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전체

최신기사

“이순신에 미쳤다” 16년간 만화로 알린 백인

“이순신은 세계적 영웅이다.”   파란눈의 백인 만화가 온리 콤판(Onrie Kompan)은 이순신에 미친 사람이다.     지난 16년간 이순신을 알리는데 모든 것을 걸었다. 출판사도, 유통망도 없었지만 직접 만화책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한 권씩 팔았다. 그 결과 120개 이상의 컨벤션에서 수많은 독자들과 만났고, 그가 그린 ‘이순신(Yi Soon Shin)’ 시리즈는 지금까지 25만 부 이상 판매됐다.   일리노이 출신 콤판이 이순신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04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비록 드라마를 통해서였지만 그때부터 그는 이순신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후 이순신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영웅으로 알리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콤판은 이순신을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만화에서 이순신은 끈기의 화신이다. 그는 “이순신은 수많은 난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며 “이 이야기가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콤판은 지난 2015년 한국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 ‘청소년 자살 예방’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그는 “희망이 안보이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이 끝까지 싸웠듯, 한국의 청소년들도 삶을 포기해서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국방문을 계기로 그의 관심은 이순신을 넘어 위안부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당시 출판사의 제안으로 그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에 동참했고, 서울 ‘평화의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렀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지만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 이순신과 다를 바 없다”며 “그들의 목소리가 전 세계에 알려져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이순신이 지금 있었다면, 분명 이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앞으로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신을 만화로 그리기 위해 그는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는 2년 동안 난중일기, 임진장초, 징비록 등 임진왜란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자료를 조사했다.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한국을 직접 방문해 여러 전장을 답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순천향대학교 정병웅 교수의 도움을 받아 한국 육군.해군 관계자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군 전문가들의 조언이 필요했다”며 “그 덕분에 만화 속 해전 장면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한국 역사를 주제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그를 외면했다. 미국 만화 시장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콤판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했지만 이순신처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며 “어떠한 어려움이든 해결책은 반드시 있다는 신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현재 ‘이순신’ 시리즈는 마지막 두 편을 남겨두고 있다. 이순신을 단순한 한국의 영웅이 아닌,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역사적 인물로 만들겠다는 게 콤판의 목표다. 그는 “이순신은 세계적 영웅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다. 절망적인 환경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 것이요, 살기를 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는 “이순신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객관적 전력으로만 보면 이길 수 없는 전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순신은 싸웠고 결국은 승리했다”며 “나도 이 싸움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콤판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순신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강한길 기자사나이 이순신 사나이 이순신 이순신 장군 한국 역사 캘리포니아 미국 LA뉴스 LA중앙일보 강한길 미주중앙일보 로스앤젤레스 위안부 onrie kompan 코믹북 만화 난중일기 임진왜란 학익진

2025.03.16. 20:34

썸네일

한국 최초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 10년 대장정의 마무리

대한민국 최고 흥행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 〈명량〉과 2022년 여름 최고 흥행작 〈한산: 용의 출현〉을 이은 세 번째 작품이자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그린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12월 마침내 공개를 확정했다. 이로서 지난 10년 간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온 김한민 감독 이하 스탭들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명량〉을 기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업계의 의견이 많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웅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세계 해전 역사상 손 꼽히는 전투를 스크린에 옮긴다는 것에 대해 실현 가능성과 실현 불가능성 사이, 의견이 분분했던 것. 그러나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시작으로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시리즈, 세 명의 캐스팅이라는 획기적인 기획을 영화로 완성해냈다.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이 훌쩍 넘는 여정의 마지막 작품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노량 해협의 겨울 바다에서 살아서 돌아가려는 왜와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는 조선의 난전과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압도적 스케일로 펼칠 것을 예고한다.   〈명량〉의 최민식, 〈한산: 용의 출현〉의 박해일에 이어 이번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배우 김윤석이 노량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연기로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한 인물을 두고 서로 다른 배우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그 캐릭터를 해석한 경우 역시 한국 영화 사상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가 최초의 케이스다. 최후의 전투를 앞둔 이순신 장군 역으로 분한 김윤석은 좁고 깊은 노량 해협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현명한 장수, ‘현장’(賢將)의 모습으로 몰입해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현장감과 함께 그간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을 선보일 예정이다. 여기에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스펙터클한 재미와 더불어, 왜와의 전쟁을 끝내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압도적 스케일로 스크린에 재현해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전투를 더욱 성대하게 채울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최후의 전투의 현장으로 돌아가 관객들에게 장엄한 승리의 전투의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프로젝트 이순신 이순신 장군 3부작 프로젝트 이순신 3부작

