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수많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전국 42개 주에 900개 이상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거리가 있다고 한다. 특히 조지아, 미시시피, 텍사스,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등 흑인 밀집 거주 지역에 많다. LA에도 흑인 주민이 많은 사우스 센트럴 지역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대로가 있다. 일부러 흑인 밀집 지역을 표시해 놓은 것처럼 전국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거리에는 흑인들이 많이 산다. 전국에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25곳의 기념관과 박물관이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4월 4일 3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테네시주 멤피스시의 로레인 모텔 박물관을 관람했다. 로레인 모텔은 국립 인권 박물관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1991년 7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흑인 무장 경비원들이 몸수색을 하고 금속탐지기도 지나야 했다. 엄격하기가 국가기관 보안시설이나 테러 위험지역과도 같았다. 16달러의 입장료를 받는 박물관은 흑인인권과 관련된 박물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킹 목사 자료사진과 동영상을 볼 수 있었다. 입구 왼쪽으로 상설전시장이 있고 오른쪽 입구에는 간략한 미국 흑인역사를 모형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2층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흑인인권운동 자료가 있다. 2층 전시실을 통과하면 킹 목사가 묵었던 306호실 내부와 그가 저격당했던 2층 발코니를 유리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306호실 복도를 빠져나오면 바로 선물가게가 있었다. 역사적 장소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놨지만 전시물은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고 빈약했다. 상업적인 곳으로 변질돼 입장료도 비쌌다. 국립 인권 박물관은 모텔 밖에서 306호를 올려다 보는 풍경이 전부인 곳이다. 킹 목사의 암살은 케네디, 링컨, 말콤 엑스의 죽음처럼 많은 의혹이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정말 제임스 얼 레이가 죽였을까? 얼 레이의 단독 범행일까? CNN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킹 목사의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얼 레이의 단독범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부추기는 것을 우려한 국가기관 등이 연루된 음모라는 것이다. 킹 목사는 1964년 35세의 나이로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흑인인권운동을 확산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킹 목사는 1967년 4월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베트남전 반전 연설을 시작했다. 백인과 흑인간의 빈부격차를 없애 경제평등을 실현하려는 자본주의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고 1963년 워싱턴 민권 대행진을 능가하는 또 하나의 대행진을 추진하고 있었다. 킹 목사는 베트남전 반대 연설을 시작한 지 꼭 1년 뒤인 1968년 4월4일 흑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멤피스에 왔다 머물고 있던 모텔에서 암살당했다. 정부는 2029년 킹 목사 암살 관련 FBI 수사기록 등을 공개할 예정이다. 하지만 2017년 10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기록 공개를 FBI와 CIA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얼버무린 것처럼 전면공개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케네디 형제, 킹 목사 등 암살사건의 진실이 역사에 바르게 쓰여질 때 진정한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6.12. 19:34
이민 수속 중이던 1992년에 LA폭동이 일어났다. CNN뉴스 화면에 비친 불타는 LA와 한인상점을 약탈하는 흑인과 히스패닉들, 백인 트럭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려 죽을 만큼 구타하던 흑인들. 모든게 지옥처럼 보였다. 전쟁터 같은 무법천지에서 가족을 보호하며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취업이민 미국행을 강행했다. 우리 식구는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된 1993년에 미국에 발을 내디뎠다. 그 당시 미국 경제는 화창한 LA 날씨와는 반대였다. 집값은 폭락해 있었고 장사가 시원치 않은 한인들은 집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빌 클린턴은 최저 실업률, 2000만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정부를 흑자로 돌려놓는 등 눈부신 경제성과를 일궈냈다. 클린턴은 성공적인 재임기간을 지냈지만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재임 때부터 12년간 혼외정사를 했다는 제니퍼 플라워스, 주지사 시절 호텔에서 성관계를 강요했다고 폭로한 폴라 존스, 학창시절부터 성관계를 가졌던 아칸소 변호사 카일 브라우닝, 백악관 비서 출신으로 성적 구애를 받았던 캐슬린 윌리, 1982년 미스 아메리카 엘리자베스 워드 등과 염문을 뿌렸다. 특히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은 클린턴을 탄핵 일보직전까지 몰고갔다. 르윈스키는 클린턴과의 관계와 위증사실을 동료직원 린다 트립에게 고백했다. 린다 트립은 클린턴의 부동산 사기사건 관련설을 수사 중인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에게 대화록을 전달했다. 케네스 스타 검사는 1998년 9월11일 클린턴 성추문 조사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클린턴을 발가벗긴 성추문 조사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445페이지 보고서는 95년말부터 97년 중반까지 백악관 집무실 서재나 욕실, 복도 등에서 10차례 이상의 신체적 접촉과 12차례의 성적인 대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성적인'이라는 형용사가 460번 사용됐다. 전세계인을 당황하게 만든 시가(담배)는 23번이나 나왔고 사랑이라는 말은 18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의 보도가 적나라하고 충격적이어서 애들이 TV를 볼까봐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클린턴은 1998년 8월 19일 대국민 사과를 하고 99년 2월 12일 탄핵동의안이 부결돼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요즘 전 세계는 성적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한창이다. 할리우드 제작자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영화계에서 시작된 폭로는 정계, 경제계, 언론계, 스포츠계까지 빠르게 확산됐다. 2016년 대선 당시 성인 영화배우 겸 감독인 제시카 드레이크, 요가 강사인 카레나 버지니아, 사진작가인 크리스틴 앤더슨 등 11명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로이 무어 앨라배마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의 성추행 사건은 미국의 국가적 망신을 초래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상대 성적학대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놀랍다. 아칸소주 리틀록은 클린턴의 고향이다. 이 곳에 있는 클린턴 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에는 온통 클린턴 재임 시 치적으로 장식돼 있었다.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의 백악관 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방을 관람했다. 만약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더라면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부도적 행태와 성희롱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6.05. 20:26
지난해 여름 알래스카를 육로로 올라가기 위한 출발지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했다. RV를 운전해 알래스카로 가는 여정은 캐나다 북부 내륙지방의 전설적인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지나야 하는 먼길이다. 알래스카 RV 여행은 모험가들이 꿈꾸는 최고의 여행이다. RV는 거주하면서 이동하는 차로 살림도구를 장착하고 다니느라 무겁고 제약이 많다. 직접 RV를 운전해 육로를 통해 알래스카를 다녀온 경험자의 조언이 절대적인데 중앙일보 밴쿠버 지사의 후배를 통해 수소문을 해도 만날 수 없었다. 캐나다 북극지방으로 가는 거점 도시인 프린스 조지를 경유해 알래스카 도슨 크릭까지 노던로키산맥을 넘어 운전했다. 500마일의 대장정이었다. 노던로키산맥을 넘는 산길도 만만치 않았지만 오지에서도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경이로웠다. 밴쿠버에서 출발한 지 이틀 만에 도슨 크릭에 도착했다. 관광 안내소를 찾아 정보를 받았다. 캠핑장도 마땅치 않고 비싸 도슨 크릭 월마트를 찾았다. 여행지의 월마트는 RV차의 밤샘주차를 허용하는 곳이 꽤 있다. 알래스카에서 들어오는 RV여행객들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많은 RV들이 드라이 캠핑을 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델타 정션까지 1680마일 알래스카 하이웨이 구간의 캠핑장 현황, 주유소, 도로상태 등 생생한 정보를 얻고 궁금증을 해결했다. 내가 살던 캘리포니아 벤투라 카운티나 LA 등 대도시에는 월마트가 많지 않다. 사실 RV 여행을 하기 전에는 월마트에 들어가 본적이 없어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미국 전국 시골, 중소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니 곳곳에 백화점식 월마트가 있었다. 