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전체

최신기사

[인물 오디세이] '붐 바이 조이 한' 조이 한 대표…다시 청춘의 초심을 쫓다

이후 경기불황 타격 자바 사업 뛰어들어 실패도 신규브랜드 '바바' 론칭하고 온라인몰 열어 '제 2전성기' 가수 GD는 말했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맞다. 20대 초반의 청년도 터득한 이 만고불변의 진리는 인생사는 물론 사업에서도 예외를 허락지 않는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는 법이니까. 2000년대 중반 '붐 바이 조이 한'으로 미국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혜성처럼 등장한 조이 한(45) 대표 역시 열흘 붉은 꽃 없는 패션계에서 지난 15년간 제대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한 끝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원한 아티스트이길 원하나 자신이 만든 옷이 시장에서 팔려야 먹고 사는 사업가로서의 숙명도 함께 짊어진 이 재기발랄한 디자이너의 지난 10년간의 궤적은 정글 속 여전사에 다름 아니었다. #패션에 미치다 전주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90년대 하이틴 스타들의 산실이었던 안양예고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고교 졸업 후인 1990년 인기 음악프로그램 KBS '젊음의 행진'의 백댄서 그룹 '행진 아이들' 1기로 발탁돼 활동했고 1992년엔 SBS가 주최한 '신세대가요제'에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힙합그룹 '지그재그'를 결성해 참가, 인기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대형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 준비를 시작했으나 기획사와 그룹 콘셉트 문제로 마찰을 빚어 소속사를 나왔다. 낙심한 그녀에게 당시 전주에서 30년째 유명 웨딩드레스숍을 운영하던 모친은 패션스쿨 유학을 권유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엄마 가게에서 바느질하며 논 덕분에 유년시절 꿈이 패션디자이너였어요. 당시 연예계 생활에 지쳐 있던 터이기도 해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미국에 왔죠." 유타에서 어학코스를 마치고 1996년 LA 아메리칸 인터컨티넨털 유니버시티(AIU)에 입학한 그녀는 재학기간 동안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작품전에서도 1등을 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대학 시절 내내 시큐리티 가드랑 같이 출퇴근할 만큼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 바느질을 할 만큼 패션에 미쳐 있었던 시절이었죠.(웃음)" 이처럼 억척으로 공부하고 방학도 없이 계절학기까지 수강하면서 그녀는 2년 반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전성시대 졸업 무렵 그녀를 아끼는 교수들은 유명 브랜드의 인턴십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마다하고 자바로 갔다. "학교를 빨리 졸업한 것도 IMF 이후 한국에서 지원이 힘들어졌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래서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자바에 디자이너 보조로 취직을 했어요." 뛰어난 실력과 승부근성으로 그녀는 자바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주급 500달러에서 2000달러를 받는 스타 디자이너가 됐다. 남부러울 것 없는 편안한 생활이었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는 2000년 남편과 함께 멜로즈가에 자바에서 옷을 떼다 파는 '제임스&조이'라는 옷가게를 오픈했다. 비즈니스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이듬해 직장을 나와 자신의 브랜드, '붐 바이 조이 한(Voom By Joy Han)'을 론칭하고 가게 한 코너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실크를 주소재로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존 갈리아노를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그녀의 옷들은 단박에 LA 트렌드세터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멜로즈 거리에선 보기 드문 100~300달러가 넘는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날개달린 듯 팔려나갔다. 붐은 승승장구했고 2006년 LA에서 열린 '벤츠 패션위크' 런웨이를 참가하면서 붐의 인지도는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덕분에 붐을 취급하는 전국 매장은 블루밍데일, 삭스핍스애비뉴 등과 같은 유명 백화점을 비롯해 프레드시걸, 키트손 등 고급 편집매장까지 1000여 곳에 이르게 됐다. 또 유럽, 아시아, 남미 등 30여 개국에 수출도 하면서 붐의 연매출은 2년 새 10배가 껑충 뛰어 7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제2의 전성기를 위해 그러나 꽃길만 걷는 인생이,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경기 불황으로 비싼 실크소재 의류의 인기가 한 풀 꺾이면서 그녀의 비즈니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2009년 붐보다 저렴한 가격대의 '바바(Vava)'를 론칭했다. 다행히 마켓에서 반응은 좋았고 다시 사업은 안정세를 되찾았지만 문득 회의감이 밀려왔단다. "경기불황을 겪으면서 어느새 돈 되는 디자인만 뽑아내고 있는 저를 보면서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디자인을 과감하게 하려면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 2013년 자바 시장에 뛰어들었죠. 떼 돈 벌 생각으로요.(웃음)" 키머니만 17만달러를 주고 몫 좋은 비싼 자리를 얻어 사업을 벌였지만 오픈 후 본격적으로 자바 불경기가 시작되면서 그녀는 2년도 채 못돼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당시 200만 달러 이상 날렸어요. 전 재산을 다 잃은 셈이죠.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그때 안했으면 언젠가는 또 분명히 했을 테니까요.(웃음)" 사업실패 후 그녀가 집중한 것은 온라인 사업. 2009년 유명 온라인 의류쇼핑몰인 리볼브닷컴(revolve.com)과 계약을 체결한 이후 그녀는 온라인 판매에 집중해 왔다. "요즘은 백화점들도 힘들다고 할 만큼 오프라인 의류매장은 승산이 없어요. 고객들이 오프라인에 가서 옷을 입어보고 구매는 인터넷 서치를 통해 가장 값이 싼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니까요. 이런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저희도 온라인 판매에 주력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녀는 지난달 새로운 온라인 쇼핑몰(shoprevava.com)을 론칭하고 바바 전제품을 소매판매하고 있고 아직은 적은 수량이지만 붐 제품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또 연내 홀세일 온라인 쇼핑몰 오픈도 앞두고 있다. "아직도 10년 전 붐 옷을 그리워하는 고객들이 있어요. 그래서 온라인에 리미티드 섹션을 따로 만들어 고객이 한 벌이라도 원하면 저희 공장에서 바로 만들어 배송하려고요.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그동안 현실과 타협하느라 잊고 있었던 제 브랜드 색깔을 찾으려 노력 중입니다." 고단한 현실에 치여 행여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잃을까 고심한 흔적이 치열하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민한다는 것은 여전히 뜨거운 열정이 있다는 것이기에.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6.25. 17:40

