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대물림, 가족 관계 잠식
가족은 종종 사랑보다 침묵을 상속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 유예된 책임, 전달되지 못한 애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구조가 된다. '센티멘탈 밸류'는 바로 그 침묵이 어떻게 예술의 언어로 변환되고, 다시 가족 관계를 잠식하는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노르웨이 출신의 요아킴 트리에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감독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가족 내 아버지와 딸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드러내고 화해를 제시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이해받지 못한 사랑이 남긴 감정의 잔여물, 제목이 암시하는 바로 그 '감정적 가치(Sentimental Value)'를 조심스럽게 해부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재회가 있다. 그러나 이 재회는 회복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모인 아버지와 두 딸은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오래전 가족이 살던 저택은 이 어긋남을 시각화하는 장소다. 아버지에게 이 집은 예술가로서의 출발점이자 한때의 명성과 실패를 소환하는 장소인 반면, 딸들에게 이 공간은 부재와 회피, 설명되지 않은 상처가 겹겹이 쌓인 기억의 저장소다. 같은 공간을 두고도 서로 다른 감정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이 가족이 공유해온 시간이 결코 동일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트리에는 이 불일치를 설명하거나 중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신뢰하는 것은 해명이나 진술이 아니라, 그 어긋남이 지속되는 상태 그 자체다. 주인공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는 한때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영화감독이다. 그의 부재는 의도적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딸들의 성장기에 깊은 공백을 남겼다. 두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와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터 릴레아스)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공백을 견뎌왔다. 노라는 분노와 거부로, 아그네스는 중재와 유보로 그 시간을 통과했다. 이들의 차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상처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관점에 있다. 구스타브가 제안하는 자전적 영화는 이 가족의 균열을 봉합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를 다시 호출하고 소유하려는 또 하나의 행위다. 그는 딸 노라에게 주연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지만, 노라는 이 제안을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요구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가족의 고통을 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고통은 언제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시 상처받아도 되는가. 트리에 감독은 대물림된 트라우마를 극적인 폭발이나 갈등의 분출로 처리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고성이 거의 없다. 대신 어긋난 질문과 엇갈린 대답, 말해졌으나 도달하지 못한 문장들이 반복된다. 인물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거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예술은 치유이자 폭력이다. 트리에는 이 모순을 끝내 해결하지 않는다. 연출은 철저히 절제돼 있다. 트리에는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음악이나 편집을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장면일수록 음악은 사라지고, 카메라는 고정된다. 인물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연출은 한 발 물러선다. 그 결과 관객은 감정을 ‘전달받는’ 대신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가 조용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소모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엔딩 크레딧 이후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끝까지 존중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정서적 밀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특히 구스타브를 연기한 스카스가드의 연기는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그 부인의 실패를 미세한 균열로 표현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방어하지만, 그 방어는 완벽하지 않다. 이성적인 언어 사이로 감정이 새어 나오는 순간들이 축적되며 인물은 선과 악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딸들의 연기 역시 전통적인 성장 서사를 거부한다. 노라는 피해를 입은 인물이 반드시 용서나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대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끝까지 유지한다. 아그네스 또한 명확한 치유자나 중재자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들은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머무는 인물들이다. '센티멘탈 밸류’는 3월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최다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을 수상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연기상 부문에서는 수상 가능성이 높다. 구스타브 역은 오스카 연기상에 최적화된 캐릭터다.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물, 말은 이성적이지만 감정은 계속 새는 상태,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은 회색 인물 구스타브를 연기한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절제 연기의 표본을 보여준다. 딸 노라 역 역시 오스카가 선호하는 캐릭터다. 피해를 입은 인물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 전통적으로 화해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구조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최근의 연기상 흐름과도 맞아떨어진다. 여우주연상 부문에서 뚜렷한 선두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레나테 레인스베의 수상 가능성은 높게 점쳐진다. '센티멘탈 밸류’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혼자 튀는 명연기가 없다. 누구 하나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서로의 리듬을 침범하지 않으며, 침묵을 함께 유지한다. 영화 전체의 톤을 완성시키는 연기, 연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연기, 화려하지 않지만 아카데미가 가장 신뢰하는 연기 유형이다. 영화는 곳곳에 코믹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유머는 비극을 상쇄하지도, 희망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어떤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종료되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 그럼에도 계속되는 시간이다. 영화는 그 과정이 남긴 감정의 흔적에 집중한다. 예술영화의 사유적 밀도와 멜로드라마의 감정적 울림을 결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센티멘탈 밸류’가 던지는 질문은 사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침묵이 남긴 유산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이제 각자의 몫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잠식 관계 가족 관계 연기상 부문 오스카 연기상
2026.02.11.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