지금도 장거리 이동을 하고 다음날 일찍 다시 이동을 해야 할 때면 월마트를 찾아 캠핑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행에 필요한 음식이나 캠핌용품 등 구입하기 쉬워 자주 들르는 장소가 됐다. 지난달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출발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고향 아칸소주 리틀락으로 가는 길에 월마트 박물관이 있는 벤톤빌을 경유했다. 사실 이곳은 대중적인 여행코스가 아니라서 마음먹지 않으면 가기 쉽지 않은 곳이다. 인구 5000 명의 벤톤빌에는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고 월마트에 납품하는 대기업들의 간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벤톤빌은 세계최대 공룡기업 월마트를 위한 도시였다. 1962년 월마트 창업자 샘 월턴은 아칸소 주 뉴포트에서 잡화점을 시작했다. 지금의 벤톤빌로 옮겨 가게를 키워 오늘의 월마트를 만들었다. 월마트 1호점이었던 곳에는 박물관이 있고 1990년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기업의 발전상과 창업자 샘 윌턴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기념관 형식이다. 월마트는 저가 전략으로 저소득층 소비자들로부터의 매출에 의존하면서 낮은 마진과 저비용을 장점으로 한다. 하지만 부담요인들이 종업원에 돌아가는 구조와 공급업체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이 비판을 받고 있고 주변의 작은 비즈니스를 죽이는 좋지 않은 기업 이미지도 있다. 월마트는 아마존의 영향으로 인터넷 판매를 강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RV로 미국여행을 하면서 월마트에서 신세를 져야할 것 같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5.29. 18:04
몇 년간 남침 준비를 하고 있던 김일성이 1950년 4월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얻어냈다. 스탈린은 핵실험 성공으로 자신감이 생긴 상태에서 미국의 전쟁개입 가능성이 적다 판단하고 남침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공산정부를 세운 모택동에게도 동의를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재래식 군비를 줄여 복지로 전환하고자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재래식 군사력을 급속히 줄이고 대신 핵무기를 이용해 소련의 위협에 대처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1200만 명에 달했던 병력은 1947년에 150만 명으로 줄었고 국방예산 역시 909억 달러에서 103억 달러가 됐다. 소련이 핵무기 우위에 있는 미국을 상대로 3차 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1949년 5월 28일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4만 5000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했다.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이 빠져 있었다. 1950년 6월 비극적 동족상잔 한국전쟁 발발을 감지 못한 한국은 무방비 상태였다.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시에 있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는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의 보고를 받은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대통령에게 긴급 전화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파병을 반대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파병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했지만 한국 전쟁은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해 참전이 결정됐다. 1950년 6월 30일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았다. 맥아더는 파죽지세의 북한군을 저지하려면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트루먼은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방치했더라면 한반도는 쉽게 공산화 됐을 것이다. 트루먼은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지지를 받는 한국을 침략한다면 주변국가들도 공산국가의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고 북한의 공격을 방치한다면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관 입구에 새겨진 말처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와 그들의 국민을 지키기 위해 미국은 연 150만 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5만4246명이 전사하고 10만3284명이 부상당하고 8177명이 실종되는 희생을 치렀다. 트루먼의 한국전 참전 결정으로 지금 대한민국이 존속하고 번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시는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다. 이곳을 기반으로 사업을 했고 판사로 재직했으며 정계에도 진출했다. 이 곳에 트루먼 생가와 도서관, 박물관이 있다. 인디펜던스의 다운타운은 국립사적지기도 하다. 트루먼 박물관에는 대통령 재임기간 이뤄졌던 한국전 참전, 마셜 플랜, NATO 창설,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 등의 업적들이 기록돼 있다. 작은 거인 33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은인이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5.22. 18:51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월급봉투와 봉투를 건네 받으신 어머니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아버지의 누런 월급봉투는 가족을 위한 희망이었다. 고인이 되신 두 분 노고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월급봉투에는 명세표와 함께 수표, 지폐, 동전까지 들어 있었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항상 가족들 얼굴이 먼저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건네주고 받던 '고생했다'는 인사말이 세상 제일 행복한 단어였다. 한번은 월급날 동료와 충무로 선술집에 들렀다. 간단한 술자리를 겸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벗어놓은 코트 안주머니에 있을 월급봉투를 찾았다. 두툼해야 할 안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던 짧은 시간에 주마등처럼 가족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잃어버린 월급봉투는 우리 식구에게 월급봉투만큼의 고통과 충격을 안겨줬다. 90년대부터는 월급봉투는 명세표만 있는 빈 봉투였고 돈은 숫자가 되어 컴퓨터 서버를 타고 은행통장으로 직행했다. 지금껏 두툼한 현금을 보거나 직접 만져보질 못했고 지갑은 항상 배가 들러붙어 있었다. 세계 전체의 화폐 총량은 약 60조 달러지만 주화와 지폐 총액은 6조 달러 미만이다. 50조 달러 이상은 컴퓨터상으로만 존재하는 돈이다. 모든 상거래가 컴퓨터로 이뤄지고 있는 세상이다. 만약 어마어마한 금액을 현금거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다. 돈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발달과 연계한다. 인류 최초의 화폐는 수메르인의 보리 화폐다. 이 화폐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남쪽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출현했다. 이후 표식이 없는 금속덩어리를 무게로 달아 상거래를 했고 기원전 15세기에는 중국 상나라에서 조개껍데기를 상거래 이용했다.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6세기경 리디아에서 사용됐다. 리디아 주화에는 귀금속의 양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누가 주화를 발행했는지 새겨져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거의 모든 주화는 리디아 주화의 후손이라고 보면 된다. 화폐는 인간이 고안한 것 중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 시스템이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화폐 박물관에는 10억 달러 지폐뭉치가 전시 돼있다. 캔자스 시티 연방은행 로비에 개설된 무료 박물관이다. 입장하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제시하고 국제선 공항 보안검색대 같은 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돈의 위력만큼 검색도 엄중했다. 50만 달러 상당의 금괴와 각종 동전 콜렉션, 경제에 관한 내용들이 전시돼 있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별 할 순 없었지만 방탄 유리벽 안쪽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10억 달러만큼 쌓아 놓은 전시물도 있었다. 전시장 한켠 유리창 너머 촬영 금지구역에선 오래된 돈을 분쇄하고 있었다. 기념품점에서는 폐기돼 분쇄된 지폐 뭉치를 비닐봉지에 넣어 기념품으로 줬다. 금괴와 달러뭉치, 폐기된 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야릇한 곳이었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5.15. 17:55
