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아카데미상 작품상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이하 원 배틀)’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을 포함한 주요 부문을 석권한 것은 21세기 시네마가 상실해가던 ‘웅장한 서사의 품격’에 대한 아카데미의 응답이자 안도감의 표현이다.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Vineland)’를 원작으로 삼아 20세기 후반 정치적 격변기의 공기를 복원해낸 ‘원 배틀’은 거시적인 역사 담론과 개인의 미시적인 고통을 하나의 비단 위에 정교하게 직조해냈다. 올해 작품상 경쟁은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윤곽이 잡혔다. ‘원 배틀’은 산업적 스케일과 작가적 야심을 동시에 확보한 작품으로, 여러 부문에서 고른 지지를 얻으며 레이스의 중심에 섰다. 특정 부문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완성도와 동시대 정치적 긴장을 품은 서사가 아카데미의 선택과 맞아떨어졌다. 작품상은 언제나 ‘가장 완벽한 영화’라기보다 ‘가장 많은 분과가 동의할 수 있는 영화’에 가깝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킨 결과다. 오리지널 각본상에서는 ‘시너스(Sinners)’가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원 배틀’의 독주가 시상식의 뼈대를 이루었다면, 그 뼈대를 뒤흔든 것은 라이언 쿠글러의 ‘시너스’였다. 16개 부문이라는 기록적인 후보 지명만으로도 이미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이 영화는, 뱀파이어 호러라는 장르적 틀 안에 흑인 역사의 비극과 실존적 공포를 녹여내며 오스카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문법을 도발했다. 뱀파이어 호러와 서던 고딕, 그리고 뮤지컬이라는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장르들을 한 용광로에 밀어 넣은 이 ‘불온한 걸작’은 기존의 할리우드 문법과 전열에 거대한 미학적 파열음을 만들어 냈다. 비록 작품상은 놓쳤으나 ‘시너스’의 마이클 B. 조던이 남우주연상을 받는 순간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이번 시상식 최대의 이변을 연출해냈다. 1인 2역을 통해 인간 내면의 선악이 어떻게 공존하고 충돌하는지를 육체적으로 증명해낸 그의 연기는 장르 영화의 연기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정점이 어디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오텀 듀랄드 아카포 감독은 여성 촬영감독으로서 최초로 촬영상을 거머쥔 사건은 ‘시너스’가 단순한 장르물을 넘어 시각 미학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음을 선포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루드윅 고란슨의 음악상 수상까지 더해진 ‘시너스’의 선전은 할리우드의 자본력이 가장 전위적이고도 철학적인 공포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시 버클리의 ‘햄넷’은 올해 오스카가 거둔 가장 서정적인 성취 중 하나다. 중국계 클로이자오 감독이 빚어낸 이 섬세한 시대극에서 버클리는 ‘슬픔’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손에 잡힐 듯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구현해냈다. 셰익스피어의 아내 아그네스로 분한 그녀는 대문호의 그늘에 가려진 한 여성이 상실을 견디고 삶을 재건하는 과정을 고요하지만 강렬한 응시로 담아냈다. 그녀의 연기는 엠마 스톤의 ‘부고니아’나 로즈 번의 ‘다리가 있다면 널 걷어차 버릴 텐데’가 보여준 전위적인 연기 스타일과는 또 다른 층위의, 뿌리 깊은 정서적 힘을 보여줬다. 아카데미가 ‘햄’과 제시 버클리에게 보낸 지지는, 이제 영화가 거시적인 역사 담론에서 벗어나 그 역사의 틈새를 메우고 있던 이름 없는 자들의 일상과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제장편영화상의 영예를 안은 요아킴 트리에의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는 북유럽 시네마가 도달할 수 있는 감정적 정밀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트리에 감독이 ‘오슬로 3부작’ 이후 다시 한번 인간의 상실과 재건을 다룬 이 영화는 세밀한 인물 묘사와 북유럽 특유의 서늘한 미장센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준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이하 케데헌)’가 거둔 성과는 매우 흥미롭다. ‘케데헌’의 수상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부문의 수상을 넘어 할리우드 산업 지형과 문화적 위계가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디즈니와 픽사의 공고한 성벽을 허물고 수상의 영예를 안은 이 작품은 한국의 대중문화 에너지가 어떻게 글로벌한 보편성을 획득하고 예술적 독창성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리듬 뒤에 숨겨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아카데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으며, 이는 앞으로 애니메이션 장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간 K-팝을 소재로 한 북미 콘텐츠들이 대개 산업의 화려한 표면이나 팬덤의 현상에 주목했다면, ‘케데헌’은 K-팝의 리듬과 역동성을 ‘애니메이션적 활력’으로 완벽하게 치환해냈다. ‘케데헌’이 이룬 성과는 하위문화로 치부되던 특정 지역의 팝 에너지가 보편적인 ‘장르 미학’으로서 할리우드 주류 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카데미가 디즈니나 픽사의 정교한 서사 대신 소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작화 스타일을 선택한 것은, 이제 관객들이 정제된 완성도보다 역동적인 ‘시각적 체험’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있음을 방증한다. K-팝 특유의 화려한 미장센과 퍼포먼스를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연출로 녹여낸 이 영화는, 정적인 서사보다 리듬과 박동이 극 전체를 지배하는 새로운 시네마틱 경험을 보여줬다.