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이 트이는가 보다. 한국으로부터 잡지가 우송되어 왔다. 코로나로 받아보지 못했던 정기 간행물이 들어올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월간 ‘좋은생각’ 10월호다. 반갑다. 갖가지 이야기를 한 가득 싣고 매달 찾아오는 책을 기다리던 재미가 쏠쏠했다. 책이 끊어진 지 1년 반이 넘었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뭔가 밋밋하고 허전했는데 녀석을 만나지 못해 그랬던 모양이다. 책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통권 356호, Since 1992’라는 숫자가 보인다. 손꼽아 보니 책을 받아보기 시작한 지 30년이 다된다. 30년? 놀랍다. 처음 책을 받아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이 책이 내 이민생활을 안내하는 등대가 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이 끊긴 기간이 없었다면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터이다. 외갓집에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던 그 밤, 어머니 없는 집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한지를 처음 느꼈던 그 어린 시절처럼, ‘좋은생각’은 ‘샘터’와 같은 작고 얇은 월간 잡지다. 그 안에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색다른 풍경과 정보,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우뚝 선 생생한 체험담 등이 들어있다. 책을 받으면 처음부터 끝 페이지까지 빼지 않고 읽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이민생활 굽이굽이에서 책에서 만난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책 속에 들어있던 감동적인 글을 보면서 ‘나도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글을 골라 두세 번 되풀이 읽고 필사를 하기도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책에 있던 좋은 글들이 오랜 세월 알게 모르게 나의 글쓰기 선생이 되어주었다. 책을 받아볼 때마다 보내주는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실은 한두 해, 혹은 서너 해 지나면 책이 끊길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강산이 세 번 변할 만큼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책을 보내주고 있다. 무던한 사람이다. 아내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 두 여인의 우정에 ‘한결같다’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 성싶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내 덕에 30년 동안 좋은 책을 덤으로 받아보는 복을 누리는 입장이 되었다. 좋은 선배를 둔 아내가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내게는 그런 친구가 없을까. 새삼스레 살아온 날을 되돌아본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어디선가 나를 걱정하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난다. 가을이 익어간다. 뒤뜰 석류나무에 석류가 발갛다. 봄날 가지 끝에 15촉 꽃등을 켜더니, 간당간당 매달려 소리 없이 몸집을 불려가더니, 폭우와 태풍을 이겨내고 만삭의 몸을 낭창 휘어진 가지 따라 잔디 위에 부려놓았다. 석류 몇 개를 따서 소쿠리에 담아두었다. 소쿠리 안에 가을이 담겼다. 햇볕 따스한 가을 아침, ‘좋은생각’ 잡지를 받아 읽으면서 생각한다. 우정도 사랑도 세월 따라 익어간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우정 사랑 이민생활 굽이굽이 뒤뜰 석류나무 가을 아침
2021.10.21. 18:24
일요일 새벽 달리기를 나갔다. 동이 트기 전이지만 주말에는 뛰는 사람들이 많다. 3마일쯤 갔을까. 젊은 청년이 의자에 앉아 넋 놓고 거리만 바라보고 있다. 자세도 반듯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무슨 고민이 많은지 혹시 어젯밤부터 앉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6마일을 돌아 다시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그대로 앉아있다. 잊어버리고 한 주가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에는 어깨와 팔이 축 늘어져 머리를 푹 숙이고 걸어오고 있다. 젊은 백인 청년이 무슨 변화가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 가족 중에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나 아니면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은행에서 집을 압류하여 갈 곳이 없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뛰다 보니 10마일을 훌쩍 넘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이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세상살이에 조급함을 느낀다. 