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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트렌드] 약한 자 세워야 할 이민교회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묻지마 흉기와 총기사건이 연일 일어나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 개봉한 드라마 '비프(Beef)'는 주인공의 사소한 운전 다툼으로 시작된 에피소드가 인간의 근원적인 분노와 좌절까지 연결되면서 과연 누가 나의 적이고 친구이고 이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 현대사회를 '분노 사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특히 최근 한국 뉴스를 보면 한국도 이제는 치안 안전 국가가 아닌 것 같다. 묻지마 흉기 난동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대낮에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는 불안한 나라가 되었다. 그 이면에는 한국인들의 좌절과 불안, 사회 전체가 병들었음을 나타내는 신호라고도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점점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금수저가 금수저를 낳는 사회를 만들고 흙 수저들에게는 절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약육강식 사회가 되었다.     또한, 한국에 가끔 출장을 가서 운전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운전 매너 때문에 놀라곤 한다. 끼어들기를 하면 욕설에, 보복 운전에 살벌하기 그지없다. 누구 하나 걸려봐라 하는 식 같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범죄자들의 태연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SNS로 인해 사람들이 즉각적인 쾌락을 느끼고 조금만 남이 피해를 주면 바로 응징하려 한다. 또한, SNS로 남들과 비교 당하는 기분 때문에 쉽게 좌절을 느낀다. SNS는 진중한 사고력을 떨어트린다. SNS가 사람들의 참을성을 더욱 약하게 하는 것 같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전후 맥락을 사고하는 능력도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     한국은 점점 공동체성을 잃어가는 사회가 되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회를 지탱해 주는 힘은 공동체성이다. 서로 돌보는 것이 사회적 자본이라 생각한다. 각자도생의 사회가 될수록 나의 이웃은 이겨야 할 경쟁자가 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심한 듯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되면서 취약 계층이 더욱 많아지는 것 같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여서 대중을 향한 테러를 하는 행동은 사회가 암에 걸려서 나타나는 증상이라 생각한다.   특히 한국 교육들이 나만 잘 살고 보자는 엘리트주의에 빠져있고 모두가 의사, 변호사가 되려는 사회는 정상일 수 없다. 앞으로 겪게될 초고령화 사회로 인해서 한국의 경제는 밝지 않다. 한국은 지금 경제적으로는 최고 절정을 이룬 듯하다. 그러나 서로 돌보는 공동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한 지속적인 풍요를 이루기 어렵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적이 되어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되고 국가가 이를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약한 자들을 챙기는 사회가 되어야 지속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미국이 아직은 희망이 있다. 미국의 경쟁력은 여러 비영리 단체와 봉사자들, 장애인 배려와 약한 자를 돌보는 배려 사회에서 나오는 것 같다. 미국에 있는 한인 이민교회의 역할도 교회에서 돈 있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이민교회 한국 사회 한인 이민교회 사회 구성원들

2023.08.28. 18:59

"이민교회 미래 밝지 않지만…연합해서 힘 모아야"