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문법이 해체되고, 음악과 영상이 대등한 지위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뮤직비디오적 서사’가 장편 영화로서의 예술성을 공인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케데헌’이 주제가상까지 거머쥐며 2관왕을 차지한 점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극 중 삽입된 ‘골든(Golden)’은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들의 내면을 대변하는 철학적 기제로 작동했다. 이는 아시아적 소재가 더는 타자화된 구경거리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 청년 세대가 공유하는 ‘불안’과 ‘성장’이라는 보편적 서사와 성공적으로 결합했음을 보여준다. ‘케데헌’의 오스카 수상은 국경을 넘나드는 ‘문화적 하이브리드’가 미래 영화 산업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을 예고하는 대사건임이 틀림없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오스카 서사 아카데미상 작품상 장르 영화 올해 오스카
2026.03.18. 21:00
아카데미 시상식이 할리우드의 태도를 보여주는 지표라면 지난 10일 열린 제96회 시상식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오펜하이머’의 7개 부문 수상, 다른 하나는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시상 장면이다. ‘오펜하이머’의 수상은 예상된 것이었고 이견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쓴 데서 다시 백인의 잔치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연기 부문 시상 장면은 이런 우려를 강화했다. 남우조연상 수상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시상자 키 호이 콴을, 여우주연상 수상자 에마 스톤이 시상자 양자경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은 사실 여부를 떠나 지난 3년간 이어지던 다양성 존중이 약해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20년 오스카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기생충’을 7개 부문 후보에 올리더니 각본상과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안겨주었다. 백인 남성의 잔치라는 거센 비난에 시달렸던 오스카로서는 탈출구가 필요했고 마침 작품성 높은 ‘기생충’이 명분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LA타임스는 “‘기생충’이 오스카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오스카에게 ‘기생충’이 더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2021년엔 ‘노매드랜드’와 ‘미나리’가 다양성의 상징이 됐다. 중국계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로 아시아 여성 최초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들어 올렸다. ‘미나리’는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에 그쳤지만 소수계를 다룬 저예산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에 오른 것 자체도 의미가 작지 않았다. 2023년은 아시안 가족을 다룬‘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독무대였다. 11개 부문에 올라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녀조연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하며 오스카의 다양성 포용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2020년 이후를 놓고 볼 때 올해 소수계 수상이 적다고 해서 다양성이 후퇴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라이브즈’가 각본상에서도 밀린 것은 아쉽지만 이것을 다양성 후퇴로 봐야 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올해 오스카는 결과적으로 다양성보다 영화산업과 정치를 더 많이 반영했다. ‘오펜하이머’는 제작비 1억 달러를 투입해 3시간의 상영시간에도 전 세계에서 약 10억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흥행대작이 영화산업을 이끈다는 할리우드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영화산업 중시에는 지속가능성 문제를 고민하게 했던 지난해의 파업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감독 데뷔작 ‘아메리칸 픽션’으로 각색상을 받은 코드 제퍼슨은 수상 소감에서 “2억 달러 한 편 대신 1000만 달러 영화 20편을 만들어 보자. 아니면 400만 달러짜리 50편을”이라고 말했다. 영화제작에도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오펜하이머’의 7개 부분 석권에는 미·중 대결, 특히 미래 패권의 핵심인 반도체 경쟁이 어른거린다. 영화 내용인 핵무기 개발 경쟁의 승리와 승리 뒤의 그늘에는 지금의 패권 경쟁이 투영돼 있다. 물론 올해도 오스카는 다양성 부족 비판을 받았다. ‘오펜하이머’처럼 제작비 1억 달러를 들인 ‘바비’는 전 세계 흥행에서 15억 달러로 더 많았지만 주요 부문에서 빈손이 됐다. 여성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흥행 10억 달러를 돌파한 그레타 거윅을 푸대접했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한인 배우 그레타 리(패스트 라이브즈)의 수상 실패도 백인 남성의 오스카라는 비판이 나오는 근거다. 그래도 2020년 이후 작은 영화와 아시안, 여성은 오스카에서 그 어느 때보다 두각을 보였다. 오스카의 다양성 수용도 있겠지만 아시안과 여성이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산업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오스카에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이건 분명하다. 안유회 / 뉴스룸 에디터·국장프리즘 오스카 소수계 올해 오스카 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수상자
2024.03.25.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