바라는 결과를 빨리 얻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는 먹어 가는데 이뤄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빨리 뛰려고 애쓰지 않는다. 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주를 마치고 몇 시간 걸렸냐고 숨을 몰아쉬면서 묻는다. 조금 빨리 뛰었다고 큰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록 경신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시간에 매달릴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아흔 살의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는 말한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내레이션도 인상적이다.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진다. 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가 여물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고 잎이 떨어지고 땅이 비옥해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히 하나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걸음을 걸을 때도 한 발 한 발 움직임을 알아차리며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어딘가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곳이 내가 도착하려고 했던 곳이 아닐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근차근 천천히 걸어가는 방향이라면 분명 그곳은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보다도 훨씬 멋진 곳일 테니까. 달리는 버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제자리 뛰기를 한다고 해서 버스가 목적지에 더 일찍 도착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감상하거나 버스에 함께 탄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는 일이 더 값진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봤던 그 청년도 지금은 감당하기 벅찬 일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리를 하고 나면 빈자리가 눈에 보일 것이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차근차근 천천히 메워 가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중한 시간으로 알찬 소득을 얻어 힘들었던 어제의 삶을 바꾸어 놓을지도…. 양주희 / 수필가
2021.10.19. 18:46
마른풀 냄새가 난다. 풀 냄새는 머지않아 무서리가 찾아온다는 숲에서 보내는 아픈 시그널이다. 늦은 밤 책상 앞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등 뒤에서 갑자기 귀뚜라미 우는 소리. 이맘때가 되면 매년 찾아와 발등을 툭 건들고는 폴짝 뛰어 마룻바닥에 배를 까뒤집고 곤두박질치던 놈. 나는 의자에서 돌아 앉아 두리번거린다. 적막 속에 갇혀있는 나를 찾아온 먼 그리움. 적요의 시공(時空)이 잠시 출렁인다. 놈을 보면 아련한 소리가 먼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들린다. 장독대 뒤에 숨어 다투어 울던 귀뚜라미 소리는 내 유년에 껴안고 자던 자장가였다. 교복에 단정을 차리던 무렵 감이 익어가는 뒤뜰에서 들리던 귀뚜리 울음소리. 그런 날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펼쳐 놓고 책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백로 지나고 추분이 가까워오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멎었다. 찻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 소리가 다듬질 소리 같이 들린다. 다듬질 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전설 속의 소리로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어느 날의 입동 근처. 저녁에 뜰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 뜰에는 몇 남지 않은 은행잎이 가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또, 닥. 또, 닥. 또닥또닥또닥또닥. 먼 곳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리던 소리. 어느 정숙한 여인이 한복 저고리 단정히 차려입고 다듬돌 앞에 앉은 고운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다듬질 소리는 장단에 가락을 얹어 운율적으로 들려 소리가 그친 후에도 긴 여음을 남겼다. 그 소리는 잊을만하면 들렸다. 늦은 밤에 들리던 다듬이질 소리는 큰길 건너 애자네 엄마가 만들어 내는 소리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새 봄에 대학에 들어갈 애자는 그때로부터 다섯 해 전에 아버지를 월남 전선에서 여의었다. 