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로 세상 읽기]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惡)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일은 언제나 가장 경건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이것은 역사의 경고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다. 인류가 선과 악을 처음 신학의 언어로 갈라놓은 것은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였다.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의 신 아흐리만, 그 사이에서 인간은 반드시 한편을 선택해야 한다. 이 이원론은 강력하다.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적을 선명하게 만들며, 자신의 편에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강력함 때문에 역사상 가장 끔찍한 악은 언제나 이 문법을 빌려 자신을 신성하게 포장했다. 히틀러는 이 점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신이 우리와 함께(Gott mit uns)’를 군인들의 혁대에 새기고 아리아인을 빛의 편에, 유대인을 어둠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더 노골적인 것은 “하일 히틀러(Heil Hitler)”였다. ‘하일(Heil)’은 독일어로 구원을 뜻한다. 예배에서 “주께 구원을(Heil dem Herrn)”이라 노래하던 바로 그 단어가 히틀러를 향한 경례 구호가 됐다. 군중은 예배의 문법으로 인간을 경배하고 있었다. 루터의 언어가 나치의 언어가 된 것처럼, 신성한 어휘가 인종적 증오의 포장지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문법은 죽지 않았다. 2020년과 2024년 미국 대선 당시 플로리다와 텍사스의 대형 복음주의 교회들은 특정 후보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선포했고, 이는 한인 교회 강단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단순한 위선자로 보는 것은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진짜다. 가정이 무너지고, 아이들이 이념의 실험 대상이 되고, 교회가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 자신이 스승으로 삼는 프란시스 쉐퍼가 일찍이 경고했던 “기독교 문명의 붕괴”가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 믿음 위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찾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신앙적 반응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두려움이 클수록 구원자를 향한 갈망은 더 커지고, 그 갈망이 클수록 구원자의 결함을 보는 눈은 더 좁아진다. 신앙이 분별력을 낳아야 할 자리에서, 두려움이 맹목을 낳는다. 그리고 그 맹목 위에서 예수의 이름은 가장 크게 울리고, 예수의 복음은 가장 조용히 배반당한다. 예수는 경고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양의 옷이란 나쁜 의도가 아니다. 가장 선한 의도, 가장 확신에 찬 신앙이다. 라인홀드 니버가 경고했듯, ‘집단적 자기 의(collective self-righteousness)’는 개인의 죄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것은 양심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이 빛의 편이라는 확신이 깊을수록, 그 확신이 만들어내는 폭력은 더 순수해진다. 신앙의 분별력이란 이것을 아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가르기 전에 나 자신이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묻는 용기다. 그 용기는 자신의 공동체에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질문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금 당신이 속한 공동체는 신앙적 의심을 환영하는가, 아니면 침묵을 요구하는가. 그 질문의 답이, 그 공동체가 예수를 따르는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지를 가르는 가장 정직한 시금석이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 읽기 이름 신의 이름 하일 히틀러 신앙적 의심
2026.05.19.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