위네베고RV 고객 센터에 있는 지역 안내 팸플릿 중에 한곳을 발견했다. 포리스트 시티 서쪽으로 80여 마일 떨어진 인구 800명의 작은 마을 웨스트밴드에 있는 '구원의 정원'이었다. 미국의 주류는 1600년대부터 동해안에 정착한 영국계다. 반면 아일랜드인이나 독일인, 동유럽의 유대인, 이태리인, 폴란드인, 러시아인들은 1800년대 중반이후 점차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도시의 외곽이나 신개척지인 서부로 향해 삶의 터전을 개척해 갔다. 아이오와주 웨스트밴드는 1880년대 초에 철도가 생기면서 늦게 이민 온 독일인, 아일랜드인이 정착한 농촌 마을이다. 인구의 99% 이상이 백인이다. 미국 이민 교회는 이민생활의 구심점이며 위안처 역할을 했다. 대도시들은 산업의 발달과 인구 이동으로 많은 민족들이 섞여 살지만 소도시나 시골마을은 한국의 집성촌처럼 같은 민족끼리 또는 교회나 종파에 따라 모여 사는 곳이 많다. 웨스트밴드 마을 중심가를 몇블록 지나면 성 베드로, 바울 성당이 나오고 그 옆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도 놀랄만한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로토는 이태리어로 자연 또는 인공 동굴이다. 보통 바닷가에 오랜 세월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아치형의 작은 동굴을 의미한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별장인 나폴리의 그로토가 대표적인 자연 바닷가 동굴이다. 16세기 중반에 이태리나 프랑스에서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그로토를 만들었다. 웨스트 밴드 구원의 정원의 외부는 성채 같기도 한데 좁은 입구가 여러 개 있다. 성전의 내부는 마노, 크리스털, 공작석, 화석나무, 국립 공원이되기 전에 칼스 배드 협곡에서 채취한 석순, 조개 등 아름다운 색채의 돌로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 한 아홉 개의 그로토로 꾸며져 있다. 그외에도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고, 성 미카엘이 악마를 물리치고, 예수님이 산상 설교를 하고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이 아름다운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구원의 정원은 웨스트밴드 가톨릭 교회 소속 폴 도버스타인 신부가 건축했다. 독일 이민자 출신인 폴 도버스타인 신부가 교회에 부임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도버스타인 신부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살려주시면 성모마리아를 모시는 성전을 짓겠다고 약속 했다. 도버스타인 신부는 병이 완치된 다음 10년 동안 미국 50개 주는 물론 전 세계에서 돌을 모아 1912년 그로토를 짓기 시작했다.1946년부터는 성 베드로, 바울 성당의 후임 루이스 그레빙 신부와 매트 쉐인스 신부가 건축에 참여해 42년에 걸쳐 지었다.1954년 도버스타인 신부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2년 후 1956년에 완공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그로토로 웨스트 밴드 도시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로토를 구성하는 암석과 광물의 가치는 수백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도버스타인 신부는 일을 하다 손이 갈라져 피가 시멘트에 물들면 '피 흘리지 않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구원의 정원은 매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숨겨진 보물이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5.08. 18:30
와이오밍주와 사우스다코타주의 황량한 벌판을 벗어나 동남쪽으로 달렸다. 네브래스카에 들어서면 시야가 넓어진다. 면적의 90%가 평탄한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옥수수 농사와 목축이 주요산업이며 세계 정육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다. 프리웨이에 소, 돼지 등 가축을 실어 나르는 대형 차들이 줄을 이었다. 며칠간 폭풍우가 예보되어 비바람을 피할 겸 네브래스카주의 주도인 링컨시에서 멀지 않은 스테이트 파크에 머물렀다. 네브래스카주가 오염된 것인지 스테이트 파크에는 파리가 너무 많아 차문을 열 수가 없었다. 잠깐 문이 열린 사이 100여 마리 파리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퇴치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몇 마리는 살아남아 아이오와주로 넘어왔다. 밤새 비를 동반한 폭풍이 몰아쳤고 차가 바람에 흔들려 잠을 설쳤다. 아침에는 세찬 비바람이 방향을 바꿔 불어 왔다. 방수처리돼 있는 RV 외장 스피커 콘이 비바람에 파손됐다. 누수가 될까 테이프로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350마일 북동쪽 위네베고 RV 본사 서비스 센터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아이오와주 포리스트시티에 있는 위네베고 RV 서비스 센터에 도착해 캠핑을 하고 다음날부터 정비를 받았다. 미국 RV 생산업체 1, 2위를 다투는 위네베고 RV 본사와 공장이 있는 포리스트시는 미네소타주 접경에 위치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 한가운데 위치한 포리스트시는 도시 한켠으로 작은 위네베고 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담하고 청결한 곳이다. 위네베고 RV에 종사하는 직원이 2500명이 넘는다고 하니 4500여 명 포리스트 시 인구의 절반이 위네베고 RV와 연관이 있다. 한 기업이 도시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하던 포리스트 시티 출신 사업가 존 K. 핸슨이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던 고향을 살리기 위해 몇몇 지역 투자자와 함께 1958년 2월 여행용 트레일러 공장을 설립했다. 1960년에는 회사 이름을 위네베고로 변경하고 트레일러용 가구 및 기타 부품을 직접 생산했다. 트레일러를 생산하던 위네베고사는 1966년 최초의 '모터 홈'을 출시하며 경쟁사 RV가격의 약 절반 가격으로 판매하는 혁신을 일으켰다. 이는 RV에 사용되는 가볍고 강도 높은 차량 벽, 플라스틱 저장탱크, 가구 등 부품을 일괄 생산해 출고가를 줄였기 때문이다. 위네베고가 첫 생산한 RV의 상표가 모터 홈이었고 이 명칭은 RV를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미니밴을 RV라고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캠퍼나 트레일러, 모터 홈처럼 생활공간을 갖춘 여행·캠핑용 차량을 RV로 부른다. 미국에서는 RV를 이용해 여행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주로 50대 이상이다. 그러나 요즘은 야외 활동을 즐기는 젊은 세대와 가족단위 여행자가 증가하면서 30~40대의 수요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초보적이긴 하지만 수 천대의 RV가 보급되어 있고 텐트를 이용한 캠핑문화에서 RV차량을 이용한 캠핑 여행문화로 서서히 바뀌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2016년 약 37만5000대의 RV가 생산됐고 한 해 4000만 명 이상이 캠핑을 즐긴다. RV로 캠핑을 하며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하며 RV내부를 자신만의 취향에 맞게 디자인해 제2의 집처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주 한인들도 캠핑 등을 통해 여가시간을 보내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이민살이의 동병상련이랄까. 가끔 캠핑장에서 만나는 한인들이 더 없이 반갑다. 한국음식을 나누며 정을 나누기도 한다. 이번 위네베고 RV 방문은 전화위복이었다. 위네베고 무료 캠핑장에서 며칠을 지내며 수리와 부품교체를 하고 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다양한 사람들과 여행정보도 공유하는 값진 시간을 보냈다. 수리와 부품교체도 무료였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5.01. 19:09
미국의 대평원을 운전해 달리다 보면 기차를 자주 보게 된다. 끝이 안 보이지만 몇 량인지 헤아려 본적도 있다. 기관차 네 대가 앞뒤로 이어져 있고 2층으로 적재한 기차가 120량이 넘었다. 지난해 아이오와주 옥수수 수확철에 몇 마일을 늘어서 대기하는 기차를 보고 놀란 적도 있었다. 미국의 철도는 세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 철도는 도로를 이용한 수송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아 육상화물운송의 꽃이라 불린다. 남북전쟁 전에 동부에서 대륙의 중간 지점인 오마하까지 철도가 개통돼 있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북 전쟁 중에 미국의 중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를 만들었다.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의 두 철도 회사가 공사를 맡았다. 대륙횡단철도공사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가 오마하시에서 서쪽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유타주 프로몬터리 포인트까지 부설하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는 반대로 서해안에서 동쪽으로 공사해 두 철도를 연결키로 하였다. 센트럴 퍼시픽 지역은 미국에서도 가장 험난한 화강암투성이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공사를 시작한 센트럴 퍼시픽은 중국인부를 고용했다. 매일 1만2000명의 인부가 순전히 곡괭이, 도끼, 삽, 망치 등 원시적인 도구로 공사를 했다. 공사로 얼마나 많은 중국인 인부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철도 밑에 깔린 침목만큼 많았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869년 5월10일 철도 공사가 완공되자마자 약 2만5000명의 중국 철도 인부가 즉시 실직당했다. 당시 불경기가 심해지자 백인 노동자들이 싼 임금에 일하는 중국인들을 배척했다. 특히 콜로라도, 와이오밍 등에서는 중국인들을 집단 살해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1882년 중국인 이민자 수가 12만5000명을 넘어서자 국회에서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켜 이민을 일체 중단했다. 횡단철도는 미국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멸시, 천대, 학대 속에 중국인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콜로라도 덴버로 가는 중간지점에 노스 플랫 시가 있다. 미국 대평원이 시작하는 곳으로 구릉도 없는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곳이다. 노스 플랫에 1866년에 건설된 세계 최대의 기차 정비창 베일리 야드가 있다. 베일리 야드에서는 한 달에 8500개 이상의 기관차를 수리할 수 있다. 세계 유일의 초음파 휠 탐지기를 구비해 매년 1만 쌍의 바퀴를 교체한다. 통과하는 화물량이 미국의 경제 지표를 말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정비창은 장관이었다. 미국 경제발전의 근간인 횡단철도는 중국인의 희생과 차별적인 동양인 이민 역사가 배어 있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4.24. 18:07
