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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기자 "한인 사회 주장 확실하게 전할 창구 갖춰야"

이경원 기자는 미주 한인 최초의 주류 언론 기자다.   그는 지난해 3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가주 새크라멘토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단순한 이력이나 직함이 아니라, 한 사건을 끝까지 파고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기자는 1928년 6월 1일 경기도 개성(당시 행정구역)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인 이형순 지사의 아들로,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성장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50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서는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이후 일리노이대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과 함께 언론 실무 경험을 쌓아 1951년에는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언론 담당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56년 이 기자는 테네시주 킹스포트의 주류 일간지에 기자로 입사했다. 아시아계 이민자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찰스턴 가제타로 자리를 옮겨 남부 지역의 민권 운동과 빈곤 문제, 애팔래치아 지역 탄광 광부들의 진폐증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당시 그의 탐사 보도는 지역 권력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현장을 벗어나지 않고, 사회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기사로 기록했다.   1970년 이 기자는 새크라멘토 유니온으로 이직했다. 사건 담당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가주 공직사회의 오래된 관행과 재정 운영 구조를 추적했다. 주정부와 의회의 예산 집행, 계약 구조, 특혜성 관행을 파헤친 연속 보도는 주류 사회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탐사 보도로 그는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며 언론계에서 영향력 있는 탐사 기자로 평가받았다. 이후 그가 맡게 된 사건은 그의 기자 인생에서 가장 길고 치열한 취재로 이어졌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살인 사건으로 한인 청년 이철수가 체포됐다. 당시 만 18세였던 이철수는 백인 관광객 목격자의 증언을 근거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종신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기자는 사건 기록과 재판 과정을 취재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범행은 대낮에 벌어졌지만, 유일한 목격자들은 아시아계 인물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고, 체포 과정에서는 이철수가 ‘중국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 곳곳에서 의문이 드러났다.   그는 이 사건을 단발성 기사로 끝내지 않았다. 새크라멘토 유니온 기자로서 5년 동안 100여 차례, 120회에 가까운 연속 보도를 이어갔다. 재판 기록을 뒤지고 증언을 검증하며 수사 과정의 허점을 하나씩 기사로 공개했다.   이 기자의 기사는 신문 지면을 넘어 복사돼 사회복지사와 학생, 지역 인사들 사이에서 공유됐다. 한인 사회를 넘어 중국계와 일본계를 포함한 아시아계 공동체 전반으로 이철수 구명 운동이 확산됐다. 이는 아시아계가 공통의 문제의식으로 연대한 초기 사례로 평가된다. 결국 이철수는 다시 재판을 받았고, 10년의 옥살이 끝에 석방됐다. 한 기자의 집요한 취재가 사형수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할리우드 영화 ‘트루 빌리버’로 제작됐고, 구명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리 이철수(Free Chol Soo Lee)’는 2003년 에미상을 받았다.   이철수 사건 이후 이경원은 한인 사회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79년 그는 LA에서 최초의 한인 영자신문 ‘코리아타운 위클리(Koreatown Weekly)’를 창간했다. 주류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던 한인 사회의 이슈와 목소리를 영어로 기록해 주류 사회에 직접 전달하기 위한 시도였다.   1992년 4월, 로드니 킹 폭행 사건과 관련해 백인 경찰관 4명이 무죄 평결을 받자 LA 전역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폭동 과정에서 2000곳이 넘는 한인 소유 상점이 피해를 입었고, 이는 시 전체 피해의 절반에 달했다. 한인타운은 폭동의 중심에 놓였다.   당시 그는 간암과 위암을 겪은 뒤 간이식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병상에서 폭동 전후의 상황과 한인 사회가 처한 현실을 영어 기사로 기록하도록 지휘했다. 한인 상점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게 된 배경과 흑인 사회와 한인 사회 사이에 누적돼 온 긴장, 이를 단순한 인종 갈등으로 묘사하는 주류 언론 보도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폭동 이후 그는 주류 언론이 한인 상인을 ‘탐욕적이고 무례한 이민자’로 단순화해 묘사하며 갈등을 증폭시켰다고 지적했다. 한인 사회 내부의 목소리와 경험을 외부 사회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고, 폭동을 둘러싼 복합적인 원인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이 기자는 NBC 방송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UC 데이비스에서 저널리즘을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도 나섰다.   1987년 그는 ‘북가주 한인 언론인 협회(KAJA·Korean American Journalists Association)’를 공동 창립했다. 한인 언론인들이 서로 연결되고 성장할 수 있는 네트워크였다.     그의 이름을 딴 이경원 리더십 센터는 현재도 LA 한인타운에서 운영되며 차세대 리더 교육과 장학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자는 미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워싱턴DC 교외 알링턴 언론 기념관과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에 등재됐다. 그는 20세기를 빛낸 500명의 미국 언론인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계 기자로 선정됐다.   평등·인권·정의 구현에 앞장선 공로로 2007년 미국 정의증진재단이 수여하는 정의상을 받았고, 아시아아메리칸저널리스트협회 최초로 종신 업적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2003), 미주동포재단 자랑스러운 한국인상(2006) 등을 받았다.     ━       ☞ 이경원 기자는…   지난해 3월 8일 가주 새크라멘토에서 별세했다. 향년 96세.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와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테네시주 킹스포트 타임앤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찰스톤 가제타와 새크라멘토 유니온에서 활동하며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한인 최초의 영자신문 ‘코리아타운 위클리’를 창간했다. 북가주 한인 언론인 협회(KAJA)를 공동 창립했으며, NBC 방송 고문과 UC 데이비스 저널리즘 강사로 활동했다. 생전 국민훈장 동백장과 정의증진재단 정의상을 받았다. 정윤재 기자이경원 한인 사회 구조 미주 한인 주류 언론

