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창밖으로 순백의 세상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이토록 아름다운 설경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밤에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지운다. 지금도 눈은 흩날리고 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 사물은 본래의 모습을 들킨 듯 수줍게 희끗희끗 그 자태를 드러낸다.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자주 온다. 오늘처럼 고요한 날에는 눈이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걸어온다. 눈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지 않을까. 눈도 자세히 보면 그 결정체가 다 다르다. 이처럼 제각각인 한 송이 한 송이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밤을 지새워 아름다운 설국을 지은 것이다. 눈은 옛날에도 내렸고 지금도 내린다. 물이 순환하듯 눈도 자연스럽게 순환하니 예전에 나에게 내렸던 눈이 오늘 나에게 내리는 것은 아닌지 내 눈과 귀를 활짝 얼어놓고 기다려보아야겠다. 어렸을 적에는 무조건 눈이 좋았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8~9살 정도였을까. 남자애들 못지않게 활발했던 나는 눈만 오면 신발 밑에 긴 대나무를 붙들어 매고 스키 타는 흉내를 내며 동네를 활개 치고 돌아다녔었다. 그 덕택에 내 볼은 추위에 얼어 터져 늘 쓰라렸던 추억이 있다. 여고 2학년 때 불어 선생님을 혼자 흠모했던 적이 있었다. 수줍게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놓고 혼자 설렘을 감추지 못한 채 바람맞은 적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불어의 매력에 푹 빠져 불어와 불어 선생을 한 동체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예쁜 추억 하나는 여고 3학년 12월, 한창 도서관에서 입시 공부로 투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밖에 눈 온다” 하고 외쳤다. 우리 수험생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밖으로 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천사를 반겼다. 그러고는 누구의 인도도 없이 각자 온몸으로 예기치 못한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도서관 주위만을 돌다가 차츰 반경을 넓혀갔다. 우리 수험생들은 입시 공부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른 모든 계획이나 생각을 젖혀두고 마지막 준비의 점검 단계에서 모두 편두통을 앓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아름다운 방문객에 우리는 황홀했다. 그날 밤은 완전 바람 한 점 없이 엄지손톱만 한 함박눈이 펑펑 펑펑 소리 내며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눈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이미 세상은 하얗게 다 지워졌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순백의 세계만이 있었다. 하얀 숨이 입에서 새어 나갔다. 하얀 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량한 공기를 코로 깊게 들이마셨다. 노출된 얼굴이 아프도록 시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이때였다. 계속 곁에 걷고 있던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소개하면서 나를 안다고 했다. 계속 주시를 해왔고 자신의 원래 계획은 우리 모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사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난 깜짝 놀랐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안면이 있고 키가 훤칠하며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심장이 튕겨 나올 듯했고 갑자기 온몸에 온기가 느껴졌다. 그 후 지금까지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선물을 조건 없이 준다. 비, 바람, 눈, 하늘과 구름, 나무, 꽃과 같은 아름다운 생명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태풍, 쓰나미 그리고 지진과 화산 폭발처럼 무서운 파괴력도 동시에 준다. 눈은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우리에게 눈은 아름다운 설경과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다. 하지만 이틀 전 눈이 온다는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일을 나가야 하는 나에게 근심 덩어리였다.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아프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의 선호도는 줄어간다. 특히 운전자에게 눈은 사고뭉치다. 눈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지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어떤 관점에서 눈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눈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오늘 내 창밖에 보이는 Holy Tree 위에 앉은 눈이 햇빛에 반짝인다. 환상이다. 정명숙 / 시인오피니언 뜨락 불어 선생님 입시 공부 도서관 주위
