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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삶

원불교에서 주요한 행동 수행 덕목의 하나는 ‘무아봉공(無我奉公)’입니다.     원불교 정전에 무아봉공을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무아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아봉공의 궁극 방향과 내용은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즉 무아봉공의 핵심이자 최종 열매는 ‘일체중생을제도’하는 것입니다.       빈민 교화를 한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다음을 말합니다. 가난한 지역에서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해결해 주는 것이 우선 급한 것 같아 이들을 경제적 물질적으로만 도와주면, 그들은 결국 교회를 원망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금전적으로 사람들은 도와주어도, 항상 그들의 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는 것, 즉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동행되어야 하고 그래야 선교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 모 대학에서 철학, 역사를 강의했던 한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대학을 퇴임하고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홈리스와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 그 급식소에서 식사했는데, 식사한 후 많은 사람이 바로 식당을 떠나는 것을 교수님께서 보았습니다. 무료급식을 받은 많은 사람은 시간도 있고 건강도 괜찮았는데도 설거지를 돕거나 뒷정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식사 후 바로 떠나는 것을 보고 교수님께서는 “이 같은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빈곤의 악순환을 야기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급식소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다음을 제안했습니다. “제가 이 급식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역사와 철학, 교양을 무료로 가르치겠습니다. 이 급식소에 오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이 강의를 들어야 식사를 할 수 있게 한동안 정책을 바꾸어 주십시오.”   많은 직원이 회의적이었지만 한번 해 보기로 했습니다. 점심 무료 급식이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강의가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강의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의를 듣고 식사한많은 사람은설거지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 시작했고, 그 후 많은 이들이 자력을 얻어서 더는 무료급식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급식소에서 봉사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타인을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아봉공의 핵심이자 참으로 남을 돕는 방법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몇 마리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즉 정신을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수 없는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공덕이 훨씬 크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금강경』 24. “수보리야 만일 삼천 대천 세계 가운데에 있는 모든 수미산 왕과 같은 칠보 무더기를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하더라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 독송하며 남을 위해 말해 주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 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과 내지 숫자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 말씀입니다. “살·도·음 같은 중계(重戒)를 범하는 것도 악이지마는, 사람의 바른 신심을 끊어서 영겁 다생에 그 앞길을 막는 것은 더 큰 악이며, 금전이나 의식을 많이 혜시하는 것도 선이지마는, 사람에게 바른 신심을 일으켜서 영겁 다생에 그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은 더 큰 선이 되니라.”   대종사님께서는 무아봉공의 핵심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성심성의’를 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시간상으로 금전적으로 너무 무리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성심성의를 다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무아봉공 원불교 창시자 영겁 다생 원불교 정전