앞길이 창창한 장교였던 그의 죽음에 이웃들은 한 겨울보다 더 시린 여름을 보냈다. 낭만적으로만 느꼈던 그때 다듬이질 소리의 의미를 5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알 것도 같다. 다듬이질 소리는 육자배기 타령이었고, 아니리로 풀어내는 한탄조의 중모리와 한의 절정을 휘모리장단으로 토해내는 청상이 된 한 미망인의 하소연이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고즈넉이 눈을 감고 졸지에 청상이 된 한 여인의 애끓듯 풀어내는 다듬이질 가락 한 토막을 베고 밤을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단풍을 보면 여리거나 짙은 얘기가 채색되어 있어 사연이 많은 잎일수록 곱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의 얼굴에도 아팠거나 슬펐던 한때의 모습이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생의 가을을 맞은 당신도 그래서 더 아름답다. 조성환 / 시인
2021.10.19. 17:31
싸한 가을에 만두를 빚는다. 상 위에 빚어진 하얀 만두는, 강물에 띄워진 쪽배가 되었다, 그리움에 물든 밤하늘의 반달이었나 하면, 세월의 언덕을 사뿐히 내딛는 수줍은 버선발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진 새우에 부추를 더해 상현달과 하현달 같은 반달 모양의 만두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달을 창조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부추와 돼지고기를 섞어 반달을 만든 후, 초승달을 닮은 통새우 한 마리를 한편에 세워 보름달 같은 둥근 만두를 탄생시켰다. 이제 달은 밤하늘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 위에도 올라 내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한 주머니에 여러 음식을 품고 있는 만두는, 미국도시를 닮았다. 갖가지 소가 다양한 조화를 이루는 만두 속 같이, 한 공간에 여러 민족이 함께 삶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만두와 삶은 닮았다. 삶이라는 주머니에 누구나 나름대로의 그 무엇을 담아도 괜찮은 듯, 만두 역시 그 안에 무엇을 넣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게다가 만두는 한 가지 소만 넣거나, 아니면 몇 가지를 섞어 넣어도 무난하다. 그것은 삶의 길이 단순한 외길이거나 몇 가지 길을 동시에 걷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런가 하면 연한 만두피는 속에 어떤 것이라도 감싸 안아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간과 맛이 어떻든 만두피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품는다. 먼 타향에서 가을을 맞으며 만두를 빚는다. 내가 만드는 만두에는 한과 사랑과 추억이 담긴, 디아스포라의 오렌지빛 향수일 것도 같다. 이때의 만두는 내 영혼이 아늑한 고향으로 떠나고 싶을 때 나를 태우고 떠나는 작은 돛단배다. 삶을 마주하듯, 단정히 앉아 만두를 빚는다. 분수에 맞게 마련한 만두 소를, 세상살이에서처럼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접는다. 생을 빚어가듯 만두소를 욕심껏 많이 넣어 터지지 않게 하고, 너무 적게 넣어 인색하지 않게 한다. 또 만두소의 간을 너무 짜거나 싱겁지 않게 하여, 조화롭게 삶의 간을 맞추듯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 일을 주변 상황에 맞게 처리하듯, 만두를 빚을 때도 모든 과정을 순리에 맞게 한다. 만두를 빚는 일과 살아가는 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만두 요리에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순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만두가 숙성되어 가는 과정은 삶을 터득해 가는 지침서가 된다고나 할까. 그리 보면 아직 세상살이에 미숙한 내가 빚는 만두는, 인생 수행 과정의 일부분이 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만두를 만들어 가는 일은 삶을 실하게 숙성시키고 싶은 나의 작은 의지일 것도 같다. 세월 속에 익어가는 나의 만두는, 언제쯤 환한 보름달처럼 세상을 밝고 행복하게 비추게 될 수 있을까. 김영애 / 수필가
2021.10.18. 19:28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할까.’ 해마다 이맘때면 한번은 들어 보고 싶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의 첫 구절이다. 가사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 산천이 울긋불긋 물들고 하늘은 높아지는 10월이면 많이 들려오는 노래다. 노르웨이 가수의 원곡에 가사를 붙이고 편곡을 해서 부른 노래다. 바리톤 김동규를 세상에 널리 알리며 10월에는 누구나 몇 번은 들을 정도로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성악가 김동규의 독특한 바리톤 음색과 가을이라는 정취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사연을 알고 나면 조금은 가슴 아프다.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동규는 어느 가을 이혼하게 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다.