2023.12.22. 9:18

썸네일

“이순신 장군을 존경합니다”

이순신 미주교육본부(이사장 김대영)가 제 5회 충무공 이순신 알리기 대회 시상식을 가졌다.   김대영 이사장은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 '충효의 정신'을 배우며 뿌리 교육을 확고히 하고, 각자 사는 곳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알리는데 주역으로 성장하며 활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대회를 개최했다”면서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의 국격을 높여 주고 우리 한인 학생들이 정체성을 바로 알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번 대회 홍보를 위해 전세계 약 1600여개 한국학교에 연락했으며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캐나다, 멕시코, 미국 등 약 110여명의 학생들이 응모했다.     이중 57명의 학생이 장학금과 상장을 받았다. 주최 측은 코로나로 대면 수업수업을 못하고 인터넷 수업을 하는 학교들이 많아 올해는 참석하는 학생이 저조 하였으나 특별히 버지니아에 열린문 한국학교 학생들이 작년에 1명 상을 받은 것에 비해 올해는 많이 참석해 최우수상 등을 휩쓸었다.   한편, 이순신 미주교육본부는 교사를 대상으로 '제2회 교육 안 공모 대회'를 개최한다.   응모 마감은 2월 10일이고 교육안 쓰기 마감은 4월 15일이다.  김옥채 기자 [email protected]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 이순신 미주교육본부 충무공 이순신

2022.01.16. 11:13

썸네일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하)

9월7일에는 정탐인 임준영으로부터 적선 13척이 어란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9월9일에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탐라(제주도)에서 기증받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중양절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다. 해전 하루 전인 15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을 명량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옮기고, 장졸들을 모아 놓고 그 유명한 명언으로 군사들의 마지막 결의를 촉구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 꿈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승리를 예감하며 확신에 찬 과감한 작전 지휘를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위에 든 그의 최고 명품 경구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치열한 혈전을 앞두고 부하 장졸들의 결의를 다지고자 내린 군령이었지만, 이 경구는 그 의미와 적용의 폭이 대단히 넓어 오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죽자 살자 열심히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이란 뜻으로 널리 쓰고 있음을 교육자들은 알아 둘 일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 9월16일 이순신의 일기는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관찰병)이 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을 주목해 보면 ‘명량 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이 진 치고 있는 물결이 잔잔한 우수영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명량의 거친 물결과 소용돌이를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 듯이 기술한 종래의 작품과 영상물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참조: 해군사관학교 명량해전도) 이순신도 곧바로 13척의 판옥선단을 이끌고 맨 앞장서 133척의 일본함대를 맞이했으나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이순신의 기함 혼자서 130여 척의 적선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다른 판옥선들은 칠천량 참패로 공포감을 미처 이기지 못한 데다 열 배가 넘는 적선을 보니 기가 질려 물결에 할 수 없이 떠밀려 간 듯이 멀찍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가장 염려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쯤 혼자서 맹렬히 독전하던 이순신은 적에게 공격 기회를 주게 될까 봐 뱃머리를 돌려 부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초요기라는 깃발을 흔들어 오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다가온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에게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으나 또한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마”하니, 그들도 마음이 급하여 앞으로 돌진하였으나 곧 적에 포위당하여 이순신 기함이 달려가 구해 준다. 뒤에 처진 다른 판옥선들도 이순신 기함 혼자서도 맹렬한 화력으로 잘 버텨 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연달아 달려와 돌진한다. 