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문화적 추천사항을 추호의 의심 없이 섭취해왔던 서울의 친구 그룹이 PTA(Paul Thomas Anderson)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라는 작품, 꼭!!! 봐줘야 한다, 하여 나도 드디어 영화관을 찾았다. 영어울렁증을 안은 채. 2007년, PTA 감독이 만들었던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라는 영화가 엄청 회자할 때, 나도 그 영화를 두 번 봤었는데, 그 영화성향을 떠올리며 시작했던 영화 초반부는 사실 좀 실망스러웠다. 뭔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초조함이 실린 시도였을까. 아무리 세상이 제멋대로래도 이 웬 도에 넘치게 선정적인 화면들일까 싶은. 그러나 투명한 아름다움과 기지를 지닌 윌라 라는 주인공격 16세 소녀의 등장과 함께, ‘I am Sam’ 이후 처음 보는 숀 펜 배우의 광기 서린 연기로 인해, 바로 몰입에 들게 되었다. 불법 이민자를 돕더니, 은행털이하기도 하는, 별반 심각한 정체성을 가진 것 같지는 않은 ‘프렌치 75’라는 자칭 혁명가들과 그들의 적수가 영화의 등장인물들인데, 혁명가라는 단어가 주는 심오함과 달리, 영화는 의외로 정치적이거나 살벌하지 않다. 그들의 임무실행 중 모호한 쾌락에 기반을 둬 야기된 남녀의 성적인 접촉, 그로 인한 한 여자아이의 탄생, 16세로 성장한 그 아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숨 막히는 쟁탈전, 백인우월주의에 편입하고픈 한 백인의 비극적 종말, 와중에 멕시칸 불법 이민자들에게 공동체를 제공하며 혁명의 맥을 이어가는 카라데 학원장의 인류애 등이 주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딸을 홀로 키운 아버지의 끈끈한 사랑과 책임이 주제일 것 같으면서도, 여러 이야기가 촘촘하게 잘 짜여있다는 점일 것이다. 휴머니즘적인 면면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면서도 각 장면은 어디서 본 적 없이 신선하고 정교해서 2시간 40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음악!!! 재즈풍이면서도 여리게 깔린 피아노 음률 위에 비트로만 스릴을 가미한 들어본 적 없는 세련된 흐름으로 누가 작곡한 것일까. 귀를 쫑긋하게 했는데, 찾아보니 무려 그룹 Radio Head의 작곡자라고 한다. 오!! 그리고, 친구들이 열광 극찬했던, 사막 고속도로에서의 질주 장면!! 거의 10여 년 만에 만난 최고의 영화장면이 아닐까. 내가 지금 롤러코스터를 탄 거야 싶은 울렁임. 그곳을 나도 꼭 차로 달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안겨준 초현실적인 장대함과 스릴은 거의 창의력의 끝판왕이라 해야 할 경지였다. 영화 초반의 살짝 도를 넘는 성적인 장치, 그리고, 윌라라는 16세 소녀의 위태로운 목숨 앞에서 갑자기 우군으로 돌변한 인디언 혼혈남자가 개연성의 측면에서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 가지 점만 뺀다면, 타란티노 감독의 ‘거친 녀석들(Inglorious Basterds)’이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우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보고 또 보고 싶다는 별난 그리움이 물씬 일게 하는 수작이었다. 영화가 마쳐지고, 내 옆에 앉은 20대 청년이 손뼉을 치기 시작해서 나도 덩달아 있는 힘껏 박수를 보냈다. Netflix 같은 OTT 시장에 밀려 한없이 추락하던 ‘극장에서 영화 보기’에 다시 불을 지펴준 그 감사함에. 그리고, 너무 큰 엇박자를 내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상기되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자잘 복잡한 인간군상들의 단면과 인간애를 두루 만나게 해 준 PTA 감독에게. 극장 관람의 진수를 보여줄 IMAX로 꼭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소망이 인다. 팝콘과 함께. 박영숙 / 시인이작품과 만났다 애프터 극장 영화 초반부 극장 관람 영화 보기
2025.10.29. 22:29
우리가 상대방을 대할 때,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를 갖고 바라봐야 하지만, 언제나 그들은 각각 다른 숫자를 보여줄 것이고, 거기에는 반드시 그 다른 숫자만큼의 원인이 있음을 알고 바라본다면, 좀 더 넉넉한 세상이 될까…. 천하를 호령했던 역사 속 중국이 무색해지도록, 가끔 이해가 어려운 요즈음의 중국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에 관해 진지한 성찰을 주는 책이 있으니, 루쉰과 더불어 중국 근현대문학사의 2대 문인이라 불리는 항저우 출신 작가 위화의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이다. 작가는 10개의 단어 인민, 영수, 루쉰, 독서, 글쓰기, 혁명, 차이, 풀뿌리, 홀유, 산채를 통해 자신의 성장기였던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전체에 치명적인 손실을 낸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불과 30여 년 만에 사회 경제적으로 일군 엄청난 성장 이면에 감춰진 폭력과 혼란을 직접 경험한 대로 적어, 처절했던 중국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에세이’임에도 소설보다 더 절절히 읽히는 마력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나 잔혹, 비인간성, 몰상식, 가난 속에 패대기쳐 뒀을까…인민들이 이렇게 살아왔구나…를 참담하게 마주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금서로 되어있다는 이 책에서 제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첫째, 문화대혁명으로 책들이 말살당해 마오쩌둥 선집과 어록만 달랑 남아 있던 그때, 책 읽기에 목마른 작가가 어렵사리 구한 책들이 앞뒤가떨어져 나가고중간 부분만 있어서, 상상으로 앞뒤를 완성하곤 했고, 어떤 책은 읽고 돌려주기가 아쉬워, 친구 한 명과 한 날 한 밤을 꼬박 새우며 필사했는데, 그 책이 나중에 알고 보니 ‘춘희’였다는 이야기! ‘도입부나 결말을 알 수 없는 소설을 읽은 것이 상상력 훈련법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하는 작가를 보며, 오늘날, 우리 앞에 홍수처럼 널려있는 그 많은 읽지 않은 읽을거리에 얼마나 예의가 없는지. 미안함과 감사함이 동시에 일었다. 둘째로, 누구는 자기 피를 팔고, 누구는 그 피로 떼부자가 되는 극심한 빈부 격차…유채 기름을 나라에 상납하고 받은 유표를 아끼고 아껴, 결혼자금에 쓰려고 몰래 팔다가 같은 인민 검열원에게 피범벅이 되게 맞고, 유표마저 빼앗겨버린 사람들의 가난한 눈물…어제의 지주가 죄도 없이 하루 만에 총살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들이 황망했고, 셋째로, 가짜뉴스를 발표해도 법률적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이를 속인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인 ‘홀유’… 그리고 표절, 모방이라고 불리는 ‘산채’가 사회 곳곳에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바람에,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자체적으로 어렵게 하고 있어서, 가짜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고 있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의아함의 근본 원인인지 유추하게 되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이다. 감춰둬도 될 모국의 취약점을 작가 정신과 애국심과 연민에 기대어 세세히 묘사해낸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소설, ‘인생’은 장예모 감독의 손끝에서 수려한 영화로 태어났지만, ‘허삼관 매혈기’나 ‘형제’도 꼭 읽어보고 싶다. 어떤 앎일지 벌써 침이 삼켜진다. 박영숙 / 시인이작품과 만났다 중국 목소리 단어 인민 인민 검열원 사회 경제적
2023.03.13. 2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