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 모 방송국의 라디오 진행자가 쉬어가는 뜻에서 가볍게 크로스오버 형식의 노래를 제안했고, 그때 원곡을 들은 그는 이거다 싶어 가사를 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돈을 벌거나 인기를 끌겠다는 목적 없이 발매한 음원은 예상치 못하게 인기가 급상승하며 국민 애창곡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을 노래 한 곡이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많은 가수와 성악가들이 다투어 이 노래를 부르며 여러 버전이 세상에 나오게 되고 가을을 타는 많은 이들에게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주는 힐링송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도 유독 가을을 좋아하고 가을을 타는 편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가을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센티멘털해지고는 한다. 10월 어느 날 시골 국도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내리며 달리는 차를 환영해 주던 멋진 기억도 떠오른다. 아침저녁으로 기온도 떨어져 몸도 마음도 쌀쌀해지는 날이면 샛노란 국화가 열병식을 치르듯 늘어서 있는 한국 도심의 가을과 어릴 적 자랐던 시골에서의 가을을 연상하곤 한다. 친구들과 뒷산에 올라 작대기로 몇 번 나무를 후려쳐서 떨어진 밤송이를 고무신으로 밟으며 밤을 까서 주머니에 담고 오던 가을 풍경을 떠 올린다. 하지만 아직도 낮에는 뜨겁게 느껴지는 캘리포니아의 가을과는 어쩐지 조화가 잘되지 않는 느낌이다. 2년 가까이 계속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음대로 여행도 못 가지만 이제 서서히 종착역을 향해 가는 기분이 든다. 내년 가을에야말로 미루고 미뤄둔 고국을 방문해 가족 친구들도 만나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 함께 하는 10월의 멋진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모든 것이 넉넉해지는 수확의 계절 그래서 이웃들과 오손도손 나누는 마음 따뜻한 계절,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노랫말처럼 바람은 죄가 될지도 모른다. 그저 평안하고 풍요로운 이 가을을 만끽하고 싶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송훈 / 수필가
2021.10.18. 18:51
큰 걱정이 작은 근심을 덮는다. 큰 일이 터지면 작은 근심은 사라진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사는 일에는 밀린다. 근심의 근원은 소유와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욕망은 끝이 없다. 먼지처럼 몸에 달라붙은 욕망의 찌꺼기들은 세월이 갈수록 두터운 겨울 코트처럼 무거워진다. 내려 놓으려 해도 근심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걱정, 근심도 순서가 있다. 죽고 사는 일이 생기면 작은 염려가 헛수고다. 선배 한 분이 생을 마감했다. 모진 병으로 허망하게 떠났다. 불치의 병을 선고 받고 고통으로 투병하며 사는 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자상하고 이웃 섬기고 하나님 믿고 의지하며 무엇보다 건강을 살뜰하게 챙기던 분이다. 어머니 담근 김치 맛있다며 몸에 안 좋은 흰밥 대신 물 마시며 먹고 삶은 계란도 흰자만 드셨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지난 일들은 괴로워하고 마주할 오늘을 근심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내일을 미리 염려한다. 내 근심과 걱정은 과거집착형이고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지속형이다. 하루도 걱정 근심 내려 놓고 산 적이 없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 ‘절망’ 중에서. 구원과 평강을 꿈꾸지만 후회도 반성도 없이 근심 걱정에 매달려 허덕이며 산다. 새벽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승인지 저승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환상처럼 스쳐가는, 의식과 무의식이 엇갈리는, 몇 초의 희미한 이미지가 나의 하루를 지배한다. 환상과 기쁨도 있지만 걱정과 근심 거리가 대부분이다. 안반낙도(安貧樂道)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무수옹(無愁翁)의 길은 요원하다. 탐심을 버리면 피곤한 삶이 덜 고단해진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버리면 사는 게 가벼워진다. 버티려고 발버둥칠수록 삶의 실타래는 더 꼬인다. 무수옹으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유와 집착의 욕망에서 해방 되는 길이다. 욕망의 눈을 감으며 고단함이 덜어진다. 잘 늙는다는 것은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 준 복과 고통을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품위 있게 산다는 것은 한탄과 넋두리, 근심 걱정 대신 처지와 분수를 아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탐심, 진심, 치심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한다. 