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대령 "나는 100% 한국인이자 동시에 100% 미국인"
이민사는 단순한 정착의 기록이 아니라, 제도적 장벽과 사회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던 환경 속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인 2세로 태어나 미 육군 대령까지 올랐고, 전역 이후에도 한인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던 김영옥(Young Oak Kim·1919~2005) 대령의 생애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김영옥 대령은 1919년 1월 29일 LA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아버지 김순권은 미주에서 대한인동지회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부터 두 사회의 경계에 놓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은 고용과 주거, 일상 전반에서 제도와 관행으로 작동했고, ‘이중 정체성’은 자산이라기보다 부담에 가까웠다. 그는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LA커뮤니티칼리지(LACC)에 진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안정적인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1941년 미 육군 입대는 개인적 진로 선택이자, 당시 아시아계가 제한적으로나마 사회적 이동을 시도할 수 있었던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의 육군 장교후보생학교를 수료하고 1943년 소위로 임관했다. 배치된 부대는 일본계 2세 중심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보병대대였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이 집단 수용과 감시의 대상이 되던 시기, 이 부대는 군사적 필요와 인종 정책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한국계 장교가 일본계 병사들을 지휘하는 구조는 내부 갈등의 소지가 컸지만, 김영옥 대령은 전투 수행 능력과 현장 지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3년 말부터 그는 미 제5군 소속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다. 볼투르노강 전투를 비롯해 독일군의 주요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 돌파 과정에서 정찰, 돌파, 정보 확보 등 고위험 임무를 수행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44년 5월 독일군 전차부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적진에 침투해 독일군 포로를 생포하고 전술 정보를 확보한 작전은 이후 연합군의 로마 해방 작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례로 언급된다. 전공은 전투 성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최소 병력으로 정보를 확보하고 작전의 변수를 줄이는 방식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려는 지휘’로 이어지며 자주 회자된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미국의 은성무공훈장과 수훈십자장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십자무공훈장,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등 각국 최고 수준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한국·미국·유럽에서 동시에 무공을 인정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군 경력은 이례적이다. 1945년 종전 후 그는 대위 계급으로 전역해 LA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민간인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군에 복귀했다. 1951년 예비역 소집 방식으로 재입대한 그는 한국으로 향했다. 이때가 그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개인적 연고나 현실적 이익보다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역할을 전장으로 한정한 결정이었다. 한국전에서 그는 미 제7사단 31연대 정보장교로 배속돼 중부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해 보병대대장에 임명됐으며,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대대장 사례로 기록된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속에서 그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전선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이 38선 인근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는 같은 해 철의 삼각지대 전투 도중 아군 오폭으로 중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됐다가, 치료 후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의 활동은 전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전 당시 그는 전쟁고아 지원에 깊이 관여했다.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 고아원을 지원하고, 직접 보호 활동에 나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투 현장에서의 판단과 전후 상황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작동한 사례로 평가된다. 일부 무공훈장 수여를 부하들에게 돌리려 했다는 일화 역시 이러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이후 김영옥은 정치권 진출이나 군 관련 직위 대신 지역사회 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LA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여러 비영리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에 관여했다. 한인 건강·복지 분야에서는 한인건강정보센터 설립에 참여했고, 정치·시민권 영역에서는 한미연합회 창립에 기여했다. 문화·역사 분야에서는 한미박물관 창립 이사와 이사장을 맡았다. 이 밖에도 일본계 미군 참전용사 단체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 재단 활동, 가정폭력 피해 아시아계 여성과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인 ‘센터 포 퍼시픽 아시안 패밀리(Center for Pacific Asian Families)’ 지원에도 관여했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나는 100% 한국인이자 100% 미국인이다”라는 표현은 자주 인용된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감상적 선언이라기보다, 두 사회에 동시에 책임을 진다는 태도에 가깝다. 전장에서는 미국 군인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전쟁 이후에는 한인 공동체의 문제를 다뤘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두 역할을 병렬적으로 수행한 삶이었다. 김영옥 대령의 이름은 현재도 여러 공공시설과 교육기관을 통해 남아 있다. LA의 공립 중학교 ‘영옥 김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딴 대표적 사례다. ━ ☞김영옥 대령은… 1919년 1월 29일 LA에서 태어나 2005년 12월 29일 별세했다.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포트 베닝 장교후보생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으며, 일본계 2세 중심의 100보병대대 소속으로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서 전공을 세웠다. 한국전에서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대대장을 지냈고,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해 1972년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설립에 관여했다. 강한길 기자미국 김영옥 김영옥 대령 육군 대령 대한인동지회 활동
2025.12.31.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