[인물 오디세이] 보광사 주지 종매스님 '오리지널 미국 중', 행복을 배달하다

오스트리아·독일·미국 등에 사찰 23곳· 불교대학 건립 종교간 화합위해 노력 시국선언 등 현실참여도 "고통·불안 벗어나려면 미래 아닌 현재 살아야" 스님은 유쾌했다. 스님과 유쾌함이라니. 분명 생뚱맞은 조합이라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종매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세 그것이 꽤나 부끄러운 편견임을 알게 된다. 아뿔싸, 잠시 잊고 있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다)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境界)마저 경계(警戒)했을 석가의 가르침을. 그리하여 마음의 경계를 한 뼘쯤은 내려놓고 나눈 종매스님과의 대화는 무진장(無盡藏) 유쾌했다. #한국 스님, '오리지널 미국 중' 되다 1972년 북한산 황룡사로 출가했을 때가 스님 나이 열여덟이랬다. 3년간의 행자승 생활을 마치고 지리산 화엄사 도광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됐다. 이 모든 걸 스님은 그저 운명이라 말한다. "첫 기억이 있던 서너 살 무렵부터 그냥 절이 좋았어요. 아주 어린 나이에도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제집 같았으니까요.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기에 부모님 역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으셨죠." 1976년 군법승으로 입대한 그는 엄혹했던 유신정권 시절,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설법으로 정권의 미움을 사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도미, 다우니에 정착한 그는 승려이기 이전에 평범한 이민 1세로 낮엔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사무실 청소를 하며 고단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그가 2014년 펴낸 책 제목처럼 '오리지널 미국 중'이 됐다. 1985년부턴 가든그로브 소재 정해사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청년법회를 이끌었고 이듬해 애너하임에 보광사를 개원했다. 그리고 1992년 3월엔 LA사우스센트럴에 지원도 열었다. 4·29 LA폭동이 나기 딱 한 달 전의 일이었다. 4·29 LA폭동 후 그는 흑인 커뮤니티 교회들을 다니며 한흑 갈등 치유를 위한 설교에 주력했고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홈리스들도 물심양면 도왔다. 그리고 국제승가협회에 소속돼 타인종 승려들과 함께 미국 내 포교활동에 힘썼고 매년 세계 불교콘퍼런스에 미국 대표로 참석해 세계 각국의 승려 및 불교학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또 불교학 공부도 재개, 석사(1998년) 및 박사(2003년) 학위를 취득했고 1999년 USC 불교관 관장으로 부임, 불교학 강의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계 포교를 위한 꿈 2004년 USC를 사직한 그는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세계 포교를 위해서였다. 이미 1992년 빈 대학 불교학 교수들의 요청으로 빈에 그의 호를 딴 포교당 묵림원을 개원해 오스트리아에 한국불교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그는 2003년엔 오스트리아 최초의 정규 온라인 불교대학인 국제불교대학(IBS)도 설립했다. 이후 스님은 캐나다와 폴란드, 영국, 독일, 미국 등에 23곳의 사원을 개원했고 독일과 미국에도 IBS를 설립하는 등 세계 포교에 힘썼다. 2007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로욜라메리마운트 종교학과 교수로 부임해 2015년까지 불교학을 강의했다. 대학 강단에 서는 동안 집필활동에도 매진해 2006년 독일어로 쓴 '불교학 개론'을 필두로 이듬해 영문판 '불교학 개론'을 2012년엔 '현대 한영불교영어사전'(2012년) 등 지금까지 총 7권을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중 '불교학 개론' 영문판은 미국 대학에서 불교학 교과서로 쓰일 만큼 불교학계에서도 인정받은 책이다. 현재 그는 미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됐다. 태고종 해외교구장을 거쳐 현재 해외교구 회주를 맡고 있는 그는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방미 때 미 불교계 대표로 교황을 만났으며 지난해엔 미국 대표로 '세계 불교 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그는 미국 내 타인종 승려들을 70명이나 배출했는데 그중 태국출신 혜정스님은 2011년 미 육군 군법사 1호로 한국 태고종에 입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한평생 스님을 떠올릴 때 학자나 종교인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는 바로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 최근만 해도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LA촛불집회를 이끌며 종교인들의 시국선언에 동참하기도 했다. 또 오래 전부터 미국 내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 및 보상을 받기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지난해 초 글렌데일 소녀상 앞에서 개최된 위안부 할머니들 추모제에서 진혼제를 집전하기도 했다. "제 스승께선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늘 가짜라고 말씀 하셨죠. 저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혹은 타협하는 지식인이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과 함께 울고 웃기 위해 거리에 서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네요.(웃음)" 또 스님은 종교간 화합에도 앞장서 왔다. 1989년부터 주류사회 가톨릭 사제들과 '불교-가톨릭 대화'란 모임을 만들어 40여 명의 사제와 승려들이 모여 사회적 이슈를 토론하기도 하고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엔 승려와 사제들이 각각 천주교회와 절에 가서 축하해 주는 등 종교간 벽을 허무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종교는 화합과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2000년간 종교간 분쟁은 끊이질 않고 있죠. 이런 종교 갈등을 종식하려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이를 포용하려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2015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스님은 그를 찾는 이들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올해만도 대만과 한국,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 5개국을 특강 차 다녀왔다. 잦은 출타가 힘들 법도 한데 그는 특강 이야기에 행복해 보였다. "제 강의을 통해 삶의 행복과 평화, 자신감을 찾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모든 중생은 모든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날 의무가 있다는 게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소중한 현재를 놓치며 살고 있죠. 바로 지금을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언제쯤 지식은 지혜가 될 것인가. 또 언제쯤 집착의 끝에서 해탈의 엷은 미소 한줄기 보게 되려나. 짧은 단상이 긴 화두가 될 무렵 스님은 모든 걸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라며 웃는다. 그러나 염화미소 여전히 요원하고 날카로운 죽비소리만 요란한 한낮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6.18. 15:03