50대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목회지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목회를 두고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 20주년(1987년)을 한 해 앞두고 당회에 조심스럽게 리더십 교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당회도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서로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뒤 기도의 시간을 갖고 있는 가운데 교회는 20주년을 맞았다. 때마침 그때 나성영락교회에서 청빙 제의를 받았다. 청빙을 받기 1년 전부터 당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그해 9월 사표를 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를 모르는 일부 교인들은 '큰 교회로 가려고 사표를 냈다'는 오해도 했다. 그런 게 절대 아니었지만 항변하지 않았다.     처음 나성영락교회에 청빙을 받아 간 것은 1988년 1월이었다. 당시 김계용 목사 후임으로 청빙을 받았고 1989년 10월부터 제2대 담임목사로 위임받았다.   김계용 목사님과의 인연은 깊다.     청년 시절 서울장로회신학대학 재학중에 대구에서 군대(당시 2군 사령부ㆍ1957~1960) 생활을 했었다. 군시절 잠시 외출했다가 대구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 김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고 계셨다. 당시 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분의 설교, 성품 등 모든 것을 본받고 싶었다.     이후 김계용 목사님은 대구에서 서울 무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기셨다. 그 사이 나는 제대를 한 뒤 남은 학업을 다 마쳤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먼저 무학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김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무학교회에 교육 전도사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분 밑에서 사역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자리가 없다'며 거절하셨다. 훗날 나성영락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뒤 김 목사님을 만나 예전 일을 물어봤다.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돌이켜보면 인연이란 건 참 신기하다. 그때 무학교회에서 사역은 못했지만 김 목사님은 27년 후에 나를 후임 목회자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인생의 방향이 또 한번 바뀌게 됐다.     처음 LA에 갔을 때 김계용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안식년을 보내고 계셨다. 청빙을 받고 일단 행정목사로 사역했지만 주일 설교도 하고 대리당회장 역할도 맡았다. 이후 김 목사님이 돌아오셔서 8개월 정도 공동 목회를 했다.   젊은 시절 김 목사님과 꼭 같이 사역을 해보고 싶었는데 뒤늦게나마 LA에서 그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짧지만 김 목사님과 공동목회를 했던 그 시간은 참으로 유익했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리더십 이행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역 철학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김 목사님과 함께 수개월간 사역하며 그분의 목회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부작용없이 사역을 인수인계 하는 시간이 됐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동양선교교회와 함께 LA의 양대 교회였다. 그때 한인 사회에는 이민 교계를 대표했던 목회자 4명이 있었다.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목사님을 비롯한 임동선 목사(동양선교교회), 조천일 목사(라성빌라델비아교회), 김의환 목사(나성한인교회) 등이다.   그때 한인 교계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오렌지카운티 지역에서는 김광신 목사의 은혜한인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이민 교회가 서서히 활기를 띠는 시기였다.   그 가운데 젊은 목회자가 청빙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기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3년간 교회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주보 양식까지 그대로 두었다.   이유가 따로 있었다.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오자마자 기존의 것을 바꾸기 시작하면 전임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전임자를 따르던 교인들에게도 섭섭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교회가 잘 해오던 것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어가는 노력이 더 중요할때도 있다.   교회 사역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건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3년 정도 지났을 때다.   전통 형식의 예배 대신 현대적인 느낌의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예배를 도입했다. 과감하게 목회자 가운도 벗었다. 설교를 하는 강단도 좀 더 자연스럽게 바꿨다.   외형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 당시 이민 목회를 경험하면서 느낀 부분 중 하나는 교회에서는 열심인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비신자처럼 살아가는 신앙인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민 생활 자체는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삶이 고단하다 보니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이민자도 많았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거나 가정이 깨져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가정을 바로 세우고 치유하는 사역도 필요했다.     1세대 이민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2세들도 미국에서 태어나기 시작했다. 차세대 기독교 교육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한인교회가 더 이상 울타리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됐다. 지역사회, 타인종과도 교류해야 하는 중요성도 절감한 게 그때다.   교회 규모가 크니까 토론토에서 사역할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300명 정도까지는 목회자와 교인이 어느 정도 관계성을 가질 수 있었는데 큰 교회로 오니까 그 부분이 참 아쉬웠다.   사역은 관계가 중요하다. 당회원 가정을 개인적으로 만나 좋은 식당에서 대접을 했다. 그들의 삶을 듣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자 했다. 나중에는 3가정씩 함께했다. 당회원들도 부부끼리 친해지고 관계성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목회 비전을 세웠다. 총 7가지였는데 ▶복음적 설교와 사역을 통한 전인적 구원 ▶이민자의 아픔과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평신도 리더를 키워 그들과 함께하는 교회 ▶2세 교육과 차세대를 세워주는 목회 ▶세계선교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회 ▶지역사회를 섬기는 목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 등에 주력했다.   목회를 하면서 무엇보다 차세대 사역에 중점을 뒀다. 이중언어가 가능한 교역자를 모집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이중언어를 사용하게 했다. 그때 2세들을 위해 영어권 목회도 시작했다. 이중언어 사역을 시작했더니 어느덧 주일학교 학생들만 1500명 이상 모였다.   1000만 달러 장학기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1세대에서 끝나는 한인사회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차세대 한인들을 위해 씨앗을 심는 게 필요했다. 장학기금을 모았더니 매해 30만 달러가 나왔다. 그 장학금으로 목회하는 동안 3000명 이상 학생을 도왔다.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만 100여 명 이상이었다. 지금은 그 학생들이 곳곳에서 대학 교수, 목회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나성영락교회는 그때 모인 기금으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을 키운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교역자의 성장도 필요했다. 함께 동역 하면서 그들을 최대한 많이 격려했다. 그때 부목사로 있었던 진재혁 목사, 박형은 목사, 양춘길 목사 등 많은 교역자가 이후 교계 곳곳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목회자가 됐다. 그야말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성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27가정에 매월 2000달러씩 지원하며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지 현지 목회자 160명도 도왔다.     IMF때 한인 선교계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 KAMSA라는 기관을 조직해서 500명의 선교사에게 매월 200달러씩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그렇게 나성영락교회에서 16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70세가 정년이었지만 나는 68세에 은퇴를 결심했다. 전임인 김계용 목사님도 정년을 채우지 않았었다.     나는 참으로 받은 게 많은 목회자다. 목회를 하며 이렇다 할 위기도 사실 없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보면 사실 마음이 아프다. 목회 환경이나 상황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학을 하겠다는 젊은이도 줄고 있다. 주변을 보면 택시 기사를 하는 목사들도 있다. 특히 중고등부 같이 차세대를 담당하는 사역자들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한인 교회도 팬데믹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다.   인간적으로 이민교회 미래를 생각하면 사실 밝지 않다. 그럴수록 소형 교회들은 오히려 연합 운동 등을 통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중언어가 가능하고 합리적인 젊은 목회자들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갖고 임하면 그래도 한인 교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관련기사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긴 이야기<1> 정리=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이민교회 미래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훗날 나성영락교회 후임 목회자

