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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통한의 휴전, 왜 7.27인가

전투는 멈췄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한반도는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총성이 멎었지만, 그 과정은 복잡하고 불완전했다. 북한과 중공, 소련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고, 유엔군 내에서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결국 휴전은 미국 측의 의도대로, 제한된 전쟁의 틀 안에서 마무리되었다.   우리 입장에서 이 휴전은 억울함 그 자체였다. 3년 1개월 동안 온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됐다. 당시 북한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 보병 화기 정도는 자체 생산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총알 하나, 수류탄 하나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당시 전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만주 폭격은 군사적으로는 당연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6·25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산시키지 않기 위해 ‘제한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특히 맥아더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 장성과 일선 지휘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이 아닌 유럽 전선에서 복무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미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전쟁 장기화를 꺼리게 만든 요인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매일 중대 병력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를 감당할 여론적 기반도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은 한반도 방어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선이라 판단한 ‘캔자스(Kansas)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판문점 일대의 서부 전선을 고착화했다. 휴전회담이 이뤄지고 있다는 명분 아래 서부 전선의 북진을 포기했고, 중동부와 동부 전선에서도 대대급 이상의 공격을 금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전의 승리를 포기한 셈이었다. 더욱이 영국은 이 전쟁을 소련의 유럽 침공을 위한 양동작전으로 판단했기에 하루라도 빨리 종전하고 유럽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결국, 유엔군은 하루빨리 휴전을 원했지만, 오히려 칼자루를 쥐게 된 공산군은 느긋하게 2년 넘게 협상을 끌며 유리한 조건을 모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정전협정이 발효됐다. 협정문은 영문, 한글, 중국어 3개 국어로 작성되었고,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 북한의 김일성 세 사람의 서명이 담겼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식 서명국은커녕 배석자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직접 당사자였음에도 정전협정에 서명할 자격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은 기회만 되면 도발을 일삼고, 불리한 국면에서는 ‘민족애’를 앞세운 평화 공세를 되풀이하고 있다. 남북 간의 대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장기 휴전 상태이며, 이산가족 간의 편지 한 장조차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가 아직도 한반도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휴전 직전, 7월 13일 백마고지 전선에서 적군의 포로가 된 수도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1917~1997)은 자신의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에서 정전 회담 기간 중 평양으로 끌려가며 직접 목격한 북한의 전황을 기록하고 있다. 유엔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해 철도망은 마디마디 끊겨 있었고, 무기와 보급품은 확보되었더라도 운송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공산군은 이 시점에 더 이상의 전쟁은 패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마침내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일선에서 싸운 군인들은 전투 의지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전 시각을 알지 못한 채 싸움을 계속했다. 그 결과, 정전 발효 직전 몇 분, 몇 초를 남기고 전사한 병사들도 있었다. 그 유가족들이 느꼈을 참담함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금성천 골짜기에서는 미군, 국군, 중공군, 북한군 병사들이 함께 물장구를 쳤다는 전언이 전해진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전쟁의 비극적 단면이다.   임익순 대령은 이후 남쪽으로 송환되어 포로복을 벗고 팬츠 바람으로 부대 사열을 받은 유일한 일선 지휘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에는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주영세 / 은퇴목사·ROTC 1기열린광장 휴전 제한 전쟁 전쟁 말기 유럽 전선

2025.07.1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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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통한(痛恨)의 휴전, 왜 7·27인가?

전투는 그쳤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휴전은 같은 편에서도 저마다 입장이 달랐다. 북한과 중공, 소련의 입장이 달랐고, UN군 사이에서도 입장이 달랐다. 지면 관계상 긴 이야기는 쓸 수 없지만 결국 휴전은 미국 측의 주장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3년하고 한 달 동안 온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된 채 한반도를 양분하는 휴전안은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온 국민이 휴전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북한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박격포 등 보병 화기 정도는 자체 생산이 가능할 정도였으나 한국은 총알 하나, 수류탄 하나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 전쟁 지속을 주장할 수 없었다.     중공의 참전으로 전선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만주 폭격 주장은 당연할 수도 있으나, 미국은 처음부터 3차 대전을 우려해 6·25를 ‘제한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장성들과 일선 지휘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이 아닌, 유럽 전선에서 싸운 지휘관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로 인한 정치적 측면을 고려했을 때, 매일 일개 중대 병력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전쟁 혐오 여론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 방어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캔자스(Kansas)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판문점 일대의 서부 전선을 고착화했다. 휴전 회담 장소라는 핑계 하에 서부 전선에서의 북진을 포기하고, 중동부와 동부 전선에서도 대대급 이상의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한국전의 승리는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영국 입장에서는 6·25를 소련의 유럽 침공을 위한 양동 작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6·25를 끝내고 유럽 방어에 진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UN군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휴전을 바랐으나, 오히려 칼자루를 쥔 공산군은 느긋하게 2년여를 더 버티다가 휴전에 서명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정각, 효력이 발생하는 휴전 협정문서는 영문, 한글, 중국어 세 가지 문자로 작성됐다. 연합군사령관인 미 육군 대장 마크 W. 클라크,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등 3인의 서명이 있고, 그 외에 연합군 수석 대표인 미 육군 중장 윌리엄 K. 해리슨과 북한군 대장 남일, 두 사람이 배석자 자격으로 도합 5명의 서명이 있다. 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서명에 참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배석자로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전(終戰) 운운할 자격 조차  없는 셈이다.   곡절 많은 이 휴전 회담을 왜 1953년 7월27일에 마치게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 국가의 보급 능력으로는 더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무기가 충분했다면 전쟁은 지속했을 것이다. 당시 공산군의 보급과 운송 능력은 지상 공세를 3일 이상 버텨낼 수가 없어서, 공산군은 일찌감치 한강 이남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UN군 측도 이미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은 휴전 후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회만 있으면 도발을 하고 불리하면 민족애를 앞세운 평화공세로 펼치고 있다. 지금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종전 아닌, 휴전 상태다. 휴전 70년이 지났지만 이산 가족 간에 편지 한장도 오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직도 우리는 한반도에서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영세 / 은퇴 목사·ROTC 1기발언대 휴전 휴전 회담 휴전 반대 유럽 전선

2023.07.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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