부부는 세상을 사진에 담기 위해 세상의 많은 것을 버렸다. 많은 이들이 편안한 삶을 선택하는 60세가 되던 해에 부부는 안락한 집을 버리고 RV로 삶을 옮겨 탔다. 여행과 함께할 그 작은 RV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덜어내고 덜어내고 또 덜어냈다. 신현식 사진작가는 "용도를 다한 수첩이 종이봉투로 재활용되듯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나도 행복한 과일봉지로 재활용되기를 바라면서 길을 나섰다"고 말한다. 아내 브룩 신씨는 담담하게 남편의 여행계획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여행은 필연으로 만난 부부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여행을 계획하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면서 원칙을 세웠다. '마음은 단순하게, 소유는 간단하게'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집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나는 첫해에는 다 버리지 못해 스토리지에 남은 물건을 두고 떠났다. 그렇게 1년을 살았는데 그 물건들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졌다. 그래서 스토리지까지 정리했다"고 브룩씨는 말했다. 그렇게 덜어냄 속에서 탄생한 사진들이 이번 전시에 공개되는 작품들이다. 포토저널리스트 신현식씨와 브룩 신 부부의 '대륙탐방 사진전'이 오는 26일부터 닷새간 중앙갤러리서 열린다. 전시는 미주중앙일보와 넥센타이어가 후원한다. 신현식 작가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국전과 동아미술제 등 다수의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진도그룹 사진실장으로 일했고 1992년 중앙광고대상 출판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93년 LA중앙일보에 입사, 2016년까지 사진부장과 사진전문위원으로 일했다. 현재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들은 부부가 700일간 45개 주, 300개 도시, 6만 마일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이다. 그렇게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 중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사진은 단 50점이다. 삶을 덜어냈듯이 부부는 사진을 추려냈다. "버려야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사진도 버려야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부부는 입을 모았다. 신 작가는 "풍경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지만 그래서 진부해 보일 수 있다. 그만큼 작품성을 갖기 힘든 것이 풍경사진"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곳을 여행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지만 부부의 사진은 확연히 다르다. 브룩씨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표현해 냈다면 신 작가는 풍경 속에 인간의 삶을 함께 담아냈다. 신 작가의 작품 '맨해튼'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맨해튼의 고층빌딩과 묘지의 비석들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저 높은 고층 빌딩에서 일하다 그 밑의 무덤에 묻히는 게 인간의 삶인 것 같다"고 되뇌듯 말한다. 미시시피의 늪에서 찍은 브룩씨의 사진은 자연이 가진 아름다운 일상을 구도로 담았다. 평생 간호사로 일했던 브룩씨는 2년 전 여행을 떠나며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남편은 제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올 때까지 터치하지 않았어요. 대신 끊임없이 제게 물었죠. 그 사진은 왜 찍는 거냐고. 사진에 어떤 마음을, 어떤 생각을 담은 거냐고…." 신 작가는 '제자'인 아내에 대해 "풍경은 널려있는 자연을 어떻게 잘 정리하는가가 중요한데 생각외로 상당히 감각이 있는 편이다"고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 부부는 전시회 후 또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오랜 기간 부부의 삶의 터전이 되어줄 RV도 다시 장만했다. "3년이 될 지 5년이 될 지는 모르겠어요. 그 이후의 삶이요? 모르죠. 그게 삶이더라고요." 26일 오후 6시에 열리는 오프닝 리셉션에서는 전시되는 50점 외에도 여행하며 찍은 다양한 사진들을 슬라이드를 통해 공개한다. 또 여행을 통해 얻은 RV여행에 대한 노하우도 소개할 예정이다. ▶주소: 690 Wilshire Pl. LA. ▶문의: (213)321-2334 오수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8.04.18. 20:52
사우스다코타주 동쪽 와이오밍 주와 맞닿는 곳에 블랙힐스가 있다.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수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 인디언들이 신성시하며 살아온 곳이다. 인디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고쳐준 서부영화 '늑대와 춤을'의 배경이 블랙힐스 평원이다. 1874년 6월 30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블랙힐스에서 금을 발견하고 정부에 보고한 이후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금을 캐려는 백인들이 몰려와 성지를 파괴했다. 미국정부는 서부로 향하는 백인 이주민들을 통과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수족에게 블랙힐스 영유권을 인정한 라라미 조약을 파기했다. 블랙힐스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다. 1876년 리틀빅혼 전투에서 커스터의 제 7기병대가 전멸했지만 1877년 미국정부는 끝내 블랙힐스를 점거했다.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 평원의 거점도시 래피드 시티 남쪽 두 개의 산봉우리에 거대한 인물 조각상이 있다. 러시모어 대통령 얼굴 바위와 인디언 전사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 바위다. 인디언들을 인종청소하고 이 땅을 차지한 백인들과 싸우며 생존을 위해 이 땅을 지키다 전사한 인디언 전사의 조각상이다. 두 개의 상반된 역사적 관점을 지닌 조각상이 얼굴을 맞대고 있다. 미국 역사가 영원히 펼쳐지는 곳에 위대한 지도자들 얼굴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 조각가 거츤 보글럼의 말처럼 러시모어산의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얼굴 바위는 매년 3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의 전당'이라고 부르는 얼굴 바위는 거츤 보글럼과 그의 아들 링컨 보글럼이 1927년 8월 10일에 조각을 시작했다. 14년이 지난 1941년 10월 31일에 완공됐다. 남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는 러시모어 대통령상보다 훨씬 더 큰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이 있다. 미국 정부가 수족 성지인 블랙힐스 돌산에 백인 대통령 얼굴들을 조각하자 수족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가 폴란드 출신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에게 아메리칸 인디언 영웅을 조각으로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몇 년을 숙고한 코작이 1948년에 착공했다. 1998년 6월 50년 만에 완공된 얼굴 부분의 길이만 27미터다. 코작이 사망한 뒤에도 그의 부인 루스 로스가 자녀와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모어의 네 배에 달하는 크레이지 호스 조각이 언제 완성될 지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대를 이어 작업해 최종목표를 이룰 것이라고 한다. 인디언 성지에 미국을 찬양하는 러시모어 대통령 얼굴 바위와 미국의 인종말살 정책과 미국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오늘날에도 분열된 여론을 봉합해야 하는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해본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4.17. 20:35