[인물 오디세이] 캘리포니아 패턴 인스티튜트 폴 김 원장…LA한인자바 역사와 함께하다

70년대 동대문서 재단사 첫발 괌 가족이민…혈혈단신 LA로 80년대 초 한인 재단사 귀해 패턴메이커 양성 학원 오픈 자바 호황 땐 학생 문전성시 최근 40·50대 수강생도 노크 "학생들 취업 가장 큰 보람 앞으로 봉사·선교 하고파" 한국에서부터 재단 일을 했고 패턴메이커 양성학원을 30년 넘게 운영 중이라 해 꽤 깐깐한 사감 선생님 스타일이 아닐까 상상하고 찾아 갔으나 웬걸, 그곳엔 한눈에도 평범하고 털털해 보이는 중년 신사가 있었다. 바로 캘리포니아 패턴 인스티튜트 폴 김(62) 원장이다.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재단 일이 천직이 돼 어느새 40년 세월이 흘렀다. 80년대 초반 한인 재단사가 귀하던 시절 잘나가는 패턴메이커로 디자인사무실을 운영하다 학원을 오픈해 오늘에 이른 그는 초기 한인자바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힘들고 어려웠지만 인정 넘쳤던 80년대 초반 LA한인타운 풍경은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소년, 패턴메이커가 되다 인천 출생인 그는 고교 졸업 후 친척이 운영하는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며 의류업과 인연을 맺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버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려면 뭐라도 기술을 배우는 게 좋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이모님이 동대문에서 꽤 잘되는 의류 도매업체와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거기서 먹고 자며 패턴 기술을 배웠죠." 70년대 중반의 봉제공장들이 그러하듯 그가 일한 곳 역시 가정집을 개조해 재봉틀 10여대 들여놓고 40여명이 일하는 영세 업체였다. 직함은 공장장이었지만 원단 구매, 부자재 바느질, 잔심부름부터 월급관리까지 공장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다. 그러다보니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밤 10~11시가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드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일이 적성에 맞았냐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적성에 맞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가난한 그 시절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냥 열심히 일한 것뿐이었죠." 그렇게 공장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그 바닥에서 솜씨 좋기로 소문난 공장 내 일본인 재단사로부터 패턴을 배워 본격적으로 패턴메이커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후 3년 뒤 군 입대했고 제대 후 그는 남대문 시장에서 의류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남대문 의류 도매업체들은 서울 양품점들을 상대로 좀 비싼 제품들을 파는 곳이었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사업을 시작했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1년도 채 못하고 문을 닫았어요." 이후 1981년 그와 가족들은 괌으로 이민 갔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당시 괌에 가족 전체가 이민 온 케이스는 우리 가족이 처음이었죠.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괌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연일 화씨 100도가 넘는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못살겠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이듬해 그는 혈혈단신 LA로 날아왔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코리아타운으로 가자고 해 내린 곳이 현재 로데오 쇼핑몰인 보이스마켓 앞이었다고. 그리고 한인 신문에 난 재봉사(미싱사) 구인공고를 보고 연락을 취해 다음날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버스타고 집과 공장을 오가는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그 시절 그래도 그는 행복했단다. "당시엔 타운에서 한인들을 만나면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인사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통성명하고 나면 주말에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고 김치며 고기까지 싸줄 만큼 인심이 후하던 때였죠. 그 시절 그렇게 만나 친구가 된 이들도 여럿이에요." 워낙 숙련되고 빠른 솜씨 덕분에 그는 얼마 안가 공장 내 최고 임금을 받는 재봉사가 됐다. "당시 주급이 600달러쯤 됐는데 아파트 렌트비로 월 180달러 내고 나머지는 무조건 모았어요. 괌에 있는 가족을 데려 오려면 비행기 삯으로 7000달러쯤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2년 뒤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었죠." 당시 자바에 한인운영 봉제공장은 20여 곳도 안 될 만큼 좁은 바닥이어서 그의 솜씨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반년 만에 그는 패턴메이커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자바에 한인 패턴메이커는 2~3명 정도로 정말 귀했죠.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제게 재단 의뢰가 들어와 아예 독립해 디자인사무실을 차렸습니다." 1983년 사무실 오픈 후 일감은 물밀 듯 밀려들었다. 패턴은 물론 디자인 의뢰까지 있어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패턴을 배울 수 없겠냐는 문의가 잇따르자 1984년 그는 LA한인타운에 '폴스 디자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패턴 학원을 열었다. 타운 최초의 패턴메이커 양성 학원이었다. 낮에는 디자인사무실에서 일하고 학원은 야간반만 운영했다. #자바 역사와 함께한 35년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자바는 전례 없는 호경기를 누렸다. 특히 남미에서 의류사업 경험이 풍부한 한인 1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인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패턴메이커 수요가 급증했고 그의 학원도 클래스마다 40~50명이 수강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이런 자바 호경기를 타고 1990년 그는 한인 디자이너들과 패턴메이커들의 정보교환 및 친목도모를 위해 LA한인의상디자이너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자바 경기가 워낙 좋아 자바에서 양말만 팔아도 돈 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웃음)"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패턴 학원들이 늘어나면서 학원 사업은 고전을 겪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학원들 간 과당경쟁과 출혈경쟁이 본격화됐죠. 그러다보니 2000년대 들어서는 수강생 수가 예전만 못해진 게 사실입니다." 현재 그의 학원 수강생들의 연령층은 20~40대가 주를 이루고 요즘은 2세 수강생들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최근엔 50세 수강생도 있었는데 나이 들어 시작한 이들일수록 더 열심히 배우고 열정도 대단해요. 그러다보니 취업률도 나쁘지 않고요." 최근 자바 경기침체 탓 학원 비즈니스도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빙긋 웃는다. "경기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그리 큰 돈 벌었던 적은 없었어요. (웃음) 그래도 빈털터리로 미국 와 이만큼 먹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그리고 학생들이 취업할 때마다 보람도 크고요. 앞으로 커뮤니티 봉사활동과 선교활동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라면 꿈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겠는가. 엄청난 부를 일구지 않았어도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꿈을 실현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꽤 성공한 인생이리라.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6.11. 11:35

[인물 오디세이] 장기열 박사 "한인사회와 함께한 반세기 행복했습니다"

