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최신기사

[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사람은 저마다의 구원 방식 찾아야

프로이트에 따르면, '행복'은 개인 리비도의 경제학적 문제라고 한다. 즉,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황금률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각자 그가 구원받는 개별적인 방식을 찾아야만 한다고 했다. 프레데릭 2세는 "나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이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 각기 다른 여러 요인이 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요인들은 그가 외부 세계로부터 참된 만족을 얼마나 많이 얻게 되며, 그가 외부 세계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인가, 종국에는 자신의 소망에 부합하도록 세계를 바꿀 힘을 그 자신이 얼마나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가의 문제라고 했다. 프레데릭 2세가 베를린에 있는 감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죄수들은 모두 죄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오직 한 사람만이 죄가 있다고 하면서 죗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왕은 교도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죄수를 당장 풀어줘라. 저 죄수가 이 감옥에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은 물들이지 못하도록 말일세."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한스'는 신학교에 갈 수 있는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외로움의 시간을 보내다가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하일너는 선생님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우습게 알고, 수업도 등한시하고, 제멋대로 시를 쓰면서 전통과 관습을 비웃는다. 이런 하일너에 대해서 한스는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예술적 감수성에 매료된다. 모두가 하일너를 따돌릴 때, 오로지 한스만이 그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다. 천하의 모범생 한스와 골칫덩이 문제아 하일너의 만남에 선생님들은 기겁한다. 한스가 내향적인 천재였다면, 하일너는 외향적인 천재였다. 학교의 급우들은 이 둘을 따돌렸다.     한스에게는 하일너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한스는 한 가지 일밖에 집중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면 학교 공부를 등한시하는 아이다. 욕망의 균형감각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열정을 친구 하일너에 쏟아내 버리는 것도 미성숙의 증거였다. 그러나 계산하지 않고 순간순간 용솟음쳐 흐르는 '리비도'를 아낌없이 쏟아버리는 것은 순수한 젊음의 증거이기도 했다. 하일너에 내면의 황금을 모두 맡겨버린 채, 하일너가 이끄는 대로 방탕한 생활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 어리숙한 한스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 하일너와 함께하면서 학업성적이 나빠지자, 한스는 신경쇠약에 빠진다. 교장 선생님은 한스에게 성적이 나쁘면 수레바퀴에 깔려서 죽는다고 훈계한다. 훗날, 한스는 요양 차 학교를 그만두고, 기계공이 되지만 옛 고향 친구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받는다. 아무튼, 갖은 비행을 일삼던 하일너가 급기야 퇴학당하자, 한스는 곧 무너져 내린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일너의 편지를 기다리지만 끝내 하일너는 한스를 찾지 않는다. 한스는 우정이 산산조각이 나버리자 어디서도 의지할 공간을 찾지 못한다. 한스는 하일너와의 만남이 지금까지 놓쳤던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보물로 여겼다. 그러나 결국, 한스는 자살하게 된다.   위의 사례에서 리비도(욕망)와 이해관계(interest)를 살펴보자. 한스는 자신의 욕망을 하일너에 맡겼다. 마치 자신을 대변해 줄 것 같은 믿음에서였다. 하일너는 어차피 외로운 처지에서 순진한 친구라도 있으면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서로 간의 이해관계는 시작부터 어긋난 것이다. 한스는 이해관계를 따질 만큼 성숙하질 못했고, 너무도 순진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친구로 사귄 관계지만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것을 경제로 바꿔서 생각하면 한스는 너무도 밑지는 장사를 한 것이다. 개인 리비도의 경제를 실현하지 못했다. 즉, 자신의 에너지를 허무하게 소모한 것이다.   박검진   단국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국기술교육대에서 기술경영학(MO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반도체 특허협상팀 팀장,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차장, 호서대 특허관리어드바이저, 한국기술교육대 산학협력단 교수를 거쳐 현재 콜라보기술경영연구소 대표.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구원 방식 구원 방식 개인 리비도 외부 세계