사우스다코타주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가는 길은 낮은 구릉과 벌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조그만 원주민 마을 파인 리지를 지나 운디드니로 향하는 벌판의 세찬 바람은 황량함을 더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수족이 사는 이곳은 미국 내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다. 10여 마일을 지나면 운디드니 사건을 기록한 붉은 간판이 나온다. 운디드니 추모비가 있는 낮은 언덕 위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길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지역 관광안내 책자에도 언급되지 않는 곳이다. 막상 어렵게 찾아 도착한 장소에는 엉성한 공동묘지와 도로 표지판이 전부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지만 방치돼 있었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과 7기병대가 수족, 사이엔족, 아라파호족 연합 인디언들에 전멸당한 국립 리틀 빅혼 전투 기념지는 잘 조성돼 관리되고 있었고 백인 영웅을 추모하려는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역사를 대하는 백인들의 의식을 가늠하게 한다. 1890년은 대평원을 평정한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다.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1890년 12월15일 전설의 인디언 지도자 시팅불이 살해당하고 수족의 저항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그 무렵 인디언들 사이에선 빅풋 추장 등을 중심으로 유령 춤이라는 종교의식이 확산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원주민은 유령 춤을 추면 백인들을 물리치고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부는 유령 춤을 금지했다. 빅풋 추장은 자신을 따르는 350여 명의 수족 인디언들과 함께 운디드니로 이동했다.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제임스 포사이스 대령이 지휘하는 제 7기병대 500여 명이 출동했다. 인디언들은 항복했고 1890년 12월 29일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한 인디언이 저항했다. 어느 편에선지 한발의 총탄이 발사됐다. 포위하고 있던 미군은 원주민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원주민은 반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비무장 상태의 원주민들도 사살당했다. 빅풋 추장을 비롯한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 146명이 사망하고 5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은 25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이 운디드니 학살 전말이다. 이 사건은 미국 측에서는 운디드니 전투라고 하는데 리틀 빅혼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대평원 평정의 끝을 상징한다. 미군은 운디드니 전투를 원주민과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운디드니 표지판과 묘지에는 몇몇의 원주민이 서성거렸다. 슬픈 눈을 한 원주민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공예품을 꺼낸다. 공예품을 샀다. 원주민 형제가 묘지를 안내해 주었다. 묘지를 둘러보는 동안 귓전을 울리던 바람소리가 희생자들의 비명처럼 들렸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4.10. 18:07
"사진 촬영은 항상 어려움에 대한 도전이고 극복입니다. 사진은 자연을 복사해 놓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 사람의 마음을 대입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미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자동차 여행을 하기 위해서 운전을 하다보면 눈에만 넣어두기에는 아까운 풍경을 만날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2년간 본지에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을 연재하고 있는 포토저널리스트이며 20여 년 넘게 LA중앙일보 사진기자와 사진부장을 역임했던 신현식씨가 LA로 돌아왔다. 지난해 첫번째 대륙 일주를 마치고 LA에 왔을 때는 그저 방문이었는데 올해는 다른 표현을 써야 했다. 신씨는 포토저널리스트는 물론, 틈틈이 '사진'을 가르쳐왔다. 중앙일보 명예사진기자 클럽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진작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개인전을 개최한 작가도 여럿이다. 하지만 막상 신씨 자신은 1985년 서울에서 다큐사진전을 연 것 이외에는 사진 작품 전시회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의 날카로운 보도사진을 수없이 봐왔던 한인 독자들은 그의 풍경사진을 기대해왔다. 물론 그의 페이스북에서 간간이 볼 수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아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넥센타이어와 중앙일보의 후원으로 사진전을 열게 됐다. 오는 26일부터 30일까지 중앙일보 지하 갤러리에서 '부부사진전'을 개최한다. 개인사진전이 아니고 부부사진전인 이유가 흥미롭다. 신씨의 부인 브룩 신씨는 원래 은퇴하기 전에는 간호사로 일했는데 미 대륙을 2번째 일주하면서 RV를 운전하는 신씨의 옆에서 셔터를 무수히 누르며 특별 개인지도를 받은 덕에 첫 부부사진전의 주인공이 됐다. 신씨는 "원래 아트에 관심이 있던 아내가 가족들의 만류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번에 의외로 사진에 관심을 보이더니 자신 눈에 비치는 풍경을 자신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재주가 있더라"며 "특히 여행 중 극적인 기회를 찾아 '보석 건지기'에 나름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2년간의 특별과외가 주효했다고. "매 순간 곳곳에서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는 풍광을 눈으로 담아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저 느낌만을 기억합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순간, 같은 카메라로 찍는다고 해서 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들 부부의 작품은 대략 50점쯤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여행에 대한 정리도 이뤄진다. 3번째 대륙 일주를 앞두고 진행되는 작업이다. 한편 그의 사진전에 대한 관심만큼 오프닝 행사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의 RV여행 노하우가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수많은 이민자, 아니 태어난 사람들도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바로 미대륙 일주다. 누군가 RV를 타고 떠나면 부러움은 말할 것도 없다. 신씨 부부가 대륙을 두번 돌았기에 그 노하우가 만만치 않다. 26일 오후 6시부터 열리는 리셉션에서 일단 노하우가 몇가지 소개된다. 사진틀에 걸리지 않지만 걸작인 사진들의 슬라이드쇼가 또한 진행된다. 신씨는 "앞으로 여행 관련 강연, 컨설팅을 해볼 작정"이라며 "특히 유튜브를 통한 현장의 살아있는 정보도 제공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7일에는 RV여행 클럽 예비모임도 갖는다. 또한 전시회를 마치면 RV여행 클럽을 조직해 한인 RV여행 랠리 행사도 마련할 계획이다. 그는 또 RV로 대륙 일주를 해보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많은 한인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고 싶어한다. ▶페이스북:facebook.com/thomashyeon ▶블로그: 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med_usrid=brookeshin ▶문의: [email protected], (213)321-2334 장병희 기자
2018.04.05. 19:24
영국은 1610년쯤부터 북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출자한 주식회사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종교 박해를 피해 지금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집단도 있었다. 인디언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 침입자들을 도와 담배농사법 등을 가르쳐줬다. 백인들은 인디언들과 조심스럽게 공존했다. 하지만 1630년 이후 영국제국의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이민이 늘어나고 백인들의 정착촌이 확대되면서 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살던 피쿼드족과 영국정착민들 사이에 1637년 일어난 피쿼드 전쟁으로 본격적인 인디언 말살정책이 시작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조지 워싱턴도 미국독립 이전 민병대를 이끌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살던 인디언들을 말살했다. 미국 독립 이후 백인들은 급속하게 서쪽으로 진출했다. 테네시주 민병대 출신으로 독립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앤드루 잭슨은 1814년 앨라배마 호스슈 밴드 전투에서 크릭 인디언 800여 명을 학살했다. 이후 7대 대통령이 된 앤드루 잭슨은 "인디언은 백인과 공생할 수 없는 열등 민족"이라고 의회에서 연설하며 1830년 '인디언 추방법'을 제정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을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정착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4만5000여 명의 인디언들이 '눈물의 길'을 따라 이주하면서 4000여 명이 숨졌다. 이 정책으로 미시시피 강 동쪽으로는 인디언이 사라졌다.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9일까지 벌어진 남북전쟁기간에도 인디언 토벌은 계속되었다. 링컨 정부는 남북전쟁 기간에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땅을 인디언들로부터 강탈했다. 흑인노예를 해방한 인권 대통령으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도 인디언에게는 무자비했다. 1862년 12월 26일 링컨은 미네소타 수족 인디언들의 봉기를 진압하고 체포한 인디언 38명에게 집단 처형을 지시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집단 교수형이었다. 1865년 4월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평원의 인디언 사냥이 시작됐다. 1867년 북군영웅이며 육군장관이었던 윌리엄 셔먼은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거지 종자로 남겨두는 게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1876년 사우스다코타 인디언 성지 블랙 힐스 지역에 금이 발견되자 미군은 조약을 스스로 깨고 수족 소탕 작전에 나섰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은 육군 장관 셔먼의 인디언 소탕군에 편성되어 제 7기병대 연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1876년 6월 25일 공을 세우기에 급급했던 커스터는 지금의 몬태나주 리틀 빅혼 카운티 리틀 빅혼 강변에서 야영하며 종교의식을 하고 있던 1500여 명의 인디언을 발견하고 이들을 기습했다.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제 7기병연대는 수적으로 또 전술적으로 우세했던 인디언들에게 섬멸됐다. 전사자 268명, 부상자 55명이었다. 미국인들은 커스터를 야만인을 퇴치하려다 산화한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4.03. 19:06