2025.02.24. 21:22
나이가 들면서 많은 질환이 찾아온다. 특히 아주 악질적인 질환이 들어온다. 각종 암이 그런 경우다. 그래서 충격에 빠져 바로 다음날 죽을 것처럼 실망하기가 쉽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적인 고난을 끌어내기 위해서 암을 사용해서 그런지 일설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암과 함께 살아가며 치료에 전념하는 외국인들과 달리 너무 실망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세컨드 오피니언이 중요하다. 다운타운에 있는 대형 종합병원 건물 입구에 '센컨드 오피니언 웰컴'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을 정도다. 70대 한인 윌리엄 백 씨는 수년 전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을 겪었다. 유명한 한국의 종합 검진 센터를 방문해 각종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큰 병에 걸려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백 씨는 이런 진단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인생 정리 작업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손 쓸 것이 없다는 얘기에 백 씨는 70년 일생을 마무리 하며 매우 슬픈 나날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백 씨의 주치의가 연락을 해왔다. 수 십 년을 진료해왔는데 주치의의 판단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치의 설득에 못 이겨 백 씨는 몇 가지 검사를 더하고 한국의 유명한 대형병원에서 오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세컨드 오피니언(second opinion)' 덕분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검사도, 의사도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큰 병일 경우, 주치의를 신뢰하더라도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하는 것이 적절한 경우가 있다. 현재 치료가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두 가지 이상의 진단이 있을 수 있다. 수술이나 약물 치료와 같이 여러 가지 치료 옵션이 있을 수 있어서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때때로 환자는 심각하거나 드문 질환을 앓고 있으며 자신의 질환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의를 만나고 싶을 수 있다. 여러 질환이 동일한 증상을 보일 수도 있으므로 복잡한 질환을 진단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미로를 찾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얻으려 할 때, 2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한다고 해서 주치의와 등을 져서는 안된다. 환자는 누구나 자신의 상황에 맞는 올바른 의료팀을 찾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둘째, 주치의와 좋은 관계라면 주치의를 통해서 전문 분야 의사를 계속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환자가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을 진단 받았다. 주치의는 종양 전문의를 소개했는데 환자가 막상 그를 만났지만 올바른 소통을 하지 못했다. 환자는 주치의에게 알렸고 주치의는 다른 종양 전문가를 추천할 수 있었다. 친구나 가족에게 추천을 요청해서 직접 찾을 수도 있다. 보험 회사의 의료 전문가 목록과 같은 검증된 온라인 정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주치의는 장기적으로 1차 의료 지원을 계속 제공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세컨드 오피니언을 받을 수 있지만, 일찍 받을수록 좋다. 필요한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컨드 오피니언이 초기 진단을 확인, 수정 또는 변경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연구가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메이요 클리닉에서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한 환자의 21%가 새로운 진단을 받았고 66%가 수정된 진단을 받았다. 때로는 보험 회사에서 세컨드 오피니언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특히 암이나 수술과 관련된 경우였다. 먼저 보험 회사에 연락하여 보장을 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좋다. 세컨드 오피니언은 대면이나 온라인으로도 가능하다. 일단 진료가 결정되면 진료 기록과 검사 결과를 포함한 모든 적절한 기록을 보내서 준비하면 된다. 주치의와 연락을 유지했으므로 쉽게 요청할 수 있다. 환자 포털을 제공하는 의료 네트워크나 헬스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 상당한 정보를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사전에 질문을 적어두는 것이 좋다. 진료를 친구나 가족을 데려가는 것이 좋다. 불안할 때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동반자가 환자 대신 메모를 하고 질문을 할 수 있다. 진단과 치료 계획에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첫 진단과 세컨드 오피니언이 다를 경우 치료 방법 결정을 내리기 위해 세 번째 의견이 필요한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환자는 언제나 자신에게 맞는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장병희 기자오피니언 세컨드 세컨드 오피니언 오피니언 웰컴 초기 진단
