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오는 15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개최된다. 매해 오스카는 단순한 시상식을 넘어 할리우드의 흐름을 가늠하는 지표로 기능해왔다. 올해 레이스의 특징은 유난히 한 작품으로 몰리는 구도와 연기상 부문의 팽팽한 경쟁이 동시에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 그리고 각본상까지 이른바 ‘빅5’라고 불리는 주요 5개 부문을 따라가다 보면 2026년 아카데미가 어떤 가치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축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다. 올해 오스카 판도를 관통하는 이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작품은 대규모 제작비와 스타 캐스팅, 작가적 문제의식 등 대작으로서의 면모를 고르게 갖추고 있다. 고전적 서사 구조를 따르면서도 동시대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불안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 장르적 외피는 친숙하지만 인물의 선택과 갈등은 낯설 만큼 날카롭다. 작품상은 언제나 절대적 걸작보다는 ‘가장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성취’에 가까웠다. 연출, 연기, 각본, 촬영, 미술 등 여러 분야의 고른 지지를 받아야 가능한 자리다. 그런 의미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압도적이라기보다 안정적인 후보이며, 바로 그 점이 강점이다. 특정 부문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은 투표 구조상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감독상 역시 이 영화의 연출자인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무게가 실린다. 앤더슨 특유의 정교한 장면 설계와 인물 간 긴장 조율로 다시 한번 존재감을 증명했다. 그는 인물의 심리를 공간과 움직임으로 풀어내는 연출에 능한 감독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카메라의 미묘한 이동, 인물 사이의 거리 조절, 장면의 리듬을 통해 긴장을 서서히 고조시킨다. 화려한 과시 대신 정교한 설계를 택하는 방식이다.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아직 결정적인 순간을 잡지 못했던 그의 이력이 다시 소환되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아카데미가 ‘완성된 거장’에게 마침표를 찍어줄지, 혹은 또 다른 선택을 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작품상과의 동반 수상 가능성은 어느 해보다 크게 점쳐진다. 오리지널 각본상에서는 ‘시너스’(Sinners)가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영화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라이언 쿠글러는 장르적 틀을 빌려 동시대 미국 사회의 균열과 계층 갈등을 드러낸다. 인물의 선택은 개인적 욕망을 넘어 구조적 모순과 맞물리고, 그 충돌은 필연처럼 파국으로 향한다. 메시지가 아니라 이야기의 힘으로 관객을 설득한다는 점에서 각본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표심에 어필할 것으로 예상한다. ‘센티멘탈 밸류’와 ‘마티 슈프림’도 만만치 않은 경쟁작으로 거론되지만 현재 흐름은 ‘시너스’가 대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각색상에서는 다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유력 후보로 언급된다. 원작의 서사를 충실히 따르되 영화적 리듬에 맞게 인물 관계와 사건 배열을 재구성했다는 평가다. 이 작품은 서사의 중심축을 미묘하게 이동시키며 주제 의식을 더욱 현재적인 방향으로 끌어낸다. 한편 ‘햄닛’(Hamnet)은 원작의 정서를 섬세하게 보존하며 침묵과 공간, 빛을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문학의 밀도를 영상 언어로 전환하는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판세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쪽으로 기운다. 남우주연상은 티모시샬라메와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대결 구도다. 새로운 얼굴의 약진과 베테랑의 저력이 맞선다. 티모시샬라메는 ‘마티 슈프림’(Marty Supreme)에서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섬세한 감정선과 과감한 변신을 오가며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다는 평가다. 반면 디카프리오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노련한 존재감으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붙든다. 두 배우의 간극은 크지 않다. 막판 분위기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여우주연상에서는 ‘햄닛’의 제시 버클리가 강세다. 그녀는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절제된 톤으로 축적하며 인물의 내면을 깊은 인상으로 남겼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눌러 담는 선택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만든다. 작품 자체가 각색상 유력 후보로 분류되는 만큼 영화에 대한 전반적 호평이 연기 부문으로 확장될 여지도 있다. 경쟁자들 역시 강력하지만 현재까지의 흐름은 버클리가 한발 앞선 모양새다. 종합하면 2026년 오스카 시상식은 비교적 선명한 축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다관왕 가능성과 ‘시너스’의 오리지널 각본상 수상 가능성, 그리고 배우 부문에서의 세대 교체 여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균형 잡힌 대작과 날 선 오리지널 각본, 신구 배우의 맞대결로 압축된다. 아울러 주목할 지점은 올해 후보작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정서다. 거대한 스펙터클이나 기술적 과시보다 인물의 선택과 그 선택이 불러오는 파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서사가 중심을 이룬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집단과 역사 속 개인의 위치를 묻는다면 ‘시너스’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욕망을 파고든다. ‘햄닛’은 상실 이후의 시간을 응시하며 애도의 감정을 어떻게 살아 있는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지를 묻는다.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작품들이지만 결국은 ‘이야기의 힘’이라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확장, 극장 산업의 재편, 글로벌 시장의 영향력 확대 등 외부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여전히 서사와 연기, 연출이라는 고전적 가치에 기대어 있다. 이는 변화 속에서도 영화가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선언처럼 읽힌다. 2026년 오스카가 어떤 결과를 내놓든 올해 레이스는 분명 하나의 흐름을 보여준다. 거창한 구호 대신 구체적인 인물, 자극적인 장치 대신 치밀한 구조. 결국 관객과 투표자 모두를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의 설득력이라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힘이란 사회적 의제나 시대정신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인물의 선택과 갈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메시지를 외치는 대신 상황과 감정의 축적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아카데미 시상식 아카데미 시상식 이동 인물 연기상 부문
2026.03.11. 20:34