아이다호주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을 떠나서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구경하기로 했다. . 그랜드 국립공원은 가을 옷을 입고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랜드 티톤은 옐로스톤으로 가는 길목에 한숨 돌리고 가는 곳이다. 복잡한 도심과 일상을 떠나 맑은 공기 마시며 명상을 원하는 여행객이나 등산, 하이킹 애호가가 아니고는 여러 날 지내기 지루할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물가가 비싸 부담스럽다. 산에 들어가면 산을 볼 수 없다. 그랜드 티톤은 멀리 떨어져 호수에 비친 산을 보며 사진을 찍는 게 고작인 곳이다. 입구에서 국립공원 직원이 막아서 입장료를 받고 국립공원 내 캠핑장이나 숙소 등 위락시설은 개인업체가 운영하고 있다. 숙박시설과 식당, 기념품점과 주유소, 세탁시설까지 갖춘 이용 비용이 비정상적으로 비쌌다. 캠핑장 화장실 시설은 낡고 지저분하고 캠핑자리는 울퉁불퉁 기울어 있었다. 겨우 전기만 연결할 수 있고 30피트 이상 길이의 RV는 세울 수 없는 캠핑자리가 하루에 50달러다. 보통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의 하루 이용료는 15달러에서 30달러인 것과 비교하면 독과점 폭리다. 그랜드 티톤과 옐로스톤 공원을 분리해 두 개의 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티톤산이 비치는 잭슨 호수로 갔다. 호수에 비친 티톤산의 일출을 찍으려고 영하의 날씨에도 아마추어 사진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트라이포드에 카메라를 얹은 젊은 중국인은 스스럼없이 내 앞을 막고 섰다. 각종 현장에서 사진기자로 인생 대부분을 지낸 나는 기가 막혔다. 사진기자들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왜 저렇게까지 하면서 뭐하려고 찍는 걸까? 몇 장 누르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랜드 티톤을 조금 지나자 옐로스톤 국립공원 입구가 나오고 입장료를 또 받았다. 이중과세 당하는 느낌이었다. 캠핑장에 자리가 없었다. 일정을 포기하고 옐로스톤 동쪽 출구로 향했다. 옐로스톤을 지나는 길은 정말 퇴근길 할리우드 프리웨이 같았다. 차들은 거북이 걸음이었고 눈요기를 할만한 곳은 주차난에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이고 뭐고 관광객과 차에 치이는 이곳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철 지난 옐로스톤도 역시 사람이 많았다. 이번에도 공원 내 캠핑장은 만원이었다. 옐로스톤 서쪽 출구로 방향을 틀어 몬태나주 보즈먼시로 향했다. 공원 내의 길들은 여전히 막혔는데 도로를 점거한 들소들이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옐로스톤은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의 세 배가 넘는 면적에 호수, 산과 숲, 황야와 협곡, 1만 개가 넘는 온천과 300개의 간헐천이 있다. 약 70분 마다 4분 정도 40-50미터 높이로 솟아오르는 올드 페이스풀 간헐천의 인기가 높다. 전 세계인의 놀이터가 돼버린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시간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준비해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3.27. 19:18
선밸리를 나와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Craters of the Moon·달의 분화구)으로 출발했다. 75번 국도 남쪽 방향으로 가다 20번 국도 동쪽 방향으로 갈아타고 60여 마일을 가다 보면 26번 국도로 바뀐다. 북쪽 멀리 산들이 보이고 추수가 끝난 농지와 빈 들판 사이로 드문 드문 작은 농촌 마을이 나오는 평온한 길이다. 서부개척시대인 1840년부터 1870년까지 24만여명의 백인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던 오리건 트레일이다. 10여 마일을 더 가면 온통 검은 풍경이 펼쳐지는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이 나온다. 도착해 우선 공원 입구 오른쪽에 있는 라바 플로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국립공원 캠핑장이 대부분 그렇듯 먼저 온 순서대로 캠핑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이었다. 42개의 캠핑자리가 있었는데 아마 여름 휴가철이나 방학기간에는 캠핑자리를 얻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전기와 물, 하수도를 연결할 수 없는 드라이 캠핑장이었다. 샤워시설이 없고 화장실만 있었지만 비교적 깨끗했다. 10월 말 부터 4월 중순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용암이 흘러 굳은 곳에서 캠핑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잘 정비된 공원도로를 따라 돌며 지구의 역사가 새겨진 용암산을 오르기도 하고 달 표면의 분화구같이 생긴 기암괴석을 내려다 봤다.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은 77만 5000에이커의 광활한 대지 위에 32개의 분화구에서 쏟아낸 화산재가 덮여있었다. 이곳은 2000년 전까지 8번의 큰 화산 폭발이 있었던 곳이다. 용암은 방문자 센터 근처에서 시작해 남동쪽으로 52마일 뻗어있는 깊은 균열 그레이트 리프트에서 분출했다. 용암 지대는 618 스퀘어마일을 덮고 있다. 이 지역은 3000만 년 동안 지각의 변화를 겪고 있고 1983년에도 보라산 지진이 있었다. 규모 6.9의 지진으로 아이다호 가장 높은 지점인 보라산은 약 1피트 높아졌다. 부근의 로스트 리버 밸리는 2.4피트 낮아졌다. 이곳의 마지막 용암 분출은 2000년 전이었는데 중력, 날씨, 화산지형변화 등 자연 및 인위적인 환경적 요소에 따라 용암이 다시 분출할 수 있다. 다시 용암이 분출한다면 커다란 리프트 중앙을 따라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는데 공원도로의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 북쪽 부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원 레인저는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의 지질학적 설명과 동물과 식물들의 생태계를 흥미롭게 설명했다. 이런 모질고 황량한 곳에도 생명이 살아있었다. 화산잿더미 위에도 작은 식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색을 발하고 있었고 다람쥐는 분주히 돌아다녔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지구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2018.03.20. 18:53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말년을 보내다 61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천재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태어난 아이다호주 선 밸리. 미국 문학 거장의 탄생과 죽음이 겹친 곳이다. 트윈폴스에서 7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80마일가량 운전해 가면 평야가 끝나고 헤일리, 케첨, 선 밸리 등 작은 마을들이 줄지어 나온다. 마을들을 통칭해 선 밸리라고 한다. 선 밸리를 뒤로하고 계속 올라가면 그림 같은 시닉 루트(Scenic route)로 이어지고 소우투스 국유림이 나온다. 아이다호 중부의 소우투스 국유림은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 그 자체다. 백두산보다 높은 산이 솟아있고 계곡에는 셀몬 강이 흐른다. 산중에는 빙하시대에 형성된 호수들이 있다. 선 밸리는 헤밍웨이가 네 번째 부인 메리와 쿠바 아바나에서 살다 1960년 추방된 후 이사 온 곳이다. 1961년 7월 권총 자살하기 전까지 집필하고 낚시와 사냥을 하며 지냈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젊은 시절 파리에서 살 때를 회고한 '파리는 날마다 축제', 사후에 출간된 '위험한 여름' 등의 작품을 썼다. 소우투스 국유림 지역에서는 캠핑, 낚시, 등산, 사냥, 하이킹, 스키 등을 하는데 선 밸리가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선 밸리의 작은 마을 중에 케첨은 호텔, 콘도, 고급주택들이 많아 여느 휴양지 같았고 헤일리는 개척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 메리의 묘지가 있는 케첨에서 12마일가량 남쪽으로 내려가면 중심지 올드타운 헤일리가 있다. 헤일리에 9개국 언어에 능통했던 미국의 천재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생가가 있다. 파운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파시즘을 지지하며 미국의 참전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가 1945년 5월 이탈리아에서 체포돼 반역자란 낙인이 찍혔다. 그의 생가는 선 밸리 문화센터 일부로 이용되고 있었고 공개를 하지 않았다.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자료는 헤일리 시내에 있는 블레인 카운티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1899년생인 헤밍웨이와 1885년생인 파운드는 14살 차이다. 이들 삶의 한 가닥이 파리에서 교차했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헤밍웨이는 1921년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해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고 19세에 철학박사가 된 파운드는 22세에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에서 생활하다 1920년 파리로 옮겼다. 1920년대 파리에는 소위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거트루드 스타인, T. S. 엘리엇 등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에즈라 파운드와 교제하면서 "에즈라는 나에 비해 남들에게 훨씬 친절했고 기독교인답다"고 했다. 파운드는 구체적이고 명료한 단어를 사용해 사물을 묘사하는 '이미지즘'의 시를 썼는데 짧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한 헤밍웨이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아이다호 선 밸리는 두 거장의 흔적이 교차하는 곳이다.