LA한인타운 초석 다진 故 소니아 석 여사 장남 LA 최초 한인1세 치과의사 한인 첫 치과의면허 시험관 상의·치과협 회장 등 역임 70~80년대 타운 발전 주도 3월 46년 의사생활 마침표 "욕심 없이 여생 보내고파" 처음엔 얘기 거리가 되겠냐며 인터뷰를 저어하던 그였지만 막상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니 여동생 손 붙들고 38선 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LA한인타운 초창기 모습까지 그 시간을 살지 못한 이들에겐 그저 신기하기만 한 옛날이야기를 한보따리 풀어놨다. 지난 3월 말 46년간의 치과의사 생활을 접고 은퇴한 장기열(80) 박사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 넘어 신산한 이민역사의 한 페이지를 치열하게 살아온 그를 만나봤다. #만석꾼 장남에서 '투잡' 이민자로 그는 1936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만석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1996년 작고한 소니아 석 여사다. 석 여사는 LA한인회의 전신인 한인거류민회 회장 등 타운 60여개 단체장을 역임하며 LA한인타운 형성에 초석을 다진 이로 17세 때 조선 여성 택시운전사 2호로 기록될 만큼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여장부였다. 석 여사는 남매를 낳고 얼마 후 남편과 헤어진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1944년 귀국해 자동차 부품회사와 영화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후 석 여사는 북한에 있던 남매를 서울로 데려왔지만 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서 그는 학창시절을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부유한 이모들 덕분에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1955년 서울 치대에 입학했다.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1963년 모친이 있는 LA로 온 그는 도미 첫해 뉴욕에 갔다 유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1년 뒤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LA한인타운에 신혼살림을 차린 그는 치과기공소에서 일했지만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위해 퇴근 후엔 UPS에서 택배를 싣고 내리는 작업을 했다. 자정이 다돼 퇴근하고 오전 5시면 출근하는 고단한 생활이 3년간 지속됐다. 이후 외국인 치과의사들의 치과대학 편입 규정이 완화되면서 그는 1968년 로마린다 치대에 편입했다. #LA 첫 한인1세 치과전문의 1971년 치대 졸업 후 그는 LA한인타운 윌셔 길에 치과를 오픈했다. LA 한인 1세로는 첫 치과전문의였다. 당시엔 가주치과협회가 치과병원의 광고를 엄격히 금하고 있던 시절이라 개원을 알릴 길이 딱히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환자들은 늘어갔다. 환자가 많은 날엔 하루에 50~60명이 몰려들었을 정도다. "당시 한인 환자들은 지상사 주재원이거나 한국에서 파견 온 공무원들 정도였죠. 그러다보니 환자들의 70%는 타인종들이었습니다." 윌셔가에서 3년간 치과를 운영하던 그는 1974년 올림픽가로 치과를 이전해 43년간 그곳에서 환자를 봤다. 당시 주유소가 있던 치과 자리는 모친의 권유로 구입했다 은행융자를 받아 건물을 올린 것이라고. 치과는 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당시엔 치과가 많지 않아 잘될 수밖에 없었어요.(웃음) 애초에 치과로 큰돈 벌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지금껏 남의 신세지지 않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큰 고생하지 않고 살아 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그 짧지 않은 세월을 치과의사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환자들 덕분이란다. "오래 치과를 하다 보니 3대가 오는 환자들도 생기고 오며가며 커피며 도넛을 놓고 가는 이들도 있을 만큼 환자들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냈죠. 덕분에 그 긴 시간을 치과의사로 지루할 틈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77년 그는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가주 치과의면허시험 시험관이 돼 15년간 치과의면허 실습시험을 감독했다. 또 한인사회 봉사에도 앞장섰다. 1973년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필두로 코리아타운번영회 이사장(1976~77년), 남가주상공회의소 회장(1979~81년), 서울올림픽후원회 부회장(1987년) 등을 역임하며 70~80년대 한인타운 발전을 주도해 왔다. 분명 성공한 이민생활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회환이랄까 후회도 있을 듯해 물으니 그가 고민하다 내민 대답이 재밌다. "미국 와 얼마 안 돼 무역업을 하는 한국 고교동창이 가발을 팔아보라 권유해 이를 좀 받아 가게마다 다니며 팔아보려 했는데 사려는 이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 버렸죠. 그런데 2년쯤 뒤 한국산 가발이 대히트를 쳤어요. 조금만 늦게 시작했으면 대박 났을 텐데 말이죠.(웃음)" 엉뚱한 듯 허를 찌르는 답변이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을 엿보게 했다. #50년 일터를 떠나다 그는 워커홀릭이다. 개원 후 첫 10년을 제외하곤 출장 외엔 개인휴가를 간 적이 거의 없는데다 지난 10년간은 아예 치과 문을 닫은 적조차 없단다. "게을러서 그래요.(웃음) 휴가를 가려면 계획도 짜고 부지런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나이들 수록 치과에 있는 게 가장 맘 편하기도 했고요." 이런 그의 남다른 성실함 덕분에 5년 전까지 하루 20여명의 환자들이 찾을 만큼 치과는 늘 북적였다. 그랬던 그가 작년부터 서서히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제 진료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관둘 때가 됐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그리고 드디어 지난 3월 말 치과 문을 닫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일한 일터를 떠나는 기분은 겪어 보지 않은 이라면 짐작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만 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실감은 잘 안나요. 얼마 전 치과 간판 뗄 때 갔었는데 그땐 눈물이 나더군요. 나도 다 됐구나 하는…만감이 교차했죠."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물어봤다. 많은 은퇴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버킷리스트 목록이 빼곡할 듯싶었다. 그러나 웬걸.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단다. "다만 28년간 살았던 고국 땅 곳곳을 좀 돌아다녀 봤으면 해요. 군의관 생활을 했던 문산을 비롯해 거주했던 서울, 부산 등도 가보고 싶습니다. 한국엔 10년 전 가보고 안 가봤으니 또 많이 변했겠죠? 그리곤 지금처럼 평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그게 복 인거죠." 순간 뜬금없이 F.스콧 피츠제럴드의 역작 '위대한 개츠비'가 떠올랐다. 그 시대의 청춘이며 지금의 청춘이기도 한 소설 속 여주인공 데이지는 말했다. '화려하고 소중한 건 너무 빨리 사라져.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아'라고. 이 아름다운 청춘의 볼멘소리에 작가는 소설 말미에 답을 혹은 위로를 건넨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라고.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5.29. 19:13

