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접전(短兵接戰)이란 말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적과 맞붙어 싸운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전쟁이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물과 견줘 봤을 때 약하거나 부족한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아마도 한 해의 두 번째 달, 곧 ‘2월’ 이 좋은 보기가 될 성싶다. 2월은 날짜가 28일밖에 안 되는 달이지만 많은 유명인이 태어났고 큰 사건도 많았다. 2월을 일컫는 영어 이름 페브러리(February)의 본디 뜻은 ‘깨끗하게 한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페브루아(februar)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700년 로마 총통 폼필리우스가 열 달밖에 없던 달력에 두 달을 더 붙여 열두 달로 만들고 맨 끝 달의 이름을 페브러리라 불렀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고 새해를 맞이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46년에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첫 달이었던 마치(March) 앞에 제누어리(January) 와 페브러리를 덧붙여 맨 끝 달이었던 페브러리가 둘째 달이 되었다. 2월은 단병접전의 좋은 예로 다른 달보다 날짜가 적지만 뛰어난 인물이 많이 태어났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노예해방을 이룩한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9대 W.H. 해리슨, 그리고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생일도 2월이다. 음악가들도 많이 태어났다.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와 메리언 앤더슨,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 작곡가 조지 헨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등이다. 천문학자 갈릴레오, 철학자 찰스 다윈, 작가 빅토르 위고, 화가 그린 우드,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등도 이달 태어난 인물들이다. 2월의 이름처럼 이 세상엔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영국은 17세기까지 국교인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 이외에는 종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영국인이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자신을 ‘청결한 교인’이란 의미로 ‘퓨리턴’ 이라 불렀다. 이 퓨리턴들 가운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건너온 개신교 교인들이 바로 그 이름난 ‘필그림’들이다. 우리는 짧은 달 2월을 통해 아무리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나 푸대접을 받는 사물이라도 그 속에 깨끗한 정신이나 특성이 스며있으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새봄을 맞아 굴속에서 뛰쳐나와 힘껏 기지개를 켠다는 ‘그라운드 호그 데이(Ground-Hog Day)’의 마멋처럼.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잉글랜드 국교회 영어 이름 천문학자 갈릴레오
2026.02.24. 18:44
그림 한구석에 적혀있는 화가의 서명은 문장으로 치면 마침표 같은 것이다. 완성된 작품이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위작 소동이 벌어지면 가짜냐 진짜냐를 가리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대개 영어로 멋지게 일필휘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작가는 한글로 서명한다. 정겨운 느낌이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등장하는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아이들의 모습 한구석에 쓰여 있는 ‘수근’이라는 한글 서명을 보면 그림 안의 인물들이 정겹게 수군수군 대는 것 같다. 좀 지나친 생각인지도 모르겠는데, 한글 서명을 보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민족적 긍지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부 작가들이 한글 서명을 고집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영어로 서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한글 서명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그림의 기법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내용과 정신은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글 서명은 그런 바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 사회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주체성을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6·25 한국전쟁, 미국 문화의 홍수….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고, 서구 문화를 비판적으로 골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신 차려보니 서구 문화가 이미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가령, 어린 시절 아무런 생각 없이 뜻도 모르고 미국에서 들어온 노래 팝송을 부르며 놀았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미국의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헬로 헬로쪼코레또기브미, 헬로 헬로 먹던 것도 좋아요.” 같은 비굴한 노래에 그런 상황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상황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민족정신 회복, 우리 것 찾기 운동 등이 중요하게 대두하기 전까지 서양 흉내 내기가 주류를 이룬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글 서명이 한결 더 반가운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드러낸 예술가들은 한국 이름을 고집한다. 백남준, 윤이상, 이응로, 오순택, 정명훈, 정경화, 서도호, 강익중, 손열음 등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보다는 이름이 갖는 자기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편리성을 앞세워 영어 이름을 만들고 보는 한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쉽다는 편리성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특히, 결혼해서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딴 여자가 미국 이름을 만든다면, 이름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우리 주위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영어 이름을 갖는 것이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인기가수가 영어 이름을 가지고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상품명이나 가게 이름이 영어 범벅인 일들은 좀 당황스럽다. 이 같은 자존감, 자기애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기본자세가 작품이나 예술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눈여겨보는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글 서명 한글 서명 영어 이름 한국 이름
2024.10.03. 1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