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옥을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불교 잡지를 읽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그림까지 보니 더 아찔했습니다. 지옥은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옥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지금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 많았습니다. 우울증이니 불안이니 공황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말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삶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을까요? 안타까운 선택이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람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느낌입니다. 잔인한 장면은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할 겁니다. 사지가 찢기고,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고, 소에게 짓눌리고, 칼에 찔리고 등등.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삶에서 느끼는 지옥은 엄살 같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면서 저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겪는 괴로움, 맛보는 지옥은 심리적인 게 많습니다. 우선 자식이 아프고, 가족이 아픈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예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은 지옥 그대로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 맞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사는 게 천국이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옥과 천국이 논리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고 천국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살면서 천국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소망입니다. 죽어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죽어서 천국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도 있겠죠. 지옥은 죽어서라도 갈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천국은 살아서 맛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꽃이 만발한 동산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남녀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정의가 참 어렵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꽃에 날아온 벌레를 끔찍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매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면 오히려 그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천국이 간단합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면 그게 천국입니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 곳은 죽어서 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죽어서는 못 가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이 가능하죠.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이 천국의 다른 말로 들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쁘고 즐거운 표정입니다. 꽃은 웃음꽃이 천국의 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가 늘 천국입니다. 예전에 천국 그림에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는 남편의 모습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천국 참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옥 천국 천국 그림 불교 잡지 우리 속담
2025.09.21. 18:37
우리 속담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짝이 있다는 얘기다. 단어도 마찬가지다. 단어도 저마다 타고난 속성이 있어 둘을 붙여 놓았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있다. 앞말의 특성 때문에 뒷말의 선택에 제약이 온다고 해서 이런 것을 ‘의미상 선택 제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기지개’다. “꽃망울이 기지개를 펴는 봄날이다” “벚꽃들이 기지개를 펴고 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기지개를 펴고 활기차게 움직여 보자” 등처럼 사용된다. ‘기지개’는 피곤할 때 몸을 쭉 펴고 팔다리를 뻗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기지개’ 자체에 ‘펴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의미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펴다’가 아니라 ‘켜다’와 결합시켜 ‘기지개를 켠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문도 ‘지지개를 켜는’ ‘기지개를 켜고’로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앙금’도 이런 단어 가운데 하나다. ‘앙금’은 녹말 등의 부드러운 가루가 물에 가라앉아 생긴 층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구성원 간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미 다 가라앉아 생긴 것이 ‘앙금’이어서 더는 가라앉을 수가 없다.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와 같이 ‘가시다’는 표현을 활용해야 한다. ‘하락세’도 마찬가지다 “하락세로 치닫고 있다”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하락세’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치닫다’는 위쪽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뜻하므로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 “하락세로 내리닫고 있다”나 “하락세로 내닫고 있다”고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단어 단어 가운데 의미상 선택 우리 속담
2025.02.20. 18:39
우리 속담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짝이 있다는 얘기다. 단어도 마찬가지다. 단어도 저마다 타고난 속성이 있어 둘을 붙여 놓았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있다. 앞말의 특성 때문에 뒷말의 선택에 제약이 온다고 해서 이런 것을 ‘의미상 선택 제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기지개’다. “꽃망울이 기지개를 펴는 봄날이다” “벚꽃들이 기지개를 펴고 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기지개를 펴고 활기차게 움직여 보자” 등처럼 사용된다. ‘기지개’는 피곤할 때 몸을 쭉 펴고 팔다리를 뻗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기지개’ 자체에 ‘펴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의미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펴다’가 아니라 ‘켜다’와 결합시켜 ‘기지개를 켠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문도 ‘지지개를 켜는’ ‘기지개를 켜고’로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앙금’도 이런 단어 가운데 하나다. ‘앙금’은 녹말 등의 부드러운 가루가 물에 가라앉아 생긴 층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구성원 간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미 다 가라앉아 생긴 것이 ‘앙금’이어서 더는 가라앉을 수가 없다.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와 같이 ‘가시다’는 표현을 활용해야 한다. ‘하락세’도 마찬가지다 “하락세로 치닫고 있다”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하락세’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치닫다’는 위쪽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뜻하므로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 “하락세로 내리닫고 있다”나 “하락세로 내닫고 있다”고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단어 단어 가운데 의미상 선택 우리 속담
2023.07.24. 19:08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익숙하게 듣는 표현입니다. 주로 복수를 의미하고, 형벌을 의미합니다. 똑같이 되갚아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똑같이 갚아주기라도 해야 마음이 풀릴 겁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듯이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형을 원하지만 사형이 해결책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든 겁니다. 되갚아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칼에는 칼’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제가 언어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거친 말을 거친 말로 대처하는 우리를 설명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고운 말을 쓰면 상대가 고운 말을 쓸 거라는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좋은 속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다른 삶을 삽니다. 주로는 오는 말이 곱지 않은데 어찌 고운 말을 쓸 수 있겠냐는 말을 하는 겁니다. 하는 말보다는 듣는 말에 영향을 받는 삶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상황이 참 많습니다. 나에게 함부로 이야기하고 나를 비난합니다. 냉소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약을 올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욕을 하기도 합니다. 말로 상처를 냅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는 말이 이렇게 곱지 않은데 어떻게 고운 응대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나는 칼을 쓰고 싶지 않았으나 상대가 칼을 쓰니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칼이 여기저기서 날아듭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칼싸움투성이입니다.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 대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칼잡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평론가(評論家)인데 진영을 대변합니다. 그러니 칼을 쓸 수밖에요. 대변인(代辯人)은 자신이 속한 곳을 잘 포장하여 내놓는 사람인데, 자신 때문에 자신의 조직을 더 나쁘게 평가하게 만듭니다. 칼을 써서는 대화가 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대화에는 칼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말이 거칠어졌다거나 말에 차별적 표현이 있다고 강조하는 사람의 글을 보면 냉소적이고, 차가운 경우가 많습니다. 풍자(諷刺)라고 했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풍자는 그대로 비수가 됩니다. 풍자에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덜 주고 웃으면 깨닫게 하는 게 풍자입니다. 물론 그런 풍자를 들어도 아프겠지요. 자신을 지적하는데 안 아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풍자를 해야 합니다. 덜 아프고 받아들일 수 있는 풍자를 하는 사람은 능력자인 셈입니다. 저는 글을 쓰고 말을 하면서 내 속에 담긴 칼을 봅니다.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했던 시간도 떠올립니다. 내가 칼을 쓰면 상대도 칼을 쓸 겁니다.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대가 칼을 쓰면 나도 칼을 쓸 것이 아니라 우선은 방패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을 조금 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나무라기 전에 내 말의 위험성을 보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내 말에 베어 상처가 나고 상대는 더 큰 칼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싸움을 막는 도구이고, 말은 서로를 위로하는 도구입니다. 말을 칼로 쓰지 맙시다. 어렵지만 그게 진리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차별적 표현 우리 속담
2022.10.30. 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