[인물 오디세이] HJ글로브 샘 정 대표 "모든 스포츠 종목 최고의 장갑 제조가 목표"

골프장갑으로 세계 톱10 유럽·아시아 30개국 수출 공장 직원 봉사활동 후원 주니어 선수에 무료장갑도 그는 블랙 골프셔츠에 한 눈에도 꽤나 무거워 보이는 백팩을 메고 나타났다. 이름 꽤나 날리는 사업체 대표라기보다 딱 PGA 투어에 나선 선수처럼 보였다. 시선을 사로잡은 CEO의 백팩엔 뭐가 들었을지 꽤나 궁금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염치불구하고 물었더니 그가 보여준 백팩 안엔 HJ 제품들이 한 가득이었다. 각양각색 골프장갑과 팔 토시들이 주를 이뤘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사 제품을 자랑할 혹은 팔 준비가 돼 있는 노련한 판매왕에 다름 아니었다. 타고난 사업가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HJ글로브 샘 정(48) 대표를 LA한인타운에서 만나봤다. #HJ에 입사하다 3남1녀 중 막내인 그는 여섯 살 때인 1974년 LA로 가족이민 왔다. LA한인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글락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고교시절 학년 학생회 부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이 뛰어났다. UC어바인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미국 회사에서 잠시 근무하다 1992년부터 윌셔가 코리아나 호텔에서 구매담당과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HJ글로브 창업주인 고 전홍식 사장의 장녀와 결혼하며 HJ에 입사했다. "입사 제안을 받고 처음엔 망설이기도 했지만 일 하나만은 확실히 배울 것 같았고 회사를 함께 성장시켜가는 보람도 있으리라 생각해 입사를 결심하게 됐죠." HJ글로브는 1970년 영화감독이었던 전홍식 사장이 'HJ 스포츠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천안에서 창립한 골프장갑 전문업체다. 창립 초기엔 해외 유명 스포츠브랜드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납품했다. 사업이 번창하자 전 사장은 가족들을 이끌고 1976년 앤아버 미시건으로 이민 와 HJ 자체브랜드를 론칭하며 본격적으로 미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1983년 지금 HJ 본사가 있는 웨스트레이크로 이주했고 이후 HJ는 품질 하나만으로 골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미국시장에서 성장가도를 달렸다. #HJ 비약적 성장을 이끌다 HJ 입사 당시 그의 직함은 영업담당 매니저. 그러나 직함만 매니저일 뿐 물류창고에서 물건 쌓고 나르는 일부터 청소, 자질구레한 사무업무도 마다치 않으며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입사 2년 만인 1996년 총괄 매니저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전 사장을 도와 캐나다, 남미, 한국 등 세계시장을 노크하며 HJ글로브를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시켜 나가는데 주력했다. 그러다 1999년 전홍식 사장이 작고하자 장인의 뒤를 이어 그가 대표로 취임하게 된다. "당시 전 사장님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정말 고민이 컸죠. 다만 더 열심히 일해 세계 최고의 골프장갑 업체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어느새 그가 취임한지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HJ글로브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현재 HJ는 골프장갑으로는 세계 톱10에 드는 전문 업체로 성장했고 해외 진출에도 박차를 가해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유럽시장과 캐나다, 아시아, 남미, 남아공 등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또 2004년엔 인도네시아에 4만 스퀘어피트 규모의 자체 공장도 건립했다. 오픈 당시 100명이던 공장 직원이 10년도 채 안 돼 500여명으로 늘어날 만큼 HJ는 비약적인 성장을 해왔다. 이런 HJ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현장을 발로 뛰는 그의 꼼꼼한 열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년에 두 차례씩은 HJ 제품을 판매하는 한인업소를 찾아 세일즈맨을 자청한다. "한인 골퍼들이 골프용품에 워낙 관심이 크고 평가도 정확해 제조사 입장에선 도움이 많이 되죠. 또 한인 고객들과 어울려 골프와 제품 이야기 나누는 게 즐겁기도 하고요.(웃음)" 또 HJ는 커뮤니티 봉사와 골프 꿈나무 지원에도 열심이다. 인도네시아 공장의 경우 직원들이 1년에 두 차례씩 근무시간에 고아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6년 전부터는 SCGA(남가주골프협회) 주니어 선수들에게 무료로 장갑을 지원하는 등 골프 꿈나무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품질우선주의는 현재진행형 그렇다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동안 그가 항상 탄탄대로만 걸어 온 것은 아니다. 2008년 이후 불경기의 영향으로 HJ는 매출하락으로 고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그는 매출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골프장갑 외에 야구·풋볼 장갑, 팔 토시 등을 개발해 사업다각화를 꾀했다. 특히 토시는 지난 1월 시니어 LPGA인 레전드투어의 공식토시로 지정됐고 8월 열리는 솔하임컵 대회 공식토시로 선정 될 만큼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품질 하나만으로 승부한 덕분에 HJ는 불경기에도 불구 2010년 이후 납품업체 선정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세계적인 대형유통업체를 비롯 여러 업체들과 OEM 계약을 성사시키며 매출부진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매출은 해마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3배 이상 껑충 뛰었다. 이처럼 사업은 승승장구했지만 2012년 그는 18년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혼 후에도 저와 전 사장님 가족들 모두 유지를 받들어 HJ 발전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회사를 잘 이끌어 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HJ엔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바로 품질 우선주의다.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공장 근로자 한 명이 시간당 약 2.5개의 장갑밖에 못 만들어요. 제작이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는데다 손마디 관절까지 고려해 재봉질을 해야 돼 제작 시간이 긴 편이죠." 이런 장인정신 덕분에 HJ는 지난 달 유명 골프전문 웹사이트가 뽑은 '최고의 골프장갑' 부문에서 6위를, HJ가 OEM으로 납품하는 브랜드는 1등을 하는 영예를 안아 그동안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골프장갑 외에도 앞으로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사용되는 장갑을 제작하고 싶은 게 목표입니다. 물론 최고의 품질로 말입니다.(웃음)"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오랜 경영철학을 지키려 노력하는, 커다란 백팩을 메고 분주한 발걸음을 총총히 옮기는 중년의 CEO의 뒷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5.21. 19:09