2024.11.17. 17:00
“봄바람처럼 다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외상으로 재임(2012~17년)할 당시 일본 외무성 직원에게 들은 ‘기시다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직사회에서는 흔한 심기 경호로 애를 먹는 일도 별로 없다고 했다. 역사 도발을 일삼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로 인해 한·일 간 갈등이 심각했을 때라 부드럽고 정중한 스타일의 외상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한국에 다행인 측면도 있었다. 지금의 양국 관계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개선됐다. 지난달 17일 기시다 총리가 먼저 제안해 이뤄진 통화에서 기시다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미·일 정상회담 결과를 직접 설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예전 같았으면 미국을 통해 사후 설명을 들으면 들었지, 일본 측으로부터, 그것도 최고위급에서 이런 설명이 이뤄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양 정상 간 ‘브로맨스’는 환영하지만, 일본 측이 응당해야 하는 실질적인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일례로 윤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을 결단한 지 1년이 넘었지만, 필요 재원 마련에 일본 기업의 참여는 전무하다.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윤 정부가 ‘의지’만으로 여론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당장 악재가 층층이다. 일본이 해마다 교과서, 외교청서, 방위백서 등에 담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 주장은 ‘캘린더성 도발’로 부를 정도로 끊임이 없다.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라인’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지분율 조정을 통해 네이버의 힘을 빼 라인을 ‘강탈’하려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올 7월 결판이 날 일본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순식간에 한·일 관계의 기류를 바꿀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최소 12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돼 강제노역에 시달렸지만, 일본은 이를 누락한 채 에도 시대 때부터 금을 캐온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만 부각해 등재를 시도한다. 2015년에도 일본은 강제노동 사실은 쏙 뺀 채 나가사키(長崎)시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등을 등재 신청했다. 하지만 결국 강제노동 역사를 인정하고 기록하기로 약속하며 ‘조건부 등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약속을 아직 완전히 다 지키지도 않은 일본이 사도 광산에 대해 또 꼼수 등재를 고집하는 건 어떤 브로맨스로도 막을 수 없는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기시다 총리의 봄바람은 한국민의 마음에 닿기 힘들다. 유지혜 / 한국 외교안보부장오피니언 봄바람 한국 조건부 등재 강제노동 역사 꼼수 등재
2024.05.08. 21:30
“내 배에서 나온 우리 아이들, 왜 이렇게 다른 거야” 하며 힘들어하는 부모들을 위해 계속해서 자녀들을 어떻게 각자의 기질에 맞추어 장점은 강화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효과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은 세 번째 기질인 사색형에 대해 알아본다. “우리 아이는 창조적이고 사색을 좋아하며 많은 시간을 공상에 보내요.” 이런 말이 나온다면 이런 자녀는 사색형이다. 사색형은 우울질, 영어로는 Compliant 혹은 Melancholic이라고 한다. 이런 기질의 자녀들은 예술적이며 완전주의자이기 쉽다. 동식물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은,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않지만 친구라고 여겨지면 아주 충실한 친구가 되며, 조용하다가도 다혈질처럼 개방적이어서 부모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런 자녀들의 약점은 완전을 추구하다 보니 자신에게조차 비판적이 되어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이로 인해 자화상이 빈약할 수 있다. 결정을 내리기를 두려워하고 불평이 많으며 감정을 쉽게 상한다. 이런 사색형 자녀들을 가지신 부모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막중한 창조력과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연구나 창조하는 것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또한 부정적 사고를 하기 쉬운 이들이 긍정적인 사고와 대답을 하도록 대화를 이끌어 주는 것도 부모의 할 일이다. 우울질 사람들은 정원의 많은 꽃보다 꽃 가운데 있는 몇몇 잡초가 더 잘 보인다. 