2025.12.18. 20:56

[삶과 믿음] 참된 봉사의 삶

원불교 삼대 종법사 대산 종사께서는 “일체중생을 사랑하고 대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대각하고 일체중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또한 다른 사람을 자비로 돕게 되면 대각의 길로 인도된다는 말씀입니다.   타인을 돕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봉공의 구체적 방법과 방향은 다음입니다.   “무아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무아봉공은 우선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행동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을 위하는 사상’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자기 가족 ‘만’을 위하는 사고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현실적이며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 제자가 “어떠한 것이 큰 도입니까?” 물으니 대종사님께서는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이르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수행자들이 개인 혹은 자기 가족을 항상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면 이는 만인이 행할 수 있는 수행법은 아닐 것입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동포보은의 강령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나도 좋게 되고 남도 좋게 되는 것이 동포 보은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평범하지만 깊이 있는 법문이라 생각합니다.   인과의 진리를 알면 저절로 이타적인 사고가 생기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필자는 미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20년 전에 필라델피아에 처음 오니 필자의 한 지인이 미국인들을 대접하라고 다기세트를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필자는 그것을 한 번씩 사용했지만 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아 당시 선학대에 근무하시는 한 법사님께 그 세트를 드렸습니다. 그 분 방으로 많은 미국인이 상담을 받으러 오기에 그 다기가 더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몇 배, 몇십 배 이상 그 다기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그 공덕도 몇 배, 몇십 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인과의 이치요 결과입니다.   필자가 근무하는 원달마센터에서는 유기농 마늘 농사를 짓습니다. 마늘 하나를 땅에 심으면 한 마늘(통마늘)에서 최소 6개 이상의 마늘이 가을에 열리게 됩니다. 같은 자원을 소비하고 같은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공(公)을 위해서 사용하고 일하면 공덕이 이같이 훨씬 더 크게 됩니다.     원불교 2대 종법사 정산종사 말씀입니다. “곱장리 빚을 내어 일푼이나 남는 장사를 한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줄은 알면서도 공중의 소유를 축내어 제 가족을 몇을 돕는다면 그 사람이 더 크게 어리석은 줄 아는 이는 적으며, 몇 되 종자로 몇 섬 곡출을 얻는 것이 농사인 줄은 알면서도 적은 공덕이라도 공도에 지으면 몇십배의 큰 복이 돌아오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 줄을 아는 이는 적으니 어찌 참다운 이해를 안다 하리오.”   필자는 원불교 교무 생활을 오래 하며자기주장과 고집이 센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상반된 견해가 생길 때 자기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후원자들이 많이 없고, 그들의 이런 성향은 본인의 수행에도 큰 장애가 됨을 보아왔습니다.     한 제자가 “어떻게 해야 덕(德)을 쌓을 수 있습니까?” 하고 정산종사님께 질문했습니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덕은 양보하는 데서 생긴다.” 말씀하셨습니다. 덕을 쌓고 사람을 얻고 또한 자기 수행을 위해서, 어떤 견해 상충이 생길 때 자기주장과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 아주 주요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득이 되고 수행에서도 주요한 부분입니다. 자기 견해가 옳다 그르다가 많은 경우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주요한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봉사 종법사 정산종사 원불교 창시자 자기주장과 견해

2025.11.20. 17:44

[삶과 믿음] 신앙: 마음공부의 기초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와 합치하는 방법은 마음공부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 불교식으로 말하면 우리 본성에 합치는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가장 주요한 것은 먼저 ‘진리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29세에 왕궁을 나와 히말라야에서 구도하셨습니다. 불성 혹은 진리를 얻기 위해 갖은 고행을 하신 후 35세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마침내 대각하셨습니다. 불성을 찾기 위해 범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행을 한 후 대각하셨지만 우리의 본성 혹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이미’일체중생들에게 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혹은 법신불, 불성 혹은 본성이라고 하는 것, 이런 전지하고 전능한 세계가 우리 마음에 ‘이미’ 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인들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이를 우선 믿고 수행하는 것이 참으로 주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는데 혈우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혈우병이란 피가 잘 멈추지 않는 병이며 2000년 전, 그 가난한 그 여인에게 이 병은 참으로 치명적 병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께서 많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이 분이 자기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치고 걸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큰 믿음으로 나를 만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예수님과 제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누구를 찾는 것 같아 겁이 난 그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 병 증세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치는 순간 피가 멈추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떨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느니라.” (마가복음 5:25-34)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믿음’이 너를 고쳤다 말씀하십니다.   방에 전선이 있지만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방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수행자는 믿음이라는 문을 통해 밝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방에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방을 스위치를 올리지 않게 되듯, 진리에 대한 믿음, 불성이 내 속에 내재한다는 믿음이 없으면 혹은 약하면 수행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불법의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간다” 말씀하셨습니다.   지구 형성 초기에 비가 몇백만년 내린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면 평생 태양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존재합니다.   수행인들은 소위 전지전능하다는 완벽한 불성이 우리에게 이미 내재한다는 것과 그것을 달성하게 하는 길, 즉 부처님의 법에 대한 튼튼한 믿음을 세우는 것이 마음공부의 출발점이 됩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입니다.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주지마는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성현들은 사가 없이 평등하게 법을 설하여 주지마는 신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갈 수 있나니라.”   “도가에서 공부인의 신성을 먼저 보는 것은 신(信)이 곧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모든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며, 모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신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 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결과를 보지 못 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도 먼저 독실한 신을 세워야 자신을 제도하게 될 것이며, 남을 가르치는 데에도 신 없는 사람에게 신심 나게 하는 것이 첫째가는 공덕이 되나니라.”   송현풍(宋玄風)이 무한 동력을 연구 중이라 하거늘, 정산종사(원불교 2대 종법사) 말씀하시기를 “기계의 동력에도 무한 동력이 필요하지마는 우리의 수도에도 무한 동력이 필요하나니 수도의 무한 동력은 곧 신성이라, 이 신성이야말로 범부를 성인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니라.”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공부 신앙 믿음 불성 무한 동력 원불교 창시자