2023.05.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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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건강한 이민교회 만들기 헌신…LA기윤실 창립 유용석 장로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LA기윤실)을 창립한 유용석 장로(사진)가 4일 오전 8시20분 별세했다. 97세.   유 장로는 미주 한인 이민 교계를 위해 평생 헌신해 온 인물이다. 그는 건강한 이민 교회를 세우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지난 1993년 LA기윤실을 창립했다. 당시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김인수 교수(고려대 경영학과), 손봉호 장로(고신대 석좌교수) 등이 유 장로를 도와 LA'기윤실'에 힘을 보탰다.   유 장로는 평소 “신앙을 실천하고 정직하고 검소하게 나누며 살자”고 말해왔다.   이로 인해 LA기윤실은 창립 이후 한인 교계에서 골수 기증운동, 고려인 생활 필수품 및 의약품 지원, 북한 어린이를 위한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 탈북자 돕기 운동, 조선족 학생 장학금 제공 등 수많은 지원 사업 및 캠페인을 전개해왔다.   특히 유 장로는 기독교인으로서 건강한 이민 교회를 만드는 일에도 사력을 다했다.     그는 LA기윤실을 통해 교인들을 위한 생활신앙운동, 교회를 바로 세우는 건강교회운동 등을 전개했다. 또, 한인 교계의 투명한 재정을 위해 정직한 세금 내기 운동은 물론 매해 건강교회 포럼, 목회자 초청 공개강좌 등도 정기적으로 개최했었다.   유 장로는 192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에 업혀 북간도로 갔다. 이후 20대 중반까지 평양 등에 살다가 1.4 후퇴 때 월남했다. 생전 그의 애창곡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평생 북녘땅을 가슴에 품고 북한 어린이 돕기 등에 앞장섰던 이유다.   그는 교사로 일하다가 1975년 도미했다. LA로 이민 온 뒤 그는 무역업에 종사했었다. 당시 유 장로는 이민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사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LA기윤실 창립의 근간이 된 생각이었다.   그는 지난달 30일 호흡이 어려워지며 풀러턴 지역 그린필드케어센터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방문객 한 명씩 모두 기도를 해주며 삶을 정리해나갔다.   아들 유대호 목사(갓즈패밀리교회)에 따르면 유 장로는 이날 오전 가족과 함께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이후 “다 끝났다” “내가 더 고맙다” “I love you” 라며 마지막 세 마디를 하고 눈을 감았다.   장례 예배는 오는 16일 오전 10시 나성성결교회에서 진행된다.   ▶연락: (909)910-9261 장열 기자삶과 추억 이민교회 유용석 유용석 장로 건강교회 포럼 생활신앙운동 교회

2022.04.0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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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교회, 1세와 2세의 공통분모 될 수 있나"