본인에게도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완전을 기대하며 실망을 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수를 할 때는 비난 대신 용납을 해주면서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모든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색형 자녀들을 부모가 지나치게 통제하면, 이 아이들은 겉으로는 동의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적대감을 쌓게 되며, 하고 싶은 일을 숨어서 결국 하고 만다. 사색형 기질을 우울질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기질의 자녀들이 다른 기질보다 불안하고 우울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곁에서 함께 한다는 확신을 주고 즐거운 경험을 많이 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면 좋다. 이 기질의 자녀들은 디테일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재정 분야, 학문, 연구, 기록하는 일, 음향이나 예술 등의 일에 적합하다. 부모가 사색형일 경우 어떨까? 사색형 부모가 사색형 자녀를 만나면, 이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고 자녀의 행동을 늘 분석한다. 그러다 보면 자녀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으며, 그럴 때 비판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늘 자신들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모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이었다는 생각은 성인이 되고 나이가 많이 들어도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들이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색형 자녀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수준이든 무조건 사랑하고, 그들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늘 인식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기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느 기질이든 장단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장점을 항상 인정해주고, 단점을 너무 싫어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기질과 성격은 타고나지만, 부모나 주위 사람들과의 성품 대화나 사회화를 통해 더 좋은 성격으로 변할 수 있다. 다음 칼럼에는 마지막으로 점액질·안정형 기질에 대해 살펴본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오피니언 자녀교육 맞춤형 기질인 사색형 사색형 자녀들 사색형 부모
2023.12.06. 21:31
코로나바이러스 바로 직전 두바이-아부다비를 여행했다. 현지 가이드는 우리를 전통적인 두바이 가정으로 데리고 갔다. 고유 의상을 입은 젊은 여인은 미국인들에게 “뭐든지 물어보세요” 했다. 그녀는 많은 미국인이 아랍인들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 기회에 조금이나마 해소했으면 하는 것 같았다. 뭐든지 질문하라고 해서 아무거나 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족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테러리즘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종교와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 고유 의상이다. 워낙 볕이 따가워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고 대답했다. “UAE는 현재도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느냐” “옛날이야기다. 당신은 과거를 말하고 있다. 요즘은 절대다수가 한 남편, 한 아내를 가지고 있다. 여기선 데이트하기가 어려워 일단 결혼부터 하는 경우가 많아 이혼율이 높다.” 이번 여행 중 두 번 현지 가정, 농장에 초대받았다. 크로아티아에서 400년 된 가족농장에서 재배한 채소, 직접 기른 돼지, 닭고기를 먹었고, 손수 빚은 와인을 마셨다. 주인은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아들, 딸이 춤을 추었다. 슬로베니아에서도 현지 유명 식당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전통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나이든 댄서가 관광객들과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추었다. 내가 이용하는 미국 여행사는 어느 나라를 가든지 현지인과의 문화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오바마 시절, 쿠바는 잠깐 미국 여행자를 받아들였다. 여행 목적은 교육 및 문화교류, 그렇지 않으면 입국비자를 받을 수 없다. 하바나에서 현지 아티스트를 만나고 커뮤니티 센터를 방문했다. 루마니아, 베트남에서는 잘 사는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아메리칸이 찾은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미의 에콰도르, 페루에서는 현지 와이너리, 흙담집을 찾아 고유 음식을 같이 했다. 나는 에세이를 쓰기 때문에 여행을 ‘심각하게’ 하는 편이다. 출발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질문을 준비한다. 여행 중 나처럼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미국인은 책을 읽고 오지 않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 즐기고 와인을 마신다. 젊은 배낭족들은 캐슬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험한 트레일을 완주하며 싼 호텔에 머무른다. 골목 뮤지엄을 찾고, 현지인과도 쉽게 어울린다. 발칸 반도에는 인구 수백만의 작은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수 세기 동안 종교분쟁을 겪었고 크고 작은 전쟁에 휩쓸렸다. 여행을 떠나가 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돌아왔다고 반가워할 이가 있을까’ 생각했다. 또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를 들어준 독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최복림 / 시인오피니언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여행기 베니스 크로아티아 고유 의상