2025.04.17. 17:50

[삶과 믿음] 인생길과 경전

한국에서 주된 불교 종단은 조계종이며 선종을 기반으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을 선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출가 전에 좌선에 관심을 가졌는데 20대에 필자 생각으로는 화두를 들고 좌선을 하는 것이 더 적극적이며 이가 깨달음의 지름길인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좌선할 때 한동안 화두를 들고 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지 노력보다 안정이 잘 안 되었고, 선에 집중도 또한 떨어졌습니다. 어느 날 원불교 경전을 읽고 저의 선법을 바꾸었고 그 후 좌선이 잘 되었습니다. 다음은 필자가 읽은 경전 구절입니다.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일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 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좌선하는 시간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나니, 이처럼 하면 공적(空寂)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체득할 수 있느니라.(원불교 정전)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근래에 선종 각파에서 선의 방법을 가지고 서로 시비를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가운데 단전주(丹田住)법을 취하여 수양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수양만 하고 화두 연마는 적당한 기회에 가끔 한 번씩 하라 하노니, 의두 깨치는 방법이 침울한 생각으로 오래 생각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명랑한 정신으로 기틀을 따라 연마하는 것이 그 힘이 도리어 더 우월한 까닭이니라.” (원불교 대종경 수행품 14)   경전이 마음공부의 방향을 가르쳐주기에 많은 불교 종단에 있어서 처음 출가한 승려들은 본격적으로 선방에서 참선 공부를 하기 전 최소한 몇 년 경전공부를 해야 합니다.     중국에 현장 스님(AD 602~664)은 10대 초에 출가하여 경전공부와 수행에 매진했습니다. 경전공부를 하면서 중국어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실제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정확히 하셨는지를 알기 위해 원전 즉 팔리어와 산스크리트로 된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자 현장 스님은 29세에 중국을 떠나 인도로 향합니다. 걸어서 가는 여정이었고 고비사막을 지나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가서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야 하는 참으로 길고 길 여정입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을 떠나 불교 수행과 연구의 요람인 인도 나란다 사원에 도착하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이곳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로 된 부처님 경전을 5년간 공부하고, 다시 많은 불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7년이 다시 소요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중국 등에서 이러한 순례 여행을 떠난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태반의 순례자들은 여행 도중 사망했습니다. 신라 시대 한국에서 인도로 순례 간 혜초스님은 고비사막을 헤매다가 사람들의 뼈가 바람이 불어서 모래에 드러나면 이 길은 아마 과거 순례객이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합니다. 다음은 인도로 가는 순례길에서 혜초스님이 지은 시의 일부입니다. “다람쥐와 새들도 살기 어려워 하는 히말라야 산, 난 지금 이길을 걷고 있구나.”   박물관에서 양피지로 된 두꺼운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사기도 힘들었고 아주 비쌌을 것입니다. 태반의 사람들이 글도 읽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경전을 구할 수도 있고 경전을 쉽게 읽을 수 읽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이여! 시대가 비록 천만 번 순환하나 이 같은 기회 만나기가 어렵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만났으며, 허다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이 기회를 알아서 처음 회상의 창립조가 되었나니,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지내가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수행 15)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인생길 경전 원불교 경전 부처님 경전 원불교 창시자