2025.12.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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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리더십센터 20주년…공동체·연대·차세대 리더 조명

이경원 리더십센터(이사장 김도형 변호사)의 ‘제20주년 연례 모금 만찬’ 행사가 지난 19일 LA한인타운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커뮤니티 리더와 자원봉사자 등 150명은 이경원 리더십센터 20주년을 축하했다.     행사에는 김영완 LA총영사, UCLA·USC 등 학계 인사, 일본·라틴계·흑인 커뮤니티 리더, 고 이경원 대기자 가족 등이 참석했다.     주최 측은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연대를 통한 성장을 도모’라는 주제로 이경원 대기자의 커뮤니티 봉사정신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강조했다.     한인 커뮤니티가 본받아야 할 인물을 선정해 수여하는 이경원 스피리트상 영예는 UCLA 드림 리소스센터(DRC)의 주 홍 소장과 일본계 커뮤니티 단체 니케이 프로그레시브에게 돌아갔다.     두 단체는 이민자 권리 운동, 소수계 차세대 청년 리더 육성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참석자들은 지난 3월 8일 별세한 이경원 대기자와 10월 8일 별세한 이민자 권리 옹호자이자 전 UCLA 노동센터 소장인 켄트 웡 교수 추모 행사도 진행했다.   이경원 리더십센터는 한인타운에서 정의와 인권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3년 미주한인이민100주년을 기념해 설립됐다.     지난 20년 동안 하는 한인사회 정체성과 다인종 사회에서의 나눔의 역할을 강조하며 차세대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게시판 리더십센터 이경원 이경원 리더십센터 이경원 대기자 이경원 스피릿상

2025.12.2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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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경원 기자 추모식

지난 3월 8일 향년 96세로 타계한 고 이경원 기자 추모식이 24일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열렸다. 주류 언론에서 활약한 고 이경원 기자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살인사건 누명을 쓰고 복역중이던 이철수씨의 억울한 사연을 처음 보도해 주목 받았다. 이후 5년간 이철수씨 관련 기사 100편 이상을 작성하며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기여했다. 추모식에는 가족, 지인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상진 기자이경원 추모식 이경원 기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옥스포드 팔레스

2025.05.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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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론] 이경원 대기자를 추모하며

