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부끄러운 후회
미주문단에 몸을 담고 살아온 지 어언 이십 년이 넘었다. 오래전 신문기사로 문학단체들이 하나 둘 창간하는 소식을 들으며 깊은 관심을 갖곤 했다. 내 글쓰기는 대학에서 수필을 좋아해 학보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다. 집안에서는 오빠와 언니가 벌써 시를 쓰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늘 무엇인가 쓰셨다. 결혼 후에는 중앙지 신문에 독자투고를 했고, 대구에서는 주부수상에 자주 나왔다. 그런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전모 논설위원님. 우리가 모르는 개개인의 삶의 일정은 묘하기도 신비롭다. 어느 날 직장에 다니던 딸아이가 내가 쉬지 않고 여태 써온 글들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책 한 권이 될 터인데 출판비를 선물할 테니 출간하시란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말을 딸이 나에게 툭 던진 것이다. 그러면서 어머니인 나의 일생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미국에 이민 와 파트타임일을 하다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사는 내가 늘 안타깝다는 그 애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출간키로 작정하고 원고를 3년 동안 준비하며 등단을 고려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인연이 또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나간 나의 고국방문 길에 곡성 성륜사의 청화스님의 장례식에서 국문과 교수이고 고향 문학지의 편집 주간으로 있는 동창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속에서 흐느끼며 땅만 쳐다보고 걷는 나를 바로 앞에서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여고 졸업 후 보는 친구였다. 또 우연히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정모 시인이 수필가협회의 회장에게 연락해 박모 회장이 회원으로 들어오라고 다정한 전화가 걸려왔기에 협회에 가입했다. 그런 후 LA의 문학회 행사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한 회원이 등단연도를 물어 고국의 친구와 의논했다. 그때야 등단하면 문학지를 사주어야 하는 절차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미국에 문학 강사로 온 분이 모임에서 우연히 ‘수필시대’라는 격월간지 책을 선물 받으며 그분을 통해 같은 해에 중앙지로 등단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요구 사항들을 나는 모두 거절했다. 영어회화가 어렵고 문화가 다른 이민생활이 힘들다는 것도 주위의 한국인들을 보며 배워야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니 사람교류가 거의 없었지만, 라디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사회를 접했다. 집에서 나름대로 경전을 읽으며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고 애를 썼다. 취미인 쓰기는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한 번 도 중단하지 않고 공책에 정리하며 발표도 했다. LA에서 열리던 불교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여러 사람이 내 글을 읽었다며 인사를 건네오기도 했다. 나의 이마에 붙은 재미수필가. 등단한 후로는 한국에서 발행하는 문학지들을 구입해 읽으며 치열하게 수필공부를 했다. 과연 좋은 수필은 어떤 글일까를 고민하면서…. 시인도 소설가도 아무나 모두 덤벼들어 잡탕 글이라며 착각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의 모욕적인 말들이 정말 나는 싫었다. 문학적인 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좀 배우고 싶어서 LA의 문학 행사에 다니곤 했다. 때론 먼길 가는 나를 걱정해 남편으로부터 지독한 말로 야단을 맞으면서도 바람난 여자처럼 운전대를 잡았다. 저녁 늦게 행사가 끝나면 자정이 되어서 들어오는 일이 보통이었기에, 종종 그이도 따라나섰다. 평회원으로 회비를 내기도 했지만 후원해주고픈 단체장이 나올 때는 이사로도 잠시 참여했다. 돌아보니 부끄러운 일도 있다. 문학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가 너무 경력이 없었기에 행여나 기대를 했었나 보다. 수필가협회에서는 상을 만들어 놓고 수년 동안 수상자가 없다는 말에 화가 나 내가 응모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진과 함께 신문지상에 기사로 나온 심사위원이 상을 받은 것이다. 문학상을 만들어 놓은 회장에게 문의하니 세 사람이 추천을 했기에 주었다는 것이다. 모 씨가 심사위원직을 내려놓고 상을 받은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분을 문학선배라며 존경했는데 허무했다. 또한 회장들의 열정도 계속 이어지지 않고 아예 문단을 떠나버린 사람도 여럿이다. 회장 중에는 공금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사용하는 일들도 많아 여기저기 말들이 많았다. 내가 한번 이사회에 참석해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떠나야 마땅하다. 오래전 일이다. 무슨 자기들이 무슨 문학의 대부나 대모처럼 행사하며 등단의 줄을 만들기도 하는 일들도 많아 당한 사람들이 억울해 알려주며 말해주었다. 그래서 고국에 사시던 나의 국어 선생님께서 오래전부터 예술계(음악, 문학, 미술)가 너무 썩어 문드러졌으니, 등단하지 말라고 하셨던가. 늘 평소의 맑은 마음에서 좋은 글이 우러난다며 격려해주시던 은사님. 솔직히 나는 학창시절 워낙 뛰어난 시인 친구들이 여럿이라 문학이라는 말을 음미해 본 적도 없었다. 영양가 있는 끼니도 어려웠던 환경에서 도서실에 가 겨우 책들을 읽어보던 지난날이었다. 성인이 되어 수필을 쓰며 문학과를 나온 친구들이 한 때는 부러웠었다. 그런 친구들 중에 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정년퇴직한 송옥은 지금도 내 수필을 좋아해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힘이 나게 해주는 몇 마디를 자주 보내주곤 한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기자님의 초청으로 10년 넘게 칼럼을 쓰며 태평양 건너 원고를 띄워 보낸다. 자랑스러워 했던 나라도 시끄럽지만, 양심도 없는 문인들의 다양한 추태를 종종 보면서 글쓰기를 그만 둘까하고 망설이다가 또 세월을 보낸다. 뭐 그리 경력이 중요하다고 문학상 기웃거리며 응모했던 부끄러운 지난날의 일도 후회한다. 인생 마감하는 날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문인이야말로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올바르게 살면서 우리 사회에 맑은 목탁소리의 울림으로 남아야 할 것이 아닐지. 참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다. 최미자 / 수필가문예마당 후회 수필 문학회 행사 문학 행사 오래전 신문기사
2025.07.24.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