[인물 오디세이] 입양가족 김영란씨 "입양 7남매는 내 삶의 버팀목이자 희망"

1.5세 동갑내기 부부 13년간 아이 없자 입양 맏딸·남편 계속 형제 원해 2~3년마다 한국 아동 입양 2015년 출장 중 남편 사망 지난 달 화재로 집마저 불타 "남편 지켜보고 있을 테니 자녀들 열심히 키울 것" 전화 속 목소리가 너무 명랑 쾌활해 처음엔 전화를 잘못 한 줄 알았다. 7남매를 입양해 키우다 2년 전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석 달 전엔 함께 살던 친정엄마마저 여의었다. 설상가상 지난 달 집에 불이 나 지낼 곳조차 마땅치 않은 이라곤 상상이 안 갈만큼 그녀는 씩씩했다. 바로 김영란(58)씨다. 지난 시간들 떠올리다 보면 눈시울 붉어질 법도 한데 인터뷰 내내 그녀는 침착했다. 오히려 눈가가 뜨거워 진 것은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겪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예고 없이 들이닥친 삶의 고통과 동행하는 법을 그녀는 이미 터득한 듯싶었다.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알고 있듯. #남편의 오랜 결심, 입양 18세 때인 1976년 LA로 가족이민 온 그녀는 LA하이스쿨을 졸업 후 캘스테이트 롱비치에서 미술과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동갑내기 남편 김기철씨를 만나 5년 연애 끝 1983년 결혼했다. 남편은 연세대 물리학과 2학년 재학시절 LA에 가족이민 와 대학에서 컴퓨터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결혼 후 박사과정 중이던 남편은 방위산업체 엔지니어로 취직했고 그녀는 어바인 고급 오피스 빌딩에 기프트·플라워 숍을 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만 결혼 10년이 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말고 한국에서 입양해 키우자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시할머니께서 고아원 봉사활동 때면 어린 남편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그때부터 남편은 장가가면 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하더라고요. 결혼 전에는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죠." 그러나 결혼 후에도 남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은 1997년 우연히 시청한 고아들이 주인공인 '7개의 숟가락'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 드라마 한편만으로 입양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결혼 10년 후 어렵사리 임신을 했지만 3년간 3번이나 유산을 한터였고 무엇보다 그 무렵 시부모님이 부부에게 입양을 적극 권유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부부는 한국 김해의 한 영아원을 찾았다. #가슴으로 낳은 7남매 이후 1년간의 입양절차를 거쳐 1998년 맏딸 한나(24) 양이 이들 부부에게 왔다. "사실 영아원에 갔을 때 저는 제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으려던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한사코 한나를 고집했죠. 그때 영아원에서 한나가 제일 나이가 많아 조만간 고아원으로 옮겨질 형편이어서 남편이 한나를 또 낯선 환경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 해 데려오게 됐죠." 3년 뒤 이들 부부는 그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했던 레아(21)양도 입양했다. 그 후 부부는 2~3년 간격으로 레이첼(22), 새라(21), 이사야(18), 노아(15), 제레미아(13)를 공개 입양했다. 이들 중 4명은 영아원을 통해서였고 3명은 미국 한인가정에서 파양된 아이들을 재입양했다. "남편은 원래 12명을 입양하고 싶어 했어요. 그에 비하면 적은 수죠.(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한나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2년마다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 가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을 입양하자 졸랐고 남편도 지원사격을 했죠.(웃음) 처음엔 너무 힘들어 반대했어요. 그런데 선한 일 하자는 남편과 딸을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웃음)" 부부의 사랑을 먹고 7남매는 무럭무럭 자랐다. 맏딸인 한나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돼 약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물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듯 지난 20년간 자녀들 키우며 눈물로 지샌 날들도 있었다. 열 살 때 파양돼 부부가 입양한 노아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는지 새 가정에 적응 못하고 학교생활도 등한시한 채 방황하는 바람에 부부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그러나 부부가 매일 아침마다 아들을 안고 기도를 했고 1년 뒤 부부의 사랑과 정성 덕분에 아이는 차츰 마음을 열었다. 현재 노아는 지난 학기 GPA 4.0을 받을 만큼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간혹 남의 새끼 어떻게 키우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나 7남매 모두 배만 안 팠을 뿐이지 다 제가 낳은 자식들이죠. 그러니 공부 못해도, 속 썩여도 다 사랑스러운 내 새끼죠." 그렇게 20년간 7명을 입양해 키우느라 그녀는 일찌감치 사업을 접고 전업주부가 됐다. 덕분에 가계수입은 줄었고 대식구가 살 집을 구할 형편이 못 돼 2002년 친정어머니 권유로 세리토스 친정집으로 이사했다. #화재로 보금자리 잃어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든 것은 2년 전인 2015년 3월이었다. 출장 차 한 달간 호주에 머물고 있던 남편이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었다. "남편을 보내고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살았어요. 앉아도 눈물, 서 있어도 눈물, 운전할 때도 눈물 바람이었죠." 절망 속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같은 처지의 교인들이 그녀가 이끌던 중보기도회에 하나 둘 모여들어 위로와 격려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시간이 가면서 슬픔은 옅어졌지만 7남매와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플로리스트와 웨딩플래너 사업을 재개했다. 그렇게 남편의 빈자리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지난 달 초 차고에서 전기합선으로 시작된 불이 여덟 식구의 보금자리를 태운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난 2월 친정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두 달도 채 안 돼 생긴 일이었다. 현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편과 그녀의 친구 집에서 생활 중이라고 한다. "급작스럽게 남편을 보낸 것에 비하면 화재야 아무 것도 아니죠.(웃음) 무엇보다 아이들이 있어 든든해요. 물론 화재 후 힘들긴 한데 열심히 아이들 잘 키워야죠. 그래야 이 다음에 남편을 만나도 떳떳할 테니까요. 분명 이 시련도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담담했지만 씩씩한 목소리였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모래 바람 속, 마른 벼락이 태연히 허락되는 사막 같은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날 무렵 이 나지막한 목소리는 분명 위로가 돼 어깨를 토닥여 줄 것만 같았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5.14. 12:28

