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광장] 꽃동네를 아시나요
테미큘라 꽃동네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5번 프리웨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테미큘라를 만나면 79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79번 남쪽으로 계속가면 워너 스프링스, 엘림 유황온천, 아구아 깔리엔떼 소금 온천이 있는 큰 리조트 공원 등이 있어 한인들이 많이 방문해 익숙한 길이다. 테미큘라를 지나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꽃동네’ 라는 작은 한글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오른쪽 산등성을 올라가다 산마루를 지나면 맞은편 큰 산과의 사이에 아늑히 자리 잡은 꽃동네 피정 센터가 나온다. 우거진 숲 속에 안기듯 자리하고 있는 센터는 가까운 곳에 연잎 가득한 호수도 있어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하고, 깊이 자신을 성찰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여러 동의 숙박시설을 깨끗이 관리하는 일은 한국에서 온 4명의 수녀가 모두 맡아 하고 있었다. 음식 또한 깨끗한 식당에서, 호텔 못지 않은 식사를 수녀들이 직접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꽃동네라고 하면 누구나 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버려진 사람들 하나하나를 모두 꽃이라고 생각하며 귀히 여기는 곳이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꽃동네를 태어나게 한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를 알게 되었다. 최귀동씨는 충북 음성군의 무주에 있는 부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너무 귀한 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귀동으로 불리었다. 일제 강점기, 징용에 끌려가 북해도로 갔다. 열악한 탄광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탈출하다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후유증으로 약간의 정신이상이 되고, 다리도 절뚝거리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끌려가 연락두절이 되자 낙심하다 마약에 빠졌고,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고무친이 되어 무극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지내며, 여기저기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다행히 한국이 산업화되기 전에는 인심이 후했다. 다 어려운 처지이니 서로 돕고 살자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병들어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얻어 온 밥을 같이 나누어 주고 다리 밑에 데려와 같이 살았다. 그렇게 데려와 돌 본 사람들이 18명까지 늘었다. 1976년 9월, 무주 성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가 이를 보게 되었다. 최씨의 삶에서 감동을 받은 오신부는 그를 돕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음성에 처음 만들어진 꽃동네이다. 병들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을 꽃같이 귀히 여기는 아름다운 동네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지금은 해외에도 꽃동네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어 현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한편, 사람들에게 스스로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려운 이웃에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돕는 수련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살아 보고 싶은 사람들,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를 사유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 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성규 / 베스트영어훈련원장열린광장 꽃동네 꽃동네 피정 오웅진 신부 프리웨이 남쪽
2025.10.26.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