2018.03.13. 17:57
아이다호의 주도 보이지에서 달 표면 같은 용암지대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으로 가는 중이었다. 가는 도중에 트윈 폴스 시가 있었다. 트윈 폴스에는 아이다호주의 작은 나이아가라 폭포라 불리는 쇼쇼니 폭포가 있다. 폭포는 트윈 폴스 도심에서 약 7마일 떨어진 스네이크 강 지류에 있고 입장료를 받았다. "폭포 아래 깊은 계곡 강물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폭포의 물줄기가 대단하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170피트인데 이곳은 40피트 이상 더 높은 212피트나 된다." 하지만 쇼쇼니 폭포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곳이다. 물이 마른 가을에 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포는 초라했다. 무책임한 인터넷 매체의 과장된 여행기에 속은 것에 화가 났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은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 그랜드 캐년 등 유명 관광지를 들먹이며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다. 여행객들이 소셜미디어에 자랑하듯 무책임하게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이다. 아이다호는 험한 지형으로 백인 이주민들이 늦게 들어온 곳이다. 1805년 영국인들이 처음 답사했다. 1860년 북부의 피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1880년대 철도가 개통되면서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와 농업, 목축업, 임업 등에 종사했다. 척박한 곳이라 특히 감자농사가 많았다. 아이다호주는 로키산맥 근처에 위치해 평지는 적고 전지역에 걸쳐 삼림지대와 협곡이 가득하다. 산은 황량한 모래산이고 분지로 가야 물과 나무가 있다. 스네이크 강은 아이다호주 서북쪽에서 발원해 와이오밍주 옐로스톤과 붙어 있는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까지 1078 마일을 흘러간다. 스네이크 강과 계곡을 따라 보이지, 트윈 폴스, 아이다호 폴스 등의 도시가 형성됐고 강을 접한 평야에서는 농사를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스네이크 강 유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네즈퍼스, 쇼쇼니족 인디언들이 살았던 곳이다. 스네이크 강은 아이다호의 생명줄이다. 스네이크 강을 따라서 형성된 협곡에 있는 두 개의 폭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 트윈 폴스로 들어갔다. 93번 국도를 통해 148미터 깊이의 협곡을 남북으로 잇는 아찔한 페린 브리지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며 무모하다할 정도의 도전을 일삼던 스턴트맨 이블 크니블이 생각났다. 그랜드 캐년의 협곡 사이를 점프하려는 스턴트 허가를 받지 못한 이블 크니블은 장소를 물색하다 스네이크 리버 캐년을 발견했다. 1974년 9월 8일 'X2 스카이사이클'이라는 특수제작한 스팀엔진 오토바이를 사용해 스네이크 리버 캐년을 뛰었다. 점프를 하자 낙하산이 펴졌고 이블 크니블과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는 강어귀에 떨어져 실패했다. 마침 몇몇 젊은이들이 이블 크니블을 비웃듯 다리 난간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낙하산이 펴지는 3초의 시간이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지고 손에 땀이 났다. 짜릿한 공포감으로 아드레날린을 발산하려는 요즘 젊은이들과 100여 년 전 생존을 위해 다리를 놓던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한다.
2018.03.06. 20:22
안네 프랭크 인권 기념관(Anne Frank Human Rights Memorial) 요즘 작은 도시에서도 자연식품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구 밀도가 낮은 몬태나주 헬레나시에 있는 자연식품을 파는 작은 마켓에 들렀다. 손님도 종업원도 몇 명 없는 한가한 가게였다. 여행 중 필요한 식품을 구입하고 계산대에 섰다. 마른 체구에 수염을 잔뜩 기르고 문신을 한 젊은 직원이 계산대에 서 있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계산을 끝내더니 물건을 봉지에 담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어처구니 없었다. 물건을 주섬주섬 꾸려 나오며 항의를 할까하다 매니저도 같은 부류일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가게를 나섰다. 자동차로 미국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체감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에서도 사라진 '백인우월주의'를 아직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2011년에 유색인종 신생아 수가 백인 신생아 수를 앞질렀다고 한다. 캘리포니아는 유색인종이 전체인구의 과반수된 지 오래다. 2042년부터는 유색인종이 백인보다 많을 것이라고 인구조사국은 예측하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인지 1000여 개 이상의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이 해를 거듭해 세를 불리고 있다. 2015년 6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흑인교회에 침입해 총기를 난사해 9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21세 범인 딜런 루프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부 상징물과 기념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2017년 8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남부연합의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철거에 반대한 인종차별주의 단체와 인권단체가 충돌했다. 시위에 나선 인종차별주의자 제임스 알렉스 필즈는 반대 시위대를 향해 차를 돌진해 1명을 죽이고 1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시위로 35명이 부상당하고 경찰 2명이 헬기 추락으로 사망해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인종, 계층 간 갈등이 증폭되며 미국의 민심이 분열되고 있다. 아이다호는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시위에서 KKK를 압도하며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아리안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1970년대에 리처드 버틀러라는 인물이 캘리포니아에서 아이다호주의 헤이든 레이크로 이주해 신나치주의를 표방하는 '아리안 네이션'을 세웠다. 아이다호주는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며 보수주의 색채가 강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여든다는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감자생산으로 유명한 아이다호 주도인 보이지를 방문했다. 보이지는 전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 10위 안에 드는 곳이다. 작고 아담한 옛건물들이 높지 않은 현대식 건물들과 어우러진 차분하고 세련된 느낌의 예쁜 도시다. 1862년 보이지 인근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유럽의 여러 민족이 이민 와 살기 시작했다. 시내 중심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살며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족이 1800년대 말부터 이민 와 정착한 거리도 있었다. 아이다호주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오히려 아리안 네이션과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로 동일시되는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다호의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듯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아이다호 안네 프랑크 인권 기념관을 건립했다. 2002년 건립된 이곳은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1945년 나치의 인종주의에 희생된 안네 프랑크를 추모하고 인류의 평등, 평화와 인권신장을 위한 교육의 장소로 만들어졌다. 나치를 피해 숨어살면서 한손에 일기장을 들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깥 세상을 내다보는 안네의 동상이 있다. 24미터 길이의 돌 담장에는 유엔의 인권헌장 등 세계 인권보호 관련 어록이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안네 프랑크 인권 기념관에 2017년 5월 두 번이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기물 훼손 사건이 있었다.