이때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안골포(진해) 해전 때 투항해 온 일본인 병사 준사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바다에 떠 있는 일본 장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마다시(馬多時), 마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 마다시란 전의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별명으로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봉장이 되었으나 동생 또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려 적군들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토막 내게 하니 이 광경을 본 적들의 기세가 꺾이고, 그 틈을 타 맹공을 퍼붓자 적들은 전의를 잃고 31척의 함선만 격파당한 채 후퇴했다. 이로써 이순신은 불가사의의 부활전을 승리로 마감하여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또다시 구해 낸다. 구루시마 형제는 원래 해적 출신 형제 수군 장수로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우두머리였던 셈인데, 형제가 나란히 조선 수군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지은 죄에 따른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한편, 이순신은 하루 전 장병들을 독려하며 전했던 그의 명언 ‘필사즉생’을 몸소 실천하여 어렵게만 보이던 승리를 달성하는 살아 있는 교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셈이다. 또 다른 경구 ‘일부당경’은 명량해전 4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 이순신이 구상한 비상한 전략, 3차원적 병목(Battle neck) 저지 지리전 개념을 겨우 2차원 평면적 명량해협의 폭으로 부족한 해석을 내리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폭이 좁은 명량해협(현재 진도대교가 있는 지역)을 해전지로 택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수군의 약점을 지리적 특성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지리전 개념에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선이 수백 척이라 하더라도 폭이 불과 300여 미터인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서서 차례대로 항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을 지키고 있는 막강 화력의 조선 판옥선이 통과해 나오는 대로 격파해 버리면 승산이 있다는 구상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이순신 연구가들이 모두 공감을 하는 바이지만 명량해협이 폭만 좁은 것이 아니라 수심이 1.9 미터밖에 되지 않아 배 밑이 V 자 형인 일본 선박의 통과가 어렵다는 이순신의 입체적(폭과 깊이) 저지 개념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유는 해전 직전 일본 선단 200 척이 명량 입구까지는 도착하였지만, 이순신의 일기대로 명량을 통과해 참전한 일본 선박은 133척에 불과했고, 이들은 모두 크기가 작고 전투력이 약한 협선뿐이었다. 막상 전투력이 강한 일본 대형 선박인 아다케선 약 70척은 수심이 얕은 명량 수로를 통과할 수 없어 입구에 묶인 채 결과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찌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이순신은 명량의 폭과 깊이 두 방향의 입체적 병목현상을 비상한 전술로 구상하고 그렇게 성공하였지만, 자기 자랑을 극히 삼가는 겸손한 분이어서 이 구상을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연고로 우둔한 후손들이 이순신의 천재적 전략 구상을 절반 이하로 깎아내려 평가했다는 죄스러움이 앞선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절대 열세의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끈 총체적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한마디로 그 승리 요인은 군·관과 지역 국민의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는 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국민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숨어 지내던 백전 경험의 옛 부하 장졸들이 자진해서 속속 복귀하여, 판옥선은 13척뿐인데 오히려 노련한 장병들이 충분하여 판옥선 당 인적 전투력은 패전 이전을 능가했다. 더하여 절에 있던 승려들이 다수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힘을 더했다. 10월 하순의 바닷바람은 추위를 더하여 먹을 식량과 추위를 막을 의복이 문제였으나 이는 살 곳을 찾아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든 이삼백 척의 피난 선단이 통제사가 없으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자진해서 식량을 거두어 먹이고 옷을 주어 입혔으니 명량해전의 이순신 수군은 거지군대였다. 결론적으로 명량해전은 하나의 위대한 지도자와 통합의 리더십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표본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끝)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2017.11.14. 7:32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상)

