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타운 맛따라기] LA 순대, ‘아바이’서 ‘무봉리’까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시린 속을 데우던 음식. 가난했지만 잔칫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던 음식. 순대는 고려 시대, 돼지고기가 귀해 멧돼지를 잡아 내장에 채소와 피를 채워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민족의 지혜와 생존력이 응축된 음식이다. LA한인타운의 순댓국 지형도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이민 사회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 편의 역사서와 같다. LA 순대 역사의 서막을 연 두 기둥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버몬트 길 현재 ‘간빠이’ 자리에 있던 ‘함경도 아바이순대’는 타협 없는 원류의 맛을 고집했다. 진한 돼지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야말로 ‘날것’에 가까운 이북식 순대는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의 순댓국 한 그릇은 실향의 아픔과 잃어버린 고향의 맛을 일깨우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반면, 6가와 알렉산드리아 플라자에 둥지를 튼 ‘서울순대’는 대중화와 사업화의 길을 택했다. 잡내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맛으로 폭넓은 고객층을 사로잡았고, 일찌감치 웨스턴 길과 세리토스에 지점을 내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결국 자체 공장을 설립해 LA의 거의 모든 한인 마켓과 분식점, 주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거대 공급망을 구축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서든 쉽게 맛보는 순대는 ‘서울순대’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탄생한 셈이다. 이들은 현재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세대가 터를 닦은 자리에 2세대 주자들이 등장하며 LA 순댓집은 본격적인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특히 한인타운의 애호가들은 웨스턴 길의 ‘한국순대’파와 8가와 후버의 ‘8가순대’파로 나뉘어 자존심 대결을 벌이곤 했다. 필자는 ‘골수 한국순대파’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사장님은 가게 문을 열고 싶을 때만 열었다. 그 앞을 지나다 문이 열려있으면, 그날은 무조건 순댓국을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예측 불가능함마저도 묘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파고는 비켜가지 못했다. 테이크아웃으로 겨우 버티던 가게는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8가순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주방을 지키는 사모님과 홀을 책임지는 사장님 단둘이 운영하던 한국순대와 달리, 8가순대는 탄탄한 시스템과 규모를 갖췄다. 물론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함흥냉면가(家)의 큰아들이 지금의 ‘착한설렁탕’ 자리에 야심 차게 열었던 ‘웨스턴순대’는 ‘5.99달러’라는 파격적인 저가 경쟁으로 시장을 뒤흔들었다. 한때 가디나까지 지점을 확장했지만, 출혈 경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폐업의 길을 걸었다. 한편 8가와 아드모어의 ‘돈돈이순대’는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벌써 9년의 업력을 쌓으며 꾸준함의 미학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순대는 전문점의 경계를 넘어섰다. ‘장터보쌈’, ‘장충족발’ 같은 보쌈·족발집에서 내놓는 순대 한 접시의 수준이 웬만한 전문점 못지않다. 3개 지점을 거느린 ‘진솔국밥’은 순댓국을 시키면 순대를 따로내어주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이러한 진화의 정점에는 ‘무봉리순대’가 있다. 올림픽 길에서 화려하게 시작해 웨스턴 길 시대를 거친 무봉리는 이제 식당을 접었다. 대신, 거대한 센트럴 키친에서 남가주, 라스베이거스, 댈러스, 하와이 등 총 18개 지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식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순댓국이라는 메뉴가 한인타운을 넘어 미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미주 현지 K-푸드 산업화의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함경도 골짜기의 투박한 순대에서 시작해 미주 전역으로 뻗어 나가는 거대 유통망에 이르기까지, LA 순댓국 역시 우리 이민사나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기록과 성공의 신화, 그리고 쓸쓸한 퇴장의 뒷모습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에는 모든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순대 골수 한국순대파 함경도 아바이순대 이북식 순대
2025.07.27. 1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