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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이웃사촌과 이웃포비아

예전에 우리 민족은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이웃 간에 가까이 지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어디 다녀오세요?” 하며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정은 이웃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혀줬다.   하지만 요즘의 도시 풍경은 다르다. 이웃이라는 말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이웃이지만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을 마주치고도 인사를 망설인다. 이웃사촌이라는 단어는 점점 낡은 추억 속으로 밀려나고 있다.   남편이 미국보다 한국에 더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나는 LA에 살면서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치 LA에서 겪는 일처럼 느껴져 글로 쓰곤 한다.   한국의 주거 문화가 아파트 중심으로 변하면서 사생활 보호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변한 지 오래다. 주차,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엔 이웃과 마주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웃포비아’라는 말도 등장했다.   올 추석 연휴 기간 한국 TV에는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SNS)에 ‘앞집에서 받았다는 쪽지’라는 제목의 글이 퍼졌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글을 올린 사람은 앞집으로부터 받은 손으로 쓴 쪽지 내용을 공개했다.     쪽지에는 “앞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거나 인기척이 있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나와 주세요. 이 정도는 서로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대부분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저런 쪽지까지 쓸 정도로 마주치기 싫으면 본인이 기다렸다가 나가야 한다” “이상한 룰 혼자 만들어서 남들에게 강요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사회성 없다”, “단독 주택에 살아라” 등의 댓글을 남겼다.   반면 공감이 간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본인이 나오는 타이밍에 계속 앞집에서 나와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 “내가 나오는 타이밍에 앞집에서 기다렸다는 듯 나온다고 느낀 적이 있어서 신경 쓰인 적이 있다” “나가려고 신발 신다가 문소리, 사람 소리 들리면 숨죽이고 기다린다”는 반응도 있었다.   한편, 이웃과의 교류가 점차 사라지고 있음에도 가끔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 있다. 잘못 배송된 택배를 직접 가져다주는 이웃도 있고,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기다려 주기도 한다. 그런 순간마다 이웃사촌의 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어느 아파트의 따뜻한 축하’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그걸 본 주민들의 열렬한 격려가 화제가 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공개된 사진은, 해당 아파트에 사는 한 부부가 새로 태어난 아이 울음소리로 인한 주민들의 불편을 걱정해서, 정성스럽게 적은 손편지였다.   이들 부부는 “지난 9월, 선물처럼 아기 천사가 태어났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면서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요즘 아기와 같이 생활하면서 저희 부부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기가 시도 때도 없이 울곤 한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시간에 혹 시끄럽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다”며 “죄송하다. 한 분 한 분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란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아기를 키우겠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손편지를 본 이웃들은 편지의 여백에 “축하합니다, 건강하게 잘 키우세요” “우리 모두 울면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파이팅 하세요” “아기들은 다 울죠. 다 이해합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귀한 요즘입니다” 등 진심 어린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윗집에선 “아기 울음소리는 반가운 소리. 얘기해줘서 고맙고, 건강하게 잘 키우라”는 쪽지를 남겼고, 아랫집은 직접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넸고, 옆집에선 아기 내복을 선물해 줬다고 한다.   정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의 다리다. 오늘날처럼 개인주의가 강해진 시대에도 한국인의 ‘정(情)’은 여전히 한국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다. 이웃끼리 반찬을 나누는 문화, 밥 한번 먹자는 말 속의 따뜻한 배려, 이 모든 것이 따뜻한 정의 표현이다.   장편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 작가 펄벅은 한국을 유난히 사랑했다. 유서에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인의 정과 한국 문화를 깊이 사랑했다.   장편소설 ‘살아있는 갈대’는 한반도에 보내는 애정의 선물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펄벅 여사는 60년대 늦가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녘에 경주 시골길을 지나고 있었다.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갔다. 달구지에는 가벼운 볏단이 실려 있었고, 농부는 자기 지게에 따로 볏단을 지고 있었다.   ‘소달구지에 자기 짐을 싣고, 자기도 거기에 타면 편할 텐데…’ 이상히 여긴 그녀가 통역을 통해 물었다.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갑니까?” 농부는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일했지만 소도 하루 힘들게 일했으니 짐도 나누어서 지고 가야지요.”     펄벅 여사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이 모습을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겼던 농부처럼 우리는 본디 배려를 잘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스마트폰 화면 속의 세상이 더 가까워지고, 사람의 온기는 멀어지는 듯하다. 스마트폰 화면을 스치듯 넘기며 수많은 얼굴을 본다. 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이웃과의 인사는 알림창에 밀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나 인사는 문자 속 이모티콘으로 대체되었다. 예전에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배려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문예마당 이웃사촌 이웃 아기 울음소리 이웃 사이 아기 천사

2025.11.27. 18:00

[귀고리] 삶의 뜨락에서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애들이 키가 부쩍 커지면서부터 유별난 질문을 하거나 전에 없던 엉뚱한 요청을 해 오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딸은 자기도 다른 친구들처럼 귀에 예쁜 귀고리를 하고 다니고 싶다며 부디 엄마가 자기 귀에 구멍을 뚫는 것(pears ear)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 부부는 한참 이일로 인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공연히 성한 몸에다 손을 대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딸은 민감한 사춘기 시기였기에  혹시 이 일로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까 하는 생각에 그리하도록 허락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들이 요즈음 유행은 남자들도 귀고리를 한다며 자기도 누나처럼 귀에 구멍을 뚫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다 큰 사내아이가 귀에다 보석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건 우리가 그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닌 큰 두통거리로 다가온 것이다.   여자에게는 예쁜 얼굴 모습이, 그리고 남자에게 어깨와 팔에 탄탄한 근육이 매력의 초점이라면 남자가 귀에다 보석장식을 하고 다니는 것은 도대체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한단 말인지,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이 모두가 경우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경우에 알맞게 살아야 하는 게 바른길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런 설명을 덧붙여 가며 단호히 너의 귀고리는 안된다고 거절했다. 더는 떼를 쓰지 않기에 우리는 항상 착한 우리 아들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 당시 내 소아 진료소에 찾아오는 환자의 반수 이상이 남미, 주로 멕시코계 아이들이었다. 남미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태어나서 약 1개월이 지나면 거의 모두가 집에서 그 작은 아기 귓밥에 바늘로 구멍을 만들고 작은 금장식을 달아주는 풍습이 있다. 가끔 아기 부모가 내 병원으로 찾아와서 그걸 나에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나는 그것만은 사양했다. 내 마음속에는 ‘우리의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이라는 성경 말씀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에게 첫해에 놔주어야 하는 예방주사가 자그마치 6~7개가 되는데 그 주사를 놔줄 때마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를 아기 엄마와 함께 나도 가슴으로 삼켜야 하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에게 다른 어떤 아픔도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방학에도 아들은 야구 캠프에 다녀왔다. 약 3주간의 캠프 생활 동안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다리도 길어지고 키도 훌쩍 커진 것 같았다. 누렇게 햇볕에 탄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그의 귀에 부착된 금속 귀고리를 보게 되었다. 너도 기어이 귀에 구멍을 냈구나! 얼마 동안 나는 몰려오는 실망과 배신감을 참으며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아들은 웃는 표정으로 “엄마 나 내 귀 안 뚫었어요. 이거 봐 이건 앞뒤가 자석이지 않아?” 부모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예쁜 마음을 나는 그날 밤 하나님께 한껏 감사드렸다. 황진수 / 수필가귀고리 뜨락 아기 엄마 아기 부모 아기 울음소리

2022.11.2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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