2018.02.27. 19:25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 Oregon) 포틀랜드로 이동했다. 비가 많은 곳답게 며칠간 비가 오락가락했다. 전화로 확인한 포틀랜드시 가까운 곳 개인 캠핑장은 턱없이 비쌌다. 포틀랜드에서 남서 쪽 30마일 떨어진 샴포이 스테이트 파크(Champoeg State Park)가 그나마 도심에서 제일 가까운 캠핑장이었다. 여름철이 지났지만 캠핑장에는 많은 캠퍼가 있었다. 도시의 비싼 주거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에 도시주변 저렴한 캠핑장에는 장기간 거주하면서 일을 하는 풀타임 캠퍼가 많다. 캠핑장에 도착하면 전기를 연결하고 수도를 연결하고 의자 테이블 등을 꺼내 캠핑 준비를 한다. 다음날 아침 차에 설치했던 물호스와 정수기, 수압기, 의자, 갈판 등 용품들을 캠핑 테이블에 올려놓고 포틀랜드 시내로 구경 나갔다. 어둑어둑해져 캠핑장에 돌아와 캠핑준비를 하려니 테이블에 올려놨던 캠핑용품들이 없어졌다. 어떤 것은 당장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것은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것이었다. 1년 넘게 여행하며 RV캠핑을 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찾거나 보상을 받으려는 기대는 안했지만 안전한 캠핑을 위해 캠핑 호스트에게 알리고 며칠 후 인터넷으로 공원 측에 항의했다. 다음날 RV캠핑용품점을 찾아 잃어버린 용품들을 200여 달러나 들여 구입했다. 포틀랜드의 악연이었다. 포틀랜드는 LPGA 골프취재로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고 지인 도움으로 나이키 본사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자유도시 포틀랜드 다운타운을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포틀랜드는 색다르고 세련되고 자유롭고 예술활동이 많은 도시로 정원, 박물관, 갤러리, 서점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명소가 많다. 북미 원주민 관련 방대한 자료와 미술품을 소장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포틀랜드 미술관도 유명하고 세계 맥주의 수도로 불릴만큼 수제 맥주집도 유명하다. 89개 이상 수제맥주집과 식당이 있는데 각자 특색있는 다양한 맥주와 음식을 선보이고 사람이 넘쳐난다. 맥주 애호가들에게는 천국이다. 그래서 포틀랜드를 맥주의 '비어(Beer)'와 해탈을 뜻하는 '너바나(Nirvana)'를 합성한 '비어바나(Beervana)' 라고 부른다. 복잡한 다운타운에서 소형이지만 RV를 몰고 주차할 곳을 찾는 일은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다. 알지 못하는 길을 수없이 돌고돌다 도심 멀찍한 곳에 주차하고 도시가 어색한 촌사람처럼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녔다.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곳은 '파웰(Powell's City of Books)'이라는 서점이었다. 여러곳 체인을 가진 서점으로 특이하게 새 책과 중고책을 동시에 진열해 판매한다. 사진관련 도서와 예술관련 도서를 찾기 위해 1층 입구에 있는 안내원에게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색깔로 표시된 약도를 보여주며 가르쳐줬다. 방대하고 미로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Gold, Blue, Green, Purple, Rose, Orange, Red, Pearl 색깔로 섹션을 구분하고 있었다. 자신이 찾고자하는 책을 색깔을 보고 찾아가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건물 1층 북서쪽 구석에는 카페가 있는데, 커피와 간단한 음식을 즐기며 독서하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온라인 판매도 하고 있는 이 서점은 신간, 중고, 희귀본, 절판본 등 400만 가지 책자를 보유하고 있다. 매일 3000권 가량 중고책을 직접 구매하기도 한다. 'Powell's City of Books'는 1971년 월터 파웰에 의해 시작됐는데, 그의 아들도 같은 시기에 시카고에서 중고, 할인,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을 시작했다. 그러다 1979년 부자가 합쳐 운영하다 1982년 아들이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3년에는 인터넷서점을 시작한 온라인 서점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3층 왼쪽 진주색 사진과 예술코너에서 느긋하게 앉아 많은 사진집을 봤다. 분위기가 안정되어서 그런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책을 뒤적였다. 'Powell's City of Books'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고 관광명소이다.
2018.02.20. 21:00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공허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토록 바라던 길 끝에 서있었다. 목젖 끝에 묵직한 먹먹함 때문에 기쁨의 눈물도 감격에 겨운 몸짓도 나오지 않았다. 내 눈앞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완료 표지석, 캐나다 국기, 마지막 풍경이 될 초록의 꽃잎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더는 갈 길이 없어져 버린 캐나다의 매닝 파크에 도착했을 때 후련함과 아쉬움이 뒤섞여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지나온 트레일에 고통과 인내가 녹아있었다.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숨죽여 흐느끼던 눈물과 땀방울이 트레일 안에 짙게 흩뿌려져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매일 목이 타들어갔고,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을 피하기 위해 한 줌 그늘만을 찾아 헤맸었다. 물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물이 말라서 벌레가 떠다니는 물을 마셔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하비 사막을 건넜다. 방울뱀과 전갈을 조심해야 했고 선인장 가시들이 손에 박혔다. 발의 물집들은 끔찍했다. 사막에서의 하이킹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매일 포기하고 싶었다. 기상 이변으로 온통 눈 천지인 시에라 네바다의 산맥을 넘었다. 눈이 점점 녹으면서 불어난 얼음장 같은 강물들은 더 거칠어졌다. GPS 오류로 길을 잃었을 때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음식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곰을 조심해야 했다. 저녁이 되면 항상 불을 지펴 젖은 신발과 양말과 몸을 말렸다. 땅에서 올라온 냉기로 선잠을 잤다. 오리건주 곳곳에서는 산불이 심해 날리는 재와 연기를 마시며 걸었다. 워싱턴주의 거친 능선들을 따라 패스들을 넘고 황홀한 자연 환경을 봤다. 내리던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칼바람과 함께 눈은 쌓여갔다. 원망스러웠던 따가운 햇살을 못 보니 우울해져 갔다.어쩌다 햇살이 비추면 젖어버린 텐트와 침낭, 각종 옷들을 꺼내어 말린다. 햇살을 내려 받으며 축복과 행복을 느꼈다. 마지막 구간 워싱턴 주 산길은 힘들었지만 경이로웠다. 내가 떠나왔고 돌아갈 멀리 보이는 도시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빌딩의 불빛들로 찬란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이 시간을 겪고 캐나다의 국경에 도착해 표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꿈 같은 시간이었다." 이 글은 2017년 4월 22일부터 9월 25일까지 158일 만에 2700여 마일을 걸어 PCT를 완료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정힘찬씨의 글이다. 정힘찬씨는 멕시코 국경을 출발해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심한 물집이 생겨 치료와 휴식을 했다. 지난 5월 하이커들을 후원하고 도와주는 LA의 캠핑, 트레일 전문가 이주영씨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LA에서 일주일 넘게 요양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8월 18일 오리건주 케스케이드 락 PCT의 날 행사장에서 다시 만났다. 지난번 만났을 때 두렵고 지친 모습과는 다르게 밝은 모습이었다.치과의사인 정힘찬씨는 제3국에서 선교와 봉사를 하다 PCT에 도전했다. 한 여성이 석 달 동안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에 이르는 트레일을 했고 이를 책으로 썼다. 책은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로 영화화 됐고 한국에 PCT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현재는 한국의 젊은이들도 도전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PCT를 걷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무엇 때문에 이길을 걷느냐는 질문에 누구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값지고 소중한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2018.02.13. 1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