[인물 오디세이] 유재건 변호사 "평화·인권은 내 인생의 영원한 모토"

미국통·외교통으로 명성 2008년 정계은퇴 선언 페퍼다인대 교환교수 부임 "귀국 후 후학 양성하고파"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별명은 영국신사였다. 그랬다. 그는 부드러운 화술과 타고난 친화력으로 처음 만나는 이도 금세 무장해제 시키는 묘한 재주랄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재건(79) 변호사다. 국회의원 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았던 스타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과 달리 그는 솔직 담백했으며 여전히 크고 작은 세상사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년 같은 면모를 보여줬다. 올초 페퍼다인 대학교 교환교수로 부임한 유재건 변호사를 LA한인타운에서 만나봤다. #신문팔이 소년, 인권 변호사 되다 1937년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당시 기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소년가장이 됐다. 외아들인 그는 생계를 위해 새벽엔 신문배달을, 밤이면 모친이 만든 색색의 찹쌀떡을 팔러 다녔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이 수재소년은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경기중·고를 거쳐 1956년 연세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이는 당시 연세대가 주최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학교 측이 그에게 전액장학생으로 정치외교학과 특차입학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 후엔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공군장교로 4년간 복무했다. 이후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3년간 근무하다 결혼 후인 1969년 대학시절부터 꿈꿔왔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2년 뒤 석사학위를 받고 워싱턴주립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 중이던 이 평범한 유학생이 훗날 변호사가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다. "당시 이민국에서 어머니의 비자연장을 거부하며 강제출국 시키겠다는 연락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직접 이민국 추방재판에 참석해 이를 변호했더니 담당판사가 변호사 자질이 충분하다며 법대에 가 변호사가 되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다음날로 박사공부를 접고 1974년 UC데이비스 법대에 입학했다. #시사토론 MC에서 국회의원으로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철수 사건'이다. 1977년 신문기사를 통해 사형수 이철수(당시 25세) 사건을 알게 된 그는 이철수를 찾아가 도움을 자청했다. 이후 사건기록을 검토하며 그가 살인누명을 썼음을 확신하고 이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달걀로 바위치기에 다름없는 지난한 싸움이었지만 구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7년 뒤인 1983년 이철수는 10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고 석방됐다. 이후 이 재판은 법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소수인종 인권 변호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 7년간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고 저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었죠. 그러나 분명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힘겨운 구명운동 와중에 치른 변호사 시험은 그에게 숱한 좌절을 안겨줬다. 5년여에 걸쳐 9차례나 낙방한 것이다. 그러나 1982년 9전10기 끝 합격해 이철수 무죄선고 당시엔 당당히 변호사로 법정에 설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아내와 2남1녀 자녀들과 함께 LA로 이주, 윌셔가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이민법 세미나 개최 및 무료법률상담 등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그런 그가 한국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변호사로서가 아닌 TV시사토론 진행자로서다. 1990년 봄 재미 한인인권 문제 세미나에서 그의 뛰어난 발표실력을 눈 여겨봤던 방송기자들의 추천으로 MBC 시사토론 제작진이 그에게 MC 제안을 해온 것이다. 이후 그는 3년 반 동안 프로그램을 이끌며 세련된 진행으로 호평 받았고 KBS 심야토론 MC로도 2년간 활약했다. 그러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무렵 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에게 직접 연락을 해와 정계입문을 제안했다. 오랜 고민 끝 부총재직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96년 자신이 나고 자란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그곳은 현역 3선 의원의 텃밭이라 승리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루 5000명과 악수하기'와 같은 진정성 있는 캠페인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북구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다. #스타 정치인에서 법학자로 그는 킹메이커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1997년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특보단장을 맡아 당선에 기여했다. 국회의원 재임시절 그는 한미의원외교협의회의 회장,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간판 외교통·미국통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후반부에 들어서며 그는 당내 중도 보수모임인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을 결성해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 당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선진당 창당멤버로 입당했다.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표적 스타 정치인이었던 그의 탈당은 파격행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주신당 내 급진적 개혁세력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데다 중학교 선배인 이회창 총재의 창당을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입당을 결심했죠. 그러나 그곳 역시 내 정치적 신념과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창당 전당대회만 치러주고 나온 셈이 됐죠. "탈당 후 그는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내 나이가 72세였는데 그쯤에서 그만 하는 게 맞다 판단했습니다. 물론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 정치에 대한 염증과 실망감이 컸기도 했고요." 2008년 정계은퇴 후 그는 국제법률회사 상임고문을 거쳐 CGN TV 대표를 역임했다. 그리고 올초 페퍼다인 대학교 교환교수로 와 분쟁해결연구소에서 분쟁과 중재에 관한 법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여생도 평화·인권·복지를 위해 헌신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귀국 후 법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의 뜻있는 젊은 법학도들을 정의롭고 청렴한 지도자로 키워내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이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한미 양국 모두 복잡다단한 정치사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오늘, 노(老)법학자의 이 짧은 말 한마디는 꽤나 묵직한 울림을 던져줬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5.07. 15:57

[인물 오디세이] 이준수 목사 "장애는 축복…내 삶이 그 증거"