1597년 정유재란의 해 음력 9월16일(양력 10월25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목 울돌목에서 벌어진 13척 대 133척의 압도적 열세의 조?일 대혈전은 여러가지 면에서 진기록을 남기며 조선 수군에 기사회생의 승리를 안겨 준 불가사의한 해전 드라마이다. 우선 이 해전의 배경이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5년이 넘게 이어지는 동안 한번도 패한 일 없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조선 수군의 삼도수군 통제사직이 선조 임금의 오판으로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면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여 비롯된 결사 비상 응급 해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 ‘결사 비상 응급’인가? 믿음직스럽기만 하던 160여 척의 막강 판옥선단이 사라져 맨손으로 수백척 일본 수군을 맞아야 하니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요, 지난 5년여 이순신 수군의 철벽방어로 막아냈던 일본군의 물자보급 생명선인 서해 북상 해로(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양과 평양에 군사와 물자를 공급하는 필수 해로)를 막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비상이며, 밀려오는 일본 수군을 막을 준비를 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으니 응급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의 위기 상황속에서도 침착하고 단호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니 힘써 살펴 볼 일이다. 이제, 7월 16일 원균의 칠천량 참패로부터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대첩까지 정확히 두달간의 이순신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597년 정유년 7월 18일 새벽, 초계(합천)에 있는 권율 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노량으로부터 달려 온 이덕필과 변홍달(이순신의 외가쪽 사람)로부터 이틀 전 16일 새벽의 칠천량 참패와 옛 전우 통제사 원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전사 비보를 듣고 통곡한다. 곧이어 도원수가 찾아와 대책을 구했으나 정확한 상황을 몸소 확인하지 못한 이순신이 자기가 직접 해안가를 답사하여 상황을 확인한 뒤 대책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하자 도원수 권율이 쾌히 동의했다. 이순신은 그날 오후 지체없이 9명의 수행 군관을 거느리고 길을 따난다. 여기서의 이순신의 교훈은, 5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목숨 걸고 남해를 굳건히 지켰건만 선조 임금은 자기를 파면하고 고문까지 한 후 백의종군이라는 불명예 처벌을 내려 원망스러울 수 있었으나 지체없이 어려운 과제를 자원하여 맡아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한 점. 즉 <본질 추구의 정신>과 <신속 위기 관리의 자세>이다. 그리고 오직 나라만을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이순신을 신령님도 가련하게 여겨 돌보는 탓인지 난중일기 곳곳에 신의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이야기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8월 2일의 일기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기록하였는데 신통하게도 다음날 8월 3일 진주 정개산 손경례의 집에서 선전관 양호로부터 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는다. 이날 오후 이순신은 길을 떠나 두치에서 섬진강을 건너 석주관을 거쳐 구례에 도착했는데 한나절 후 남원성 공격에 나선 일본 수군 주력부대인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도라와 고시니 유키나가 부대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북상하였으니 한나절 차이로 길이 어긋나 마치 이순신이 하늘의 도움을 받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8월 9일의 일기에는 낙안 읍성 도착 장면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이 5리밖까지 나와 환영한다’하였고 오후에는 낙안을 떠나 10리쯤 왔는데 ‘늙은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비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한다.’고 촌민들의 감동적인 이순신 복귀 환영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백성들이 하늘처럼 믿는 통제사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어사 박천봉으로부터 선조의 수군 포기 권고를 받는다. 요지는 싸움배 판옥선이 다 없어진 마당에 수군유지가 불가능하니 해전을 포기하고 초계 권율 수하로 돌아가 육전에 참여 하라는 지시였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싸워 볼 희망이 있다는 단호한 결의로 오히려 임금을 위로 설득한다. 명량으로 덮쳐오는 200여 척의 적군 앞에 겨우 열두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아직도’ 열두척이나 남아 있으니- 라고 극단적 긍정의 표현을 쓴데서 포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본질을 추구하는 초인적 <이순신 긍정의 사고 방식>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8월 18일, 초계 원수부를 떠난지 꼭 한달 만에 고흥반도의 회령포에 도착해 바다를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다를 지킬 수군대장이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한달만에야 겨우 바닷가에 도달했다면 그동안의 그의 행적이 궁금해 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대형 목선인 판옥선 한 척에 필요한 인원은 노를 젓는 격군 80명, 활을 쏘는 사부와 화포를 발사하는 화포장 등 약 50명을 합하여 130여 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물자로는 무기인 활과 화살, 화포와 화약과 군사를 먹이고 입힐 식량과 의복의 조달이 필수였다. 당시 해안 지역의 상황은 청천벽력같은 조선 수군의 완패 소식에 해안 백성들이 서둘러 내륙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무인지경이 되어 이순신이 구하는 수군 재건을 위한 인원 및 물자 수집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은 부득이 인가가 있는 내륙을 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하동, 화개, 구례, 곡성, 옥과, 낙안, 보성, 장흥, 군영구미 등 내륙을 순방하고 회령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19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그가 끌고 온 10척의 판옥선을 인수받는다. 배설은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되어 원균 지휘의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원래 겁쟁이인데다가 적세가 어마어마하고 원균의 전술이 미덥지 못하여 자기 수하 10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여 한산도 통제영에 들려 쌓여 있던 군량과 물자를 불태워 창야전을 시행하고 서진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드라마 같은 생생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설은 비록 절체절명의 전투 현장을 이탈하여 사형을 당할 군법을 어겼으나 한산도 청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고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중 10척을 제공하여 나라를 구하는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짖궂은 데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배설은 판옥선 인수인계 현장에도 병을 핑계대며 나타나지 않아 스스로 명을 재촉하였으니 타고난 운명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나 할까? 그 후 배설은 고향 선산에 숨어 살다가 종전 다음 해인 1599년 3월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 당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보다 3개월을 더 살았으니 끝내 아이러니의 주역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8월 20일 이진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다음날 21일부터 23일까지 이곳에서 지병인 속병이 도져 토사곽란으로 인사불성에 이른다. 23일에는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고 28일에는 장도로 옮겼다가 다음날 29일에는 진도 벽파진으로 다시 옮긴다. 그리고 달을 바꿔 9월 2일에는 배설이 끝내 도주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고 한탄한다. (계속)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2017.11.06. 17:3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