이경원 대기자가 지난 토요일 오전 8시17분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시안 아메리칸 언론인 대부로 불리는 이경원 기자는 미 주류 사회에서는 K.W. Lee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철수 사건을 파헤쳐 무죄를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한 탐사 보도 대기자이다.   이철수 사건은 할리우드에서 ‘True Believer’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 사건의 주역인 이경원 기자에게는 전혀 알리지도 않았고 주인공은 백인으로 둔갑해 백인 영웅을 만들기도 했다.   이철수 사건은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중국 갱단원 살인 사건으로 비롯됐다. 사건의 용의자로 이철수가 체포되었는데 동양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백인 여행객들이 이철수를 지목하면서 유죄 평결을 받고 수감됐다.     중국 갱단들의 싸움에 엉뚱하게 영어가 미숙했고 미국에 이민온 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한인 이철수가 누명을 쓴 것이다. 수감 중 백인 갱단원들이 이철수가 라틴계 갱단 소속이라고 믿고 칼로 찔러 죽이려고 했는데 이철수가 칼을 빼앗아 백인 죄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사형수가 되었다.   이경원 대기자는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온지 탐사보도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철수 사건을 끝까지 파헤쳤고 이철수 구명 위원회를 결성하고 무죄를 증명하여 석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23년 줄리 하가 이철수 사건을 다큐 영화로 제작하여 에미상을 수상하면서 이철수 사건이 최근 다시 부각됐다. PBS에서도 상영되었고 여러 대학과 커뮤니티에서 상영되고 있다.   이경원 대기자의 언론인으로서의 업적은 실로 눈부시다. 1950년대 동양인 최초로 미 주류 언론사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남부에서 백인 정치인들의 부정 선거를 파헤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9년 이경원 대기자는 LA에서 ‘코리아타운 위클리’라는 영문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매주 자신이 거주하던 새크라멘토에서 LA로 자동차를 몰고 왕복 운전하면서 신문을 발행했다. 당시 영어를 구사하는 한인의 숫자는 매우 적었고 결국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이경원 대기자는 한국일보 영문판 편집국장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사회문제로 부각된 한인 상인과 흑인 갈등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1992년 LA 폭동 당시에는 한인 사회의 입장을 주류 언론에 보도하는 맹활약을 했다.   이경원 대기자는 25개 이상의 공로상을 수상했고 LA에는 이경원 기자의 이름을 딴 이경원 리더십 센터가 차세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필자는 이경원 기자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다행히 여려차례 인터뷰를 했고 영상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앞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경원 기자는 또한 초기 한인 이민자들과의 구술사를 남겼는데 필자가 한국어로 번역하여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외로운 여정’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경원 대기자는 미국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강사였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UC 리버사이드 대학교에서도 여러번 초청하여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2024년 4월 새크라멘토 주립대학 특강을 갔을 때 마지막으로 만나 필자의 책 파차파 캠프 영문판을 전해 주었다. 책에 사진들이 부족하다고 필자를 마구 야단을 쳤는데 요즘은 책에 사진들이 많이 있어야 주목을 받는다는 조언을 한 것이다.   이경원 대기자의 개인적인 삶도 파란만장했다. 소위 ‘나인 라이브스’ 즉 고양이는 9개의 목숨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경원 대기자를 비유하는 말이 될 것이다. LA 폭동 당시 응급 상황이 발생하여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간 이식 수술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간 이식 수술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경원 대기자는 술과 담배도 즐겼는데도 불구하고 올해 6월이면 97세가 되는 나이까지 오래 사신 것이다.   이경원 대기자는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는 물론 한인 사회에 많은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한인 2세들뿐만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그리고 타 인종 언론인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이경원 대기자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시면서 후배들을 응원해 주세요.”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이경원 대기자 이경원 대기자 이경원 기자 한인 이철수

2025.03.1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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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이철수 무죄 판결’ 끌어낸 참 언론인…이경원 대기자 별세

주류 언론에서 활약하며 한인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이경원(사진) 대기자가 지난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고인은 지난 1928년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직후인 1950년 도미했다.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지난 1955년 일리노이대에서는 언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인은 같은 해 테네시주에 있는 킹스포트 타임스 앤 뉴스(Kingsport Times and News)에 기자로 입사하면서 아시아계 이민자 최초의 주류 일간지 기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탐사보도 전문 기자였던 그는 애팔래치아 광부들의 진폐증 문제와 짐 크로우 시대 남부 지역의 인권 운동 상황 등 여러 사회 이슈를 다뤘다.     이후 1970년 새크라멘토 유니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살인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복역중이던 이철수씨 스토리를 처음 보도했다. 이후 그는 5년간 이철수씨 관련 기사 100편 이상을 작성하며 그의 재심과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기여했다.     고인은 지난 1979년 한인 사회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미국 최초의 한인 영어 신문인 ‘코리아타운 위클리(Koreatown Weekly)’를 창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션 이씨와 딸 2명, 손자·손녀 6명이 있다. 장례는 비공개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경원리더십센터(소장 김도형)는 이달 중 LA에서 추모식을 열 계획이다.   김경준 기자이경원 이철수 한인 기자 김경준 미국 캘리포니아 가주 엘에이 로스앤젤레스 LA뉴스 한인 뉴스 미주 한인 한인 LA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2025.03.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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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리더십 센터 서머 리더십 학생 모집

비영리재단 이경원리더십센터(소장 이도형 변호사)에서 ‘한인 서머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KAYLT)’에 참가할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다.   지난 1992년 LA폭동발생 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오는 6월 13일부터 8월 5일까지 총 15개의 대면 및 비대면 세션을 통해 한인 청소년들에게 아시안 문화와 역사, 정체성 확립에 대한 이슈를 지도한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아시안 증오범죄 문제부터 4·29 LA폭동사, 한인타운 역사 등 다양한 커뮤니티 역사와 이슈를 주제로 공부하고 지역 정치인들과의 인터뷰, 한인타운 주요 기관 탐방 등을 통해 학생들이 폭넓은 사고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주요 정치인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고 리더십과 한인 및 아시안 정치력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신청자격은 리더십 개발을 원하는 고등학생들로,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문의: (213)321-7220 또는 [email protected] 장연화 기자리더십 이경원 비영리재단 이경원리더십센터 이경원 리더십 서머 리더십

2022.06.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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