가족은 종종 사랑보다 침묵을 상속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 유예된 책임, 전달되지 못한 애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구조가 된다. '센티멘탈 밸류'는 바로 그 침묵이 어떻게 예술의 언어로 변환되고, 다시 가족 관계를 잠식하는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노르웨이 출신의 요아킴 트리에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감독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가족 내 아버지와 딸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드러내고 화해를 제시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이해받지 못한 사랑이 남긴 감정의 잔여물, 제목이 암시하는 바로 그 '감정적 가치(Sentimental Value)'를 조심스럽게 해부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재회가 있다. 그러나 이 재회는 회복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모인 아버지와 두 딸은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오래전 가족이 살던 저택은 이 어긋남을 시각화하는 장소다. 아버지에게 이 집은 예술가로서의 출발점이자 한때의 명성과 실패를 소환하는 장소인 반면, 딸들에게 이 공간은 부재와 회피, 설명되지 않은 상처가 겹겹이 쌓인 기억의 저장소다. 같은 공간을 두고도 서로 다른 감정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이 가족이 공유해온 시간이 결코 동일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트리에는 이 불일치를 설명하거나 중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신뢰하는 것은 해명이나 진술이 아니라, 그 어긋남이 지속되는 상태 그 자체다. 주인공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는 한때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영화감독이다. 그의 부재는 의도적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딸들의 성장기에 깊은 공백을 남겼다. 두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와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터 릴레아스)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공백을 견뎌왔다. 노라는 분노와 거부로, 아그네스는 중재와 유보로 그 시간을 통과했다. 이들의 차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상처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관점에 있다. 구스타브가 제안하는 자전적 영화는 이 가족의 균열을 봉합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를 다시 호출하고 소유하려는 또 하나의 행위다. 그는 딸 노라에게 주연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지만, 노라는 이 제안을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요구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가족의 고통을 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고통은 언제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시 상처받아도 되는가. 트리에 감독은 대물림된 트라우마를 극적인 폭발이나 갈등의 분출로 처리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고성이 거의 없다. 대신 어긋난 질문과 엇갈린 대답, 말해졌으나 도달하지 못한 문장들이 반복된다. 인물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거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예술은 치유이자 폭력이다. 트리에는 이 모순을 끝내 해결하지 않는다. 연출은 철저히 절제돼 있다. 트리에는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음악이나 편집을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장면일수록 음악은 사라지고, 카메라는 고정된다. 인물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연출은 한 발 물러선다. 그 결과 관객은 감정을 ‘전달받는’ 대신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가 조용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소모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엔딩 크레딧 이후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끝까지 존중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정서적 밀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특히 구스타브를 연기한 스카스가드의 연기는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그 부인의 실패를 미세한 균열로 표현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방어하지만, 그 방어는 완벽하지 않다. 이성적인 언어 사이로 감정이 새어 나오는 순간들이 축적되며 인물은 선과 악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딸들의 연기 역시 전통적인 성장 서사를 거부한다. 노라는 피해를 입은 인물이 반드시 용서나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대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끝까지 유지한다. 아그네스 또한 명확한 치유자나 중재자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들은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머무는 인물들이다. '센티멘탈 밸류’는 3월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최다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을 수상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연기상 부문에서는 수상 가능성이 높다. 구스타브 역은 오스카 연기상에 최적화된 캐릭터다.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물, 말은 이성적이지만 감정은 계속 새는 상태,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은 회색 인물 구스타브를 연기한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절제 연기의 표본을 보여준다. 딸 노라 역 역시 오스카가 선호하는 캐릭터다. 피해를 입은 인물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 전통적으로 화해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구조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최근의 연기상 흐름과도 맞아떨어진다. 여우주연상 부문에서 뚜렷한 선두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레나테 레인스베의 수상 가능성은 높게 점쳐진다. '센티멘탈 밸류’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혼자 튀는 명연기가 없다. 누구 하나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서로의 리듬을 침범하지 않으며, 침묵을 함께 유지한다. 영화 전체의 톤을 완성시키는 연기, 연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연기, 화려하지 않지만 아카데미가 가장 신뢰하는 연기 유형이다. 영화는 곳곳에 코믹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유머는 비극을 상쇄하지도, 희망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어떤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종료되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 그럼에도 계속되는 시간이다. 영화는 그 과정이 남긴 감정의 흔적에 집중한다. 예술영화의 사유적 밀도와 멜로드라마의 감정적 울림을 결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센티멘탈 밸류’가 던지는 질문은 사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침묵이 남긴 유산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이제 각자의 몫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잠식 관계 가족 관계 연기상 부문 오스카 연기상
2026.02.11.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