2024.03.14. 20:47

[삶과 믿음] 마음공부와 훈련

중세 시대 한 화가가 예수님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기 마을에서 가장 선하고 정직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그를 모델로 예수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몇 년 뒤 그 화가는 예수님을 판 유다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가장 악하고 간사하게 보이는 사람을 찾다가 결국 감옥에서 모델을 찾기로 했습니다. 항상 분노에 가득 차 있고 악해 보이는 한 죄수를 발견했고, 그가 유다 모델로서 적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고 그 죄수를 보니 그가 아주 눈에 익은 사람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죄수는 자기가 수년 전 예수님을 모델로 그린 그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떤 환경 속에서 방탕의 길을 걷다가 중죄로 감옥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의 얼굴과 인생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쓰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예수님같이 되기도 혹은 유다 같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 26:41)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잘 쓰려고 해도, 마음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을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공부는 선, 명상 등의 ‘훈련’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훈련(訓練)에서 훈(訓)이란 ‘가르칠 훈’, ‘훈습 할 훈’입니다. ‘훈습’의 사전적 정의는 ‘열심히 노력하여 숙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좌선을 매일 하는 것, 경전을 정기적으로 봉독하고 연마하는 것 등 우리가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열심히 ‘실행’ 노력을 해서 이가 우리의 생활 습관이 되게 우리 인생을 숙달시켜야 합니다. 이는 ‘스스로’ 가르치고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訓練)에서 련(練)이란‘익힐 연’,‘단련할 연’입니다. 한자 련(練)의 본래 의미는 ‘쇠 불릴 연’입니다. 용광로에서 쇠를 불에 달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기도와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 등이 처음에는 재미있지 않습니다. 쉽고 재미있지는 않지만 일단 반복하여 습관이 되면 그 유익이 한량없습니다. 재미있지는 않지만 반복적으로가치 있는 일과 행동을 하면, 즉 ‘훈련’을 하면, 쇠가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처음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우리 삶이 정금같이 되어 한량없이 발전되고 수준이 올라갑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고통과 경계를 당할 때, 내 인생의 쇠가 최고의 품질로 거듭나기 위해 이 용광로를 통과한다고 생각하시고, 신앙 수행인들은 어려운 경계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원불교 초창기 한 제자가 식당 고역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시고,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다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일이 고되어 얼굴이 빠짐이로다. 너희들이 이 공부 이 사업을 하기 위하여 혹은 공장 혹은 식당 등에서 모든 괴로움을 참아 가며 힘에 과한 일을 하는 것은 비하건대 모든 쇠를 풀무 화로에 집어넣고 달구고 또 달구며 때리고 또 때려서 잡철은 다 떨어버리고 좋은 쇠를 만들어 세상에 필요한 기구를 제조함과 같나니, 너희들이 그러한 괴로운 경계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며 삼대력을 얻어 나가야 범부의 잡철이 떨어지고 정금(精金) 같은 불보살을 이룰 것이라, 그러므로 저 풀무 화로가 아니면 능히 좋은 쇠를 이뤄내지 못할 것이요, 모든 괴로운 경계의 단련이 아니면 능히 뛰어난 인격을 이루지 못하리니, 너희는 이  뜻을 알아서 항상 안심과 즐거움으로 생활해 가라.”     훈련,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처자를 버리고 왕궁을 떠나서 산에서 구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조용한 시간, 충전의 시간을 위해 혼자 있거나, 산에 가거나, 이런 훈련에 참석하는 것도 주요하지만, 가장 주요한 것은 현실 가운데 사실적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事實) 즉 일(事)과 현실(實) 가운데서 훈련을 해야 하고, 이가 바로 실지공부며, 이러한 신앙과 수행이 우리의 현실 삶을 바로 향상해 줍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공부 훈련 유다 모델 원불교 초창기 원불교 창시자