2026.01.12. 18:04

썸네일

[마음 읽기] 비자유 속에서 살아가기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언어, 사물, 세계가 몹시 낯설어 힘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이 때문에 나는 자신을 지키는 방편으로 책을 몇 권 챙겨간다. 수많은 유적지와 예술작품을 단번에 해독하지 못하고, 이미지에 압도되며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비틀거릴 때 현실감각을 되돌려주는 것은 책이다.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탐험하는 책이라도, 신기하리만큼 그것은 내면과 대면하게 만든다.   얼마 전 나는 열흘간 그리스로 떠났다. 여행지에서는 그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사전 준비로 그리스 비극과 미술책을 읽은 터라 고민이 됐다. 이럴 때 대안은 숙제로 남아 있던 책을 읽는 것이다. 올해 들어 넉 달 동안 내가 읽었던 작가는 블랑쇼, 바르트, 베케트인데 이들은 모두 한 작가의 이름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다.   나는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 11권)를 갖고 있었고, 10여 년 전 읽으려고 두 번 시도했다가 1권을 넘기지 못했다. 마침 소설가 김연수가 어느 지면에서 자신이 프루스트를 읽으려다 부딪힌 좌절을 털어놔 나름 위로가 됐지만, 이것은 ‘가짜 위로’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패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어물쩍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끌어다가 마치 그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치부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프루스트의 경우는 분량). 그러던 중 조지 스타이너의 비평집을 읽는데, 그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프루스트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토록 뛰어난 비평가의 삶을 빚은 작가로 또다시 언급됐기에 최신 판본인 김희영 번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 13권)를 샀고, 여행 가방에 1, 2권을 담았다.   독서 행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비(非)자유적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기다. 운율법에 속박되면 뛰어난 시어가 나오듯이, 한 가지에 구속되면 놀라운 집중력이 발휘된다. 비행기와 숙소에서 다른 어떤 선택지 없이 나는 오직 프루스트만 읽어야 했다. 19세기 파리 사교계와 귀족들의 세세한 관습에 현대의 시민인 나는 가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라는 거대한 세계를 향한 마음이 그 어떤 것도 방해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10여 년 전의 나는 간데없이 이 책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독자는 늘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다. 내가 어떤 검증된 거대한 세계에 섣불리 몸 담그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문제라기보다 나 자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수많은 외부 세계에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거절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거부당하는 쪽은 우리다.   프루스트의 책 1권을 조금 읽은 사람들은 늘 홍차에 적셔 먹은 마들렌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언급하고, 좀 더 전체적인 틀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기억’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근대 역사의 면면, 침윤하는 현대성, 알록달록한 계급사회의 풍속, 예술과 미학에 대한 비평적 관점, 반유대주의, 사랑과 동성애, 신경증의 발견, 언어의 변질, 기후와 공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는 시대 상황까지 모두 담고 있어 결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다. 이 커다란 세계에 들어선 나는 솔직히 말해 이제야 독자의 자격을 얻은 것 같다. 그 전에 읽은 책들은 이 자격증을 얻기 위한 관문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해 깨달은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허가증과 자유를 손에 쥐려면 반드시 ‘비자유’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고는 습관과 버릇의 결을 재정돈할 수 없다. 일상에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요소는 사방에 있어 ‘자유’와 ‘의지’(의욕)라는 말로 꾀기에 우리는 구심력을 갖기가 무척 어렵다.   구석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독자만이 커다란 세계를 얻는다. 거기에는 포기된 수많은 세계가 있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하나둘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나만 접한 것이 아니어서 수많은 인생 선배가 표식을 남겨둔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누구나 볼 수 있어도 그 넓고 깊은 세계로 들어갈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샛길이 많을 뿐 아니라, 얼마 안 가 뒤돌아 나올 만큼 우리의 성정은 늘 성마르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책을 읽어온 뒤 비로소 최근에야 나는 독자의 역량을 조금 갖췄다고 느낀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전집의 7권을 읽기 시작하려는 지금, 이 힘을 유지해주는 것은 새벽과 밤, 주말이라는 ‘시간’임을 안다. 시간은 결국 공간을 만들어낸다.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기억 속, 마음속 공간. 거기서 자아는 하나의 통합된 상을 갖게 되고, 삶이 연장되는 것은 단순히 길이를 늘이는 게 아니라 수직의 깊이를 얻는 것임을 알아차린다.마음 읽기 어려움 재정돈 외부 세계 마음속 공간 자유적 상황

2024.06.02. 17:5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