세상의 모든 것,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지려는 것은 탐심이다. 진심(嗔心)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기는 원망과 불만, 노여움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어리석음이다. 착각에서 나오는 자만과 오만 나태함이 묻어난 의심이다. 삼독심은 분별의 눈을 멀게 하고 물욕과 애착으로 마음을 병들게 해 걱정 근심의 늪에 빠지게 한다. 천복(天福)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지만 받는 자는 인간이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작가
2021.10.17. 20:07
싸한 가을에 만두를 빚는다. 상 위에 빚어진 하얀 만두는, 강물에 띄워진 쪽배가 되었다, 그리움에 물든 밤하늘의 반달이었나 하면, 세월의 언덕을 사뿐히 내딛는 수줍은 버선발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진 새우에 부추를 더해 상현달과 하현달 같은 반달 모양의 만두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달을 창조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부추와 돼지고기를 섞어 반달을 만든 후, 초승달을 닮은 통새우 한 마리를 한편에 세워 보름달 같은 둥근 만두를 탄생시켰다. 이제 달은 밤하늘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밥상 위에도 올라 내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한 주머니에 여러 음식을 품고 있는 만두는, 내가 사는 LA시를 닮았다. 갖가지 소가 다양한 조화를 이루는 만두 속 같이, 한 공간에 여러 민족이 함께 삶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LA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한 주머니에 품은 만두 같이, 나름대로의 맛과 멋이 어우러져 독특하고도 아름답다. 생각해보면 만두와 삶은 닮았다. 삶이라는 주머니에 누구나 나름대로의 그 무엇을 담아도 괜찮은 듯, 만두 역시 그 안에 무엇을 넣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게다가 만두는 한 가지 소만 넣거나, 아니면 몇 가지를 섞어 넣어도 무난하다. 그것은 삶의 길이 단순한 외길이거나 몇 가지 길을 동시에 걷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런가 하면 연한 만두피는 속에 어떤 것이라도 감싸 안아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간과 맛이 어떻든 만두피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품는다. 먼 타향에서 가을을 맞으며 만두를 빚는다. 내가 만드는 만두에는 한과 사랑과 추억이 담긴, 디아스포라의 오렌지빛 향수일 것도 같다. 이때의 만두는 내 영혼이 아늑한 고향으로 떠나고 싶을 때 나를 태우고 떠나는 작은 돛단배다. 삶을 마주하듯, 단정히 앉아 만두를 빚는다. 분수에 맞게 마련한 만두 소를, 세상살이에서처럼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접는다. 생을 빚어가듯 만두소를 욕심껏 많이 넣어 터지지 않게 하고, 너무 적게 넣어 인색하지 않게 한다. 또 만두소의 간을 너무 짜거나 싱겁지 않게 하여, 조화롭게 삶의 간을 맞추듯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 일을 주변 상황에 맞게 처리하듯, 만두를 빚을 때도 모든 과정을 순리에 맞게 한다. 만두를 빚는 일과 살아가는 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만두 요리에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순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만두가 숙성되어 가는 과정은 삶을 터득해 가는 지침서가 된다고나 할까. 그리 보면 아직 세상살이에 미숙한 내가 빚는 만두는, 인생 수행 과정의 일부분이 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만두를 만들어 가는 일은 삶을 실하게 숙성시키고 싶은 나의 작은 의지일 것도 같다. 세월 속에 익어가는 나의 만두는, 언제쯤 환한 보름달처럼 세상을 밝고 행복하게 비추게 될 수 있을까. 김영애 / 수필가
2021.10.15. 17:37
물놀이 가자는 소식이다. 이사벨라 레이크 근처 컨 리버에서 튜빙이란다. 우선 세 시간 정도 드라이브다. 카풀을 원하면 맞춰 줄 테니 이름을 올리라는 문구도 있다. ‘Meet Up’이라는 취미 활동 사이트에서 하고 싶은 활동 제목을 선택하고, 회비를 내고 자세한 정보를 받아 참가하면 된다. 어릴 때 한강에서 튜브를 타고 물놀이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등록을 했다. 컨 리버를 끼고 가는 길이 꼬불꼬불 협곡으로 이어지는 절경이다. 한순간도 도로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커브가 신경질적이다. 살살 달래며 좌로 틀고, 어르며 우로 틀고, 핸들의 호흡이 가빠진다. 마음에 평안을 주는 임영웅 가수의 노래를 계속 듣는다. 혼자 하는 장거리 운전이 이렇게까지 편하고 즐거울 수가. 신나는 기분이 이어지며 캠프장에 도착해 낯선 회원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허걱. 