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귀(牛耳) 신영복(1941-2016) 선생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직접 모시고 배운 것은 아니고 책을 통해 얻은 가르침들이지만,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즐겁게 공부했다. 동서고금의 고전을 넘나드는 그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가르침들은 은근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향기롭게 농익은 삶의 지혜들…. 신영복 선생의 10주기를 맞으며 선생의 책들을 찾아 다시 읽었다. 첫 책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부터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달린 〈담론〉까지. 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스승’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 전달한 지식인’ 등의 칭송을 새삼 실감했다. 선생의 책들은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참 선비의 글이다. 선생께서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 공부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신영복 사상의 핵심은 쇠귀체, 민중체 등으로 불리는 붓글씨 작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처음처럼, 손잡고 더불어,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누구나 꽃, 더불어 숲,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등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말씀들…. 신영복 선생의 많은 가르침 중 내가 개인적으로 특히 마음에 새긴 것은, 통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 아름다움(美)에 대한 해석, 변방에 대한 애정 등이다. 선생께서는 통일(統一)보다 먼저 통일(通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자의 화동(和同) 담론을 한반도 통일론에 적용한 말씀이다. “정치적 통일(統一)이 아니라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화화(和化)로서의 통일(通一)이 돼야 한다, 억지로 하나가 되기보다 통일(通一)에서 통일(統一)로 가는 과정을 지혜롭게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은 한민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했다.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술 이론을 공부하는 나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신영복 선생의 해석은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었다. 美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양(羊)이 크다(大)는 말이 된다. 양을 중요한 양식으로 삼는 유목민들에게 양이 큰 것은 곧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이다. 삶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아주 적확하게 일러주는 말씀이며, 삶과 동떨어져 혼자 우쭐대는 예술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변방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의 변방을 찾아다니고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문명은 늘 버려진 땅 변방에서 일어나 꽃 피웠다는 성찰이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이지만, 변방은 늘 새롭게 열릴 가능성으로 가득한 역동의 땅이라는 가르침이다. 디아스포라의 가능성과 저력에 주목하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것이 K자를 달고 세계 구석구석으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는 현실에서 신영복 선생의 변방 사랑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제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 한 귀퉁이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해외동포인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미국의 한인사회는 그동안 변두리 변방으로 푸대접받아 왔지만, 실은 세계무대를 향한 가장 앞자리에 있는 ‘전진기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자각과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할 때다. 그 큰 책무를 제대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지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가르침 스승 한반도 통일론 신영복 선생 정치적 통일
2026.01.22. 19:19
‘만약 이민을 오지 않고 한국에 그냥 살았다면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이 탓일까? 그렇다고 이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타향살이의 아쉬움이야 많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현실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그래도 가끔 고국 생각에 잠기는 것은 향기로운 참사람, 스승의 짙은 그림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해온 큰 어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한층 간절해진다.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 만사 답사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 많이 부러웠다. 이 책에는 저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어른들, 짙은 우정을 나눈 벗들과 예술가 등 사람에 대한 진득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스승으로는 리영희, 백기완, 신영복, 통문관 옛 주인 이겸로 선생들과의 인연과 존경심을 이야기했고, 몸이 자연과 합일(合一)하는 ‘자연춤’을 꿈꾼 춤꾼 이애주, 광주 민주화운동의 대들보 박형섭, 똘레랑스를 역설한 언론인 홍세화, 가수 김민기 등의 친구들과 나눈 진한 우정과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화가 신학철, 민중미술의 전설이 된 판화가 오윤, 김지하 시인, 서예가 김가진 같은 예술가들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진면목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한국 3대 구라’로 불리는 이름난 글쟁이답게 유홍준의 글은 맛깔스럽다. 얼핏 보기엔 사사로운 사연이나 일상사를 자분자분 이야기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삶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이영희 선생의 주례사, 우리의 구전 민중설화를 순우리말 토속어로 이야기한 작품을 통해서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매진해온 백기완 선생, 개성적인 ‘어깨동무체’를 개발한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빼어난 시인이자 훌륭한 현대 문인화가 김지하 시인의 49제와 그림 이야기, 김민기를 보낼 때 가족의 요청에 따라 영결식 없는 조용한 분위기의 가족장으로 치러진 것에 대한 아쉬움 등…. 만약 한국에 그냥 살며 활동했다면, 나도 큰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람답게 사는 지혜를 배우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속 깊은 친구나 동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멋진 친구로 지냈을 법한 인물들도 많다. 사실,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일은 글이나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대하고 모실 때처럼 절실하게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우리 삶에서는 아주 사사롭고 작은 일에도 커다란 울림이 있는 법이다. 우리가 목말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삶의 지혜다. 지식이라면 컴퓨터나 인공지능으로 넘쳐날 정도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나 정보는 건조하다. 그래서 생생하고 따스한 깨우침을 주시는 스승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유홍준처럼 스승님을 가까이 모시고 체온과 숨결을 느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스승을 찾아 모시기라도 해야…. 나는 그런 목마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배울 점이 있는 분을 내 멋대로 스승으로 모시는 길을 택했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화를 통해 예술가의 자세나 인생의 철학을 배우는 식이다.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여쭙고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안타까움은 크지만, 그래도 큰 공부가 된다. 마음을 열고 살피면 스승은 우리 인생 도처에 계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유홍준 그림 이야기 신영복 선생 백기완 선생
2024.11.28.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