의 조성     1930년대에는 약 650명의 한국인이 LA에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야채와 과일 배급에 중점을 둔 비즈니스를 뒀고 교회, 식당 및 지역 사회 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인종 계약법과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지역적으로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가파른 경제 쇠퇴를 기점으로 빈 상업 공간과 사무실 공간이 넘쳐났고 이는 부유한 한국 이민자들을 끌어들였다.     1967년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에 한인식당 2개와 한인마켓 2개가 생겼다. 1970년에는 미국에서 가발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발업 종사하는 한인들이 상당한 돈을 벌며 모여들었고, 1973년에는 석유파동을 계기로 주유소를 차려 크게 번창하기도 했으며 또 한인 노동력을 모아 일을 하는 청소업도 유행했다.   1970년대 후반, 올림픽 대로와 8가 지역 대부분의 업체는 한인들의 소유였다.  경제 호황은 한인 언론 매체와 지역 사회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인들의 정체성을 굳히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주민들은 1982년에 첫 번째 한인타운 사인을 설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로비했다. 이는 현재 2.7 스퀘어 마일의 한인타운 공식 구획이 지정(2010년)되는데 시발점이 됐다.     ▶높아지는 한인들 위상   센서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인 인구는 192만6508명이다. 20년 전인 2000년 기준 107만6,872명보다 78%가 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 중 80%가 10년 이상 미국에 거주한 경우였다.   한인 가구의 중간 소득은 7만 2200달러였고, 한인 2세 가구의 중간소득은 8만 8100달러였다. 한인 인구 중 빈곤 계층에 속하는 인구는 전체의 11%로 한인 2세만 살펴볼 경우 빈곤계층이 전체의 9%였다.         지난 2012년 기준 전국의 한인 업체 수도 22만4891개로, 매출만 1078억1323달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한인 사업체는 중국계 52만8702개, 베트남계 31만864개 다음으로 세 번째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계는 물론 재계와 문화계 등 다양한 한인 리더들이 곳곳에 포진해 한인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 문화 콘텐츠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 사로잡고 있으며 K팝으로 시작된 미국 내 한류 열풍은 한국문화와 한국상품 등 한국 자체를 동경하고 선호하는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장수아 기자신년특집 이민역사 한인 노동자 한인 역사 미주 한인

2023.01.0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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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갈등 없는 사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 카니 정 조 AAAJ-LA 대표

 "새해에도 한인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이 사회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일하겠습니다."   아태정의진흥협회(AAAJ) LA지부의 카니 정 조 대표는 무엇보다 "2022년은 LA폭동 30주년을 맞는다. 다음 세대를 위해 인종 갈등 없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AAAJ는 미국의 아태계 시민들을 위한 법률 서비스와 권익옹호를 위해 활동하는 미국 내 최대 아태 비영리 법률 서비스 단체다. LA 외에 워싱턴DC 시카고 애틀랜타에서 아시안 이민자들을 돕는다. LA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주거권센터(Housing Rights Center) 일리노이 시카고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서 공공 서비스 업무를 담당하며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지난 2009년부터 11년 동안 이끌던 LA한인가정상담소(KFAM)를 떠나 지난해 7월 AAAJ-LA지부 대표로 부임한 정 대표는 그동안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범죄 대책과 예방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팬데믹으로 퇴거 위기에 놓인 세입자들을 지원하는 일 등을 진두지휘했다. 무엇보다 지난 1년간 LA한인타운 선거구 단일화를 위해 전담 스태프를 두고 선거구 재조정위원회에 제출할 지도를 그리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사회정의운동에 주목하고 대비하고 있다.     정 대표는 "흑백운동이 주를 이뤘던 1960년대 민권운동과 달리 앞으로 전개될 사회정의운동은 아시아계와 라틴계를 포함한 유색인종과 시니어 여성 성소수계 이슈까지 포함된 총천연색이 될 것"이라며 "때문에 소수계를 위한 법률 서비스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커뮤니티의 요구가 충족되도록 주 및 연방 차원의 정책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또한 다른 단체들과 다문화 연합을 구축해 더 공평한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장연화 기자신년특집 la대표

2021.12.3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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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한인 입양인 연결고리" 팟캐스트 '잔치쇼' 네이튼 노와크ㆍ패트릭 암스트롱ㆍKJ 렐키이

입양아 출신의 한인 호스트 3명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잔치쇼(Janchi Show)'는 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여 만 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을 아니 전세계에 있는 20여 만 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을 이어주는 새로운 매체다.   네이튼 노와크 패트릭 암스트롱 KJ 렐키이는 각자 성장 배경이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매주 방송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는 한국인 입양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각자 그리워하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한국 문화를 쇼 이름처럼 '신나게' 소개한다.   때로는 친부모를 만나며 겪은 아픈 기억을 때로는 한인 1세들과 교류하면서 느낀 외로움과 소외감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유난히 좋아하고 맛있었던 한식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들은 다르지만 비슷한 '한국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끈끈한 정을 교류하고 자긍심도 찾는다.   이 쇼의 출발은 총괄 프로듀서인 제리 원씨다. '디어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팟캐스트를 만든 원씨는 친구인 네이튼씨를 지켜보면서 "한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인 입양아들에 대한 문화를 오픈하고 싶어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게스트로 참여할 수 있다는 KJ와 패트릭을 만나 출발한 잔치쇼는 벌써 에피소드만 90회를 넘겼다.   "우리의 방송을 듣고 입양인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패트릭씨는 미국에 어릴 때 입양됐다가 시민권을 얻지 못한 한인 등을 구제하기 위한 입양인 시민권 법안 통과를 위해 지원할 계획이다.   친부를 만나면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느꼈다는 네이튼씨는 새롭게 이주한 콜로라도에서 개인 비즈니스 운영에 집중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보겠단다.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입양 이야기를 알리고 있는 KJ는 "한국어를 더 공부하고 싶다. 벌써 8번째인 것 같지만 한국어 수업 수강을 다시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누군가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한국어를 몰라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인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입양인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또 잔치쇼가 오랫동안 계속돼 입양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장연화 기자신년특집 잔치쇼

2021.12.3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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