  ━   한인 교회가 사라진다 〈5〉     이민 1세대와 생각 다른 2세들 교회 운영, 철학, 방향성도 달라   1세들은 이민자, 성인 사역 추구 2세들은 아시안, 다민족 중심 사역    이민교회 유지, 생존에 몰두해와 장기적 안목 갖고 미래 준비해야    한인교회는 이민자의 모임이다.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특수성은 곧 이민교회의 정체성이 됐다. 한인교회는 민족성 언어 문화 사고 등의 공통분모를 소유한 이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한인교회가 이민 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문제는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세대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 1세대 중심의 한인 교회에도 급격한 변화를 요구한다. 그 흐름 속에 어쩌면 소멸과 생존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미래는 다가오고 있다. 이민교회는 왜 변해야 하는가. 오늘날 한인 교회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장열 기자   2세들은 1세 교회의 운영 방식 등을 답습할 수 있을까.   내셔널서베이위원회가 발표했던 '북미주 전국 한인교회 실태' 조사(4109명 참여)에 따르면 한인 2세 목회자 5명 중 2명(40.7%)이 '주류 교계 지도자를 사역 모델로 삼고 배우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과는 2세들이 1세 목회자에게 배울 점이 없다거나 윗세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2세들의 사고로 운영되는 교회는 1세권 교회와 토양 구조 등에서 차이가 있다.   한인 2세 제이든 김 목사는 "1세들의 영성 신앙적 열심은 배울 게 너무 많다. 그러나 교회 운영 시스템 색깔 방향성 등은 1세들의 모임과 다른 부분이 많다"며 "주류 교계는 백인 중심에서 다민족화 되고 있다. 2세들도 이민자에서 아시안으로 아시안에서 다민족으로 사고가 바뀌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민교회는 '이민자'를 위해 존재한다. 한인 이민자가 모이는 집단이다 보니 언어나 문화적으로도 동일한 색을 지니고 있다. 한인교회가 단순히 종교 기관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이민자를 위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은 이민 인구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줄고 있다. 바다를 건너 타향(미국)에 정착하는 한인보다 미국서 나고 자란 세대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한국 중심의 문화가 편했던 이민 세대는 점점 '이중 문화주의(biculturalism)'로 옮겨가고 있다.   센서스국 통계에서 한인 인구 구성을 분석해본 결과 전체 한인 중 미국 태생(약 22%)과 한인 혼혈(약 21%)을 합한 비율이 이제는 한국 태생(약 56%)에 육박한다. 한인 혼혈의 경우 2015년과 비교하면 무려 21% 증가했다. 그만큼 이중 문화의 융합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미주성시화운동본부 최문환 이사장은 "내 경우만 봐도 증손자까지 있는데 아이들이 다 영어를 사용하고 며느리도 한인이 아니다"라며 "이들은 이민 1세대와는 다르다. 자신을 '이민자'가 아닌 미국에서 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이 사회의 일원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언어의 차이는 곧 문화와 사고방식의 괴리를 낳는다. 이민 1세대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에서 2세와의 언어 문화 차이는 가장 뚜렷하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LA지역 한 중대형교회에서 시무장로를 역임했던 최익수 장로는 "집에서 부모는 한국말 자녀는 영어로 말하는 한인 가정이 이제는 많아졌다. 거기서도 괴리가 생기는데 하물며 이민교회는 어떻겠는가"라며 "많은 한인교회가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양세대간 교류가 언어나 문화 차이로 쉽지 않다. 이런 부분을 해결하는 게 한인교회가 당면한 과제"라고 말했다.   1세는 '이민자' 2세는 '아시안-아메리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기독교내에서도 이러한 정체성의 차이는 교회의 존재성을 두고 완전히 다른 역할 기능 등을 요구한다.   어바인 지역 데이브 노 목사는 "2세들도 사회 활동을 하면서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민족적인 자부심이 있다. 그러나 교회도 그 정체성을 가진 이들만 모여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며 "미국은 다민족 사회 아닌가. 태생적으로 다양한 인종을 만나며 교육받고 성장했다. 2세가 생각하는 미국과 1세가 생각하는 미국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뿐 아니라 기독교 단체 활동만 봐도 변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남가주 한인교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마운틴 무버(전문직 종사자 모임)' '아이노스(오케스트라 모임)' '레드 스레드(자원봉사)' 'GMIT(영화 및 문화 사역)' 'G2G(2세 기독교육 기관)' 등 한인 2세 기독 단체만도 100여 개 이상이다.   북한 인권 기독교 운동 단체에 속한 마크 최(40)씨는 "한인 2세 중심으로 모이는 부분도 있지만 타인종 크리스천들도 함께 활동한다"며 "한인 2세들의 사역이라기보다 사실상 다민족 사역이다. 오히려 더욱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사역하는 걸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 교회가 '한인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대간 공통분모가 되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LA지역 필립 이 목사는 "그동안 한인 1세 부모들은 자녀의 신앙이나 정체성 교육에 대해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 이를 교회나 타기관에 일임했다"며 "반면 이민 교회는 생존 문제에 시달리다 보니 성인 사역 중심으로 운영된 부분이 있었다. 이제는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을 가져야 할 때"라고 전했다. 장열 기자이민교회 공통분모 이민교회 유지 한인 이민자 한인 교회

2022.02.2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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