2023.04.12. 21:14
한 지붕 밑 두 사람 영 다르게 산다 한 사람은 새벽이 부산하고 또 한 사람은 밤늦게부스럭거린다 야채는 김치만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샐러드 아니면 속이 부대끼는 사람도 있네 동물성 없으면 반찬 없다는 투정은 싱싱한 야채 만나는 신바람 앞에 시무룩해지기도 젊을 땐 일터에 매달려 뭐가 뭔지 모른 채 허둥대던 나날 저어기 멀리 보내고 세월 속에 아가들 제 둥지 찾아 떠난 뒤 두 사람 하루는 저마다 제 장단이 편해진다 그 기인 시간 숨 막히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다름의 미덕 함께 심어본다. 성정숙 / 시인·롱아일랜드오피니언 지붕밑 기인 시간
2022.03.04. 17:39
사람의 레이블 삶의 뜨락에서 양주희 수필가 지난해 추수감사절을 보낸 직후 주문 판매를 하시는 분이 스카프 500장이 약간 넘는 박스를 들고 오셨다. 스카프 하나하나에 레이블을 붙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 많은 일을 가게도 바쁜 시기에 가져오시다니. 그분은 내가 2~3일 사이에 일을 마쳐 주어야 자기가 주문받은 손님에게 팔수 있는 여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할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게 옷을 다른 곳에 내보내고 그 스카프를 내가 하기로 했다. 그분도 이때 팔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니 나보다 그분의 사업이 걱정되었다. 코로나19로 모든 비즈니스가 땅바닥을 내려친 마당에 조금이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분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원단이 실크라서 촉감이 부드럽고 반질반질하며 색깔 또한 아름다웠다. 질감을 만지면서 보드라움이 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조그마한 검은색 레이블을 스카프 한쪽 모서리에 부치는 작업이다. 완전히 공장에서 한 가지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같이 손을 놀려야 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아 손가락을 바늘이 찌르기도 했다. 이런 단순한 일이지만 스카프는 이 레이블이 없으면 상품으로 가치가 없었다. 100% pure silk, dry clean only, made in usa. 우리가 많이 보는 옷마다 부쳐져 있는 레이블. 이 조그마한 딱지도 상품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게에서 옷을 세탁하기 전 드라이 크리링을 해야 할지 물세탁을 해야 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꼭 옷에 부착된 레이블을 확인한다. 그 레이블에는 섬유 종류와 세탁방법 손질하는 법까지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면 종류는 물세탁이 깨끗하게 빨아진다. 어쩌다 레이블을 잘못 읽거나 옷에 감촉을 감지하여 드라이 크리링해야 하는 옷을 물세탁 하여 망치는 일이 있다. 폴리에스터가 요즈음 가죽같이부드럽고 보기에도 가죽으로 보인다. 가죽 코트를 폴리에스터로 착각하여 물빨래했다. 세탁기에서 꺼내는 순간 확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행거에 걸어 말렸는데 딱딱하고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옷이 되어버렸다. 손님이 코트를 찾으러 올 날짜가 되었다. 어떻게 손님을 대할까 옷 가격은 얼마나 비쌀까 손님이 화를 내고 소리치면 난 무어라 대답할까 그리고 협상은 이루어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온종일 내 머리를 맴돈다. 아니야, 이것은 완전 내 실수니까 손님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어야 돼. 이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두렵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솔직하게 손님에게 설명했다. 가죽 세탁 공장에 보내면 세탁비도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번거로워 여기서 세탁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내가 배상을 하겠다고 했다. 뜻밖에 손님은 코트를 오래 입었는데 세탁해서 누구를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 누구는 생활이 어려워서 코트를 사 입을 수 없었는데 이 코트를 보면 입고 싶어 했다고 한다. 손님이 코트를 살 수 있는 값을 요구했는데 아마도 그 돈으로는 사기 어려울 것 같았다. 냉큼 나도 네가 요구한 돈만큼 보태겠다고 했더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사람도 각자 가지고 있는 인성과 품성에 맞는 레이블이 있다. 누구나 보면 알아차리는 그것 말이다. 이 손님처럼 내뿜는 따스하고 인자하고 없는 사람과 나누며 함께하는 레이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오피니언 양주희 뜨락 검은색 레이블 양주희 수필가 가죽 코트
2022.02.02. 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