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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 이리 운하 개통 200주년

1825년 10월 26일 이리 운하(Erie Canal)가 개통됐다. 총 363마일 길이의 이리 운하는 뉴욕주 알바니와 버팔로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시카고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도 아닌 500마일 동쪽에 있는 이리 운하는 시카고의 현재를 규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00년 전에 개통한 이리 운하는 시카고가 어떻게 중서부의 주요 도시가 됐고 위스콘신이 아니라 일리노이 주에 속하게 됐으며, 오대호를 통해 미국 동부와 연결됐는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시카고는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호수의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오대호는 물길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 끝인 시카고에서 배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난관이 있다.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다. 이리호와 온타리오호를 연결하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인해서 물은 오대호가 모두 연결되지만 사람의 이동과 물자 수송은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운하다. 나아이가라 폭포를 우회해서 운하를 연결하면 오대호와 허드슨강, 즉 오대호와 뉴욕시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중서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가장 큰 시장인 뉴욕까지 보다 쉽고 편리하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저렴하게 수송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리 운하가 개통된 후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수송비가 최대 90%까지 싸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의미로 인해 현재까지 시카고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이리 운하 개통이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물론 시카고가 사실상 건설될 수 있었던 포트 디어본의 등장과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893 콜럼버스 만국박람회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이 많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시카고가 도시로 발전하고 중서부 최대 도시로 성장했으며 뉴욕에 이은 두번째 도시, Second City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리 운하의 개통이다.     사실 이리 운하 이전 시카고 인구는 수백명 수준이었고 세인트루이스는 이보다 100배가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시카고강과 미시간 호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습지대였으며 목재를 보관하고 있던 조그만 항구 도시가 시카고였다. 반면 중서부의 다른 도시들인 신시내티와 세인트루이스가 훨씬 컸다. 특히 세인트루이스는 서부 지역으로 출발하는 시작점으로 서부의 로마로 통했다. 당시 시카고 인구는 갈레나 인구보다도 적었다. 갈레나는 광물 채취로 인해 한창 도시가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리 운하는 착공도 못할 수 있었다. 당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운하를 위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제퍼슨 대통령은 미친 짓이라며 실현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뉴욕 주지사 드윗 클린턴이 취임 직후 강하게 밀어부쳤기 때문에 대형 토목 공사가 성사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이리 운하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일리노이주 경계다. 일리노이는 1787년 노스웨스트 협정에 따라 현재 주 경계보다 60마일 남쪽이 주 경계였다. 이로 인해 일리노이 주는 오대호와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리 운하의 발전 가능성을 알아본 나다니엘 포프 연방 하원에 의해 현재와 같이 미시간 호수까지로 확장됐다. 만약 일리노이가 미시간 호수와 연결되지 못했다면 남부의 미시시피강으로만 수로 운송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지금처럼 도시가 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시카고 다운타운의 아름다운 호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카고가 일리노이가 아닌 위스콘신에 속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리 운하가 시카고에 끼친 영향은 이렇게 막대하다. 그래서 현재 다운타운에 이리 운하를 가능케 했던 뉴욕 주지사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생긴 것이다. 시카고강 서쪽에 위치히나 클린턴길이 바로 그것이다. 카날길 역시 이리 운하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시카고는 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를 개통해 미시간 호수와 일리노이강, 미시시피강을 연결했다. 이를 통해 현재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보트를 타고 뉴올리언스까지 내려갈 수 있게 됐다. 시카고는 동쪽으로는 뉴욕, 남쪽으로는 뉴올리언스까지 이어지면서 명실상부하게 대서양과 멕시코만까지 연결이 됐다.     같은해인 1848년 시카고 거래소가 창설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운하를 통해 미시시피강 연안의 곡창지대에서 시카고로 곡식이 이동된 후 거래되는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시카고 거래소는 곡식 거래를 보다 안정적으로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를 통해 선물거래도 파생됐다.     이리 운하는 362마일 길이로 675피트에 달하는 지대 높낮이를 뚫고 건설됐다. 총 83개의 수문(lock)도 필요했다. 그만큼 어려운 공사였다. 이리 운하의 성공으로 시카고가 추진했던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힘든 공사는 이민자에게 돌아갔다. 당시로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다.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 공사의 시작점이었던 브릿지포트가 아일랜드 이민자 타운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시작돼 일리노이 정치를 호령하던 리차드 데일리 가문이 배출된 것 역시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운하는 곧 철도에 주요 수송 능력을 넘긴다. 1848년 킨지역이 들어서면서 운하의 장점은 점차 쇠퇴한다. 더군다나 철도는 운하와 달리 겨울철에도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리 운하는 1903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는 1933년 화물 수송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시사분석 nathan 운하 이전 시카고 대화재 당시 시카고

2025.10.2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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