2022.11.17. 17:33

[삶과 믿음] 정신수양의 필요

탁월한 수학자, 철학자들의 머리는 비싸고 성능 좋은 스포츠카와 같습니다. 스포츠카에 브레이크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차는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수양 없는 현대인이 불안증, 강박증 등을 가지는 근원은 정신을 잘 쉬지 못하는 생활 습관에 기인하며, 이 같은 인생은  브레이크 없는 차를 모는 것과 같습니다. 쉬임 없는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차 사고가 원불교 경전에는 다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결국은 가패 신망도 하며, 번민 망상과 분심 초려로 자포자기의 염세증도 나며, 혹은 신경 쇠약자도 되며, 혹은 실진자도 되며, 혹은 극도에 들어가 자살하는 사람까지도 있게 되나니….”   어떤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수많은 근심과 염려 중 40%는 실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30% 정도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책 등 생각해도 소용없는 것이며, 20%는 아주 하찮은 것이며, 4% 정도는 날씨, 경제 상황 등 우리가 컨트롤하기 힘든 것에 관한 염려라고 합니다.    시험을 치기 전 긴장, 염려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우리 마음이 바로 그렇게 되나요? 그 사람 이제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우리 마음이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이제는 비교 안 하고 마음 편안히 살겠다고 생각해도 우리 마음이 바로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신수양으로 마음의 ‘힘’을 길러야 우리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정신은 쉬면 쉴수록 그 힘이 강해집니다. 정신을 멈추어서 잘 쉬게 하고 그 힘을 양성하는 방법이 바로 기도, 좌선, 명상입니다. 이 방법은 마음에 힘을 불어넣는 길이며,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예로부터 큰 도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선(禪)을 닦지 아니한 일이 없느니라” 하시며 선과 명상의 주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조선 시대 서화담 선생이 어느 날 불교 선방에 가보니 좌선을 하는 스님이 거의 없는 것을 보시고 앞으로 백 년 후에 한국에 명재상, 명장군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고 한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염불, 좌선 등의 명상은 우리에게 마음의 힘을 길러 줄뿐더러 그것을 통해 우리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원불교 3대 종법사였던 대산 종사님께서 “발로도 하는 수양, 눈과 코로 하는 수양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수양을 ‘반달, 반개’로 비유하셨습니다. 보름달보다 반달이 좋고 활짝 핀 꽃보다 반쯤 핀 꽃이 더 좋다는 이 말은 수행인들의 중도(中道)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보고 듣는 것을 가능한 한 자제하며 육근문(六根門) 즉 우리의 몸과 마음 특히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잘 조절하라는 말씀입니다.   수양의 힘이 약하면 외부 경계가 올 때, 작고 약한 나무처럼 바람에 금방 꺾입니다. 수양으로서 우리 마음의 힘이 강해지면 심한 경계와 어려움 즉 태풍이 와도 우리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양으로서 우리 마음이 차차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대산 종사님께서는 얼음 강도에 비유하셨습니다.   “멈추긴 멈추는데 훌렁훌렁하다 꺼진다. 내가 다시 한번 말할 테니까 생각해 보자. 살얼음 같은 수양력인가? 강얼음 같은 수양력인가? 강얼음은 석 달은 가지 한강은 석 달이면 풀리는가? 단단은 하나 그래도 여름이 되면 바그르 한다. 셋째는 철석같은 수양력인가? 쇠와 돌 같은 수양력 그것도 천년만년이 되면 용해되고 분해되어서 없어진다고 그런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얻으신 대 정력이 수양력이란 것은 녹으면 다 사하기 때문에 억만년을 가더라도 그 수양력은 없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한번은 물어봐라. 지금 너 수양이 어느 정도인가? 우리 교학과 학생들 하루에 몇 번을 멈추는가? 열번입니다. 교도에게 물어봐라. 40번입니다. 계속해서 천만 경계를 당할 때마다 멈추고 또 멈추면 그것이 쌓이고 싸여 정력이 된다. 또 금년도 신년 법문에 고질적인 몹쓸 습관 하나씩을 떼자 했지! 실행하는 분 있으면 실행하려고 애쓰는 분 있는가? 물어봐라. 그리고 수양을 할 것 같으면 간단히 무엇을 하자는 것이며 무엇을 모으자는 것인가?”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정신수양 수양력 그것 우리 마음 원불교 창시자

2022.03.1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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