나 잘못 왔나? 잠깐 내 나이를 잊었던 모양이다. 눈에 들어오는 손자뻘 될 듯한 앳된 아이들 모습에 가슴을 스치는 희열. 아름다운 젊음이다. 맞아. 내가 너희들 나이 때는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살았거든. 체력도 지금처럼 믿음직스럽지도 못했지. 한번 같이 놀아볼까나. 바다에서 수상스키도 탔던 체력인데 이깟 튜빙이야 껌이지. 강물에 파도도 없으니 오히려 짜릿한 재미는 기대할 수 없다. 바람 넣은 준비된 튜브를 배급받고 40여 명이 차례로 튜브를 띄운다. 왁자지껄 젊음의 향연이 두 시간 남짓 강물 따라 힘차게 흐른다. 주최자 데이빗의 준비성에 놀랐다. 40여개 튜브를 혼자 처리한다. 바람 넣고 회원의 주문에 따라 크고 작은 튜브를 건넨다. 도우미가 없다. 전문적으로 튜브를 빌려주는 가게가 있는 줄 예상했는데 아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40명분 캠핑 2박 3일 동안의 아침, 점심, 물까지 공급한다. 태양열을 이용한 더운물 샤워까지 오롯이 혼자 담당한다. 물놀이 후 튜브 정리하고 물통들 챙겨 차에 싣고 속도감 없이 차분하게 일에 빠진 무아지경이다. 회원들은 자유식 디너로 삼삼오오 취향대로 레스토랑 행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저녁이라도 먹이려고 기다렸다. 극구 사양하며 혼자 남아 정리하겠단다. 생각이 많아진다. 삶을 꾸리는 자세가 존경스럽다. 준비하고, 행하고, 뒷정리까지 며칠을 통해 손에 쥐는 수입이 얼마나 될까. 결코 큰 숫자가 아니다. 항상 온화한 미소로 느긋하지만 제 할 일을 진행한다. 예정된 시간이 늦어지는 실수투성이지만 아무도 불평을 안 한다. 이와 같은 데이빗이 가득 채워진 지구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더불어 나의 삶을 살짝 돌아본다. 내게 주어진 앞 생애를 어떻게 꾸며 갈 것인지 깊은 생각에 젖는다. 여지껏 그래왔듯이 별 뾰족한 계획이 없다. 그냥 하늘에 맡긴다. 때로는 생각이 닿지 않아 미처 올리지 못한 기도여도,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어김없이 베풀어 주시는 내 하늘 아버지께 통째로 맡긴다. 그리곤 그가 하듯 차분하게 내 몫을 감당할 것이다. 노기제 / 통관사
2021.10.14. 18:56
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 뒤여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고생으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고, 수술 후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우울 모드였다. 그때 옆에서 우리 내외를 유심히 보고 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런다. 뜨헉! 누나라고 해도 봐드릴까 말까인데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픈 나를 격려하려던 그 말이 실언임을 파악한 그분은 미안한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병원에서 오던 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하고,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래야 내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염색머리로 잘 지내다가 팬데믹이 미용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았다. 1년 만에 들른 미용실에서 원장님 말씀이, 검은 염색 물이 빠져 브라운이 되고 흰머리가 나온다며 유행색인 ‘애시 브라운(ash brown)’이 되었다고 그대로 보기 좋다고 한다. 길이만 다듬고 그냥 두었다.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남편이 자신의 바리캉으로 내 머리를 다듬어주곤 했다. 지난주 교우의 아들 결혼식에 가느라 다시 1년 만에 미용실에 갔다. 이젠 예전의 염색 흔적은 없어지고 새치와 약간의 검은 머리칼이 섞여있다. 원장님이 보더니 올해는 멋쟁이 색깔이 ‘솔트 앤드 페퍼 (salt & pepper)’라며 딱 맞춤 색이 되었다고 한다. 돈을 번 기분으로 또 다듬기만 했다. 백발에도 유행이 있나 보다. 소금과 후추가 믹스된 머리색이라니 그 표현이 재미있다. 가만 생각해보니 팔복으로 시작한 산상수훈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고 이미 사람을 소금에 비유한 예가 있었던 걸 기억했다. 그러니 머리칼에 소금과 후추 운운은 대수롭지도 않은 표현인 것이다. 머리칼에 소금이라는 형용이 붙은 바에 그 뜻처럼 사는 삶에 대해 생각을 확장해보았다. 소금 속에는 소독과 살균작용을 하는 염소이온이 들어 있어서 많은 독소들이 유입이 되어도 썩지 않고 유지가 된다고 배웠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기본 조미료이다. 아무리 다른 양념을 많이 넣는다고 해도 간이 안 맞으면 음식이 맛이 없질 않던가. 빛이나 공기나 물은 모든 생명체에 꼭 필요한 것들로 누구나 알고 있다. 소금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소금 역시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왕 소금 머리가 된 김에 세상을 정화시키고 살맛이 나게 하는데 일조하는, 짭짤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이정아 / 수필가
2021.10.12.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