뇌성마비지만 지적장애 없어 학창시절 성적 늘 최상위권 서강대 졸업 후 UCLA 유학 박사학위 좌절 후 신학 공부 한인 첫 뇌성마비 목사 돼 09년부터 홍보·문서 사역 "절망처럼 보이는 고난도 분명한 목적 있는 은혜" 살다보면 아주 특별한 영혼과 마주칠 때가 있다. 기다렸다는 듯, 선물처럼. 이준수(48)목사가 그러했다. 처음엔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신기하게도 금세 그 어눌한 말투에 익숙해지면 영혼을 잡아끄는 그의 특별한 성품에 반하게 된다. 아마도 이는 교육에 의해 습득됐다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그의 온유한 성품과 상대에게 어떻게 보여야겠다는 전의(戰意)랄까 허세 같은 게 전혀 없는 특유의 기품 때문이지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함으로 포장된 뻔한 역경 극복 스토리가 아닌 여전히 넘어지나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며 이 또한 은혜라 말하는 연약한, 그러나 용기 있는 한 인간의 내밀한 삶의 틈새를 보여줬다. 그 틈새 너무 눈부셔 눈가가 시렸다. #뇌성마비 장애인, 명문대생 되다 2남1녀 중 장남인 그는 8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나 두 달간 인큐베이터에 있으며 심한 황달을 앓아 뇌성마비 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몸이 불편한 것 빼고는 지적장애가 없었던 그는 강남 8학군 소재 고등학교에서 내신 1등급을 받을 만큼 학창시절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고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러나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불편한 몸이 창피하기도 했을 듯싶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제게 몸이 불편해도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죠. 그런 어머니의 교육철학과 사랑 덕분에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사귀며 장애로 인한 콤플렉스 없이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 어머니는 그에게 세상을 향해 난 희망의 통로였다. 모친은 초등학교 시절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를 업고 등하교시켰고 장애인 전형이 없던 그 시절 그가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친의 애끓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당시 대입 학력고사 답안은 OMR카드에 작성해야 했는데 그의 떨리는 손 때문에 정확한 마킹이 불가능했기에 모친은 대학교들을 찾아다니며 그가 시험지에 답을 체크하면 학교 측이 이를 카드로 옮겨 달라 부탁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다 서강대 측이 이를 받아들여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돼 1988년 서강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여느 청춘처럼 연애도 하고 이별의 아픔도 맛본 평범하지만 눈부신 시절이었다. #소울 메이트를 만나다 어려서부터 대학 강단에 서는 게 꿈이었던 그는 1993년 UCLA 대학원으로 유학 와 유럽사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평생 처음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서기를 시작한 유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고군분투 끝 4년 뒤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사과정을 거치며 그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문현정(44) 사모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가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막 끝냈을 무렵인 1999년 겨울, 컴퓨터 통신을 통해 만난 이 청춘남녀는 불문학을 매개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전공이 같다는 것 외에도 이들은 맛집, 책, 영화 이야기 등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며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상대에게 운명 같은 끌림을 느꼈던 듯싶다. 그리고 한 달 후 사랑에 빠진 청년은 태평양을 건너 서울의 한 카페에서 영혼의 반쪽과 마주 앉았다. 서울에 오기 전 그가 장애인임을 말했지만 문 사모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인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약속 장소에 나갔죠.(웃음) 처음 만난 날 남편은 한국 남자들에게선 보기 드문 국가대표급 매너를 보여줬죠.(웃음) 만난 첫날부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던 것 같아요"(문현정 사모) 그가 서울에 머문 3주간 만남을 이어가며 점차 문 사모는 '저런 인품의 소유자라면 내가 평생 휠체어 끌고 살아도 좋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그리고 2000년 여름 그가 프로포즈를 했고 그해 가을 이들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2007년 쌍둥이 남매 조애나(10)와 브라이언(10)이 태어났다. #고난과 동행하는 법 결혼 후 그는 박사과정은 수료했지만 논문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그의 오랜 꿈이 좌절 되는 순간이었다. "제 인생 처음으로 맛 본 커다란 좌절이었죠.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지금껏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죠. 그러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2009년엔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인 첫 뇌성마비 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그는 남가주밀알선교단에서 영성문화선교 및 홍보문서 담당 목회자로 사역 중이다. 미주 전역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는 물론 선교단의 모든 홍보 문서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물론 그에게 컴퓨터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뒤틀리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왼손으로 목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로만 타이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레터 용지 한 장을 쓰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문서선교 외에도 그는 기회가 닿으면 미국 내 한인교회 초청으로 설교도 해오고 있는데 설교 시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교문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설교가 어느새 150여 차례를 넘겼다. 그에게 물었다. 남들에겐 너무나 쉽고 평범한 쓰고 말하는 것조차 버거운 장애인인 게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왜 없었겠어요. 가끔 장애가 없었다면 사역을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러나 제가 장애인이기에 장애인들을 잘 이해하며 사역을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축복이라는 걸 깨닫게 돼요."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환경은 변하지 않아요. 관점이 변해야 상황도 변하죠. 고난 역시 지금 당장은 절망처럼 보이지만 그 길에 분명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에 언젠간 그 고난도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제 삶이 그 증거이니까요." 장애가, 고난이 축복이라 말하는 이 남자, 그러나 그 역시 때론 넘어지고 낙담도 한다는 고백 앞에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존재만으로 위로와 용기를 건넬 수 있는 삶이라니. 소심하게 움츠러든 어깨가 맥락없이 펴지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4.30. 11:51

[인물 오디세이] 김스운전학교 김응문 교장, 44년 외길인생 …운전교사는 내 운명

DMV 시험관 포기하고 가주 첫 한인 운전교사 돼 트래픽스쿨·음주운전 교육 주정부 지정 첫 한인 업체 9만여 명 학교 거쳐 가 운전 가르친 제자 4천명 "시니어 운전 향상 위해 강의하며 여생 보내고파" 그에게선 따뜻함과 느긋함이 함께 느껴졌다. 오랜 시간 진심 다해 누군가를 가르쳐 온 이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평안함 같은 것이었다. 김스운전학교 김응문(78) 교장이다. 지난해 희수(喜壽)를 넘겼건만 반백년 전 일도 어제 일인 양 불러오는 비상한 기억력과 넘치는 활력은 웬만한 청년 저리 가라다.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오후, 바닷바람 끝자락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김스운전학교 뒷마당에서 그를 만나봤다. #가주 첫 한인운전 교사 신의주 출생인 그는 배재고를 거쳐 1964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69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아주사 퍼시픽 대학에 입학, 사회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소셜워커를 지망했던 그가 운전교습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LA에 오자마자 치른 운전면허 실기에서 두 번의 낙방 끝 합격을 한 것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면허 취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웨이에서 과속 티켓을 받은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한국에선 속도위반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어서 티켓을 받고도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티켓을 준 경찰에게 미국 운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려 달라 했죠." 그래서 찾아 간 곳이 가주고속도로순찰대(CHP)가 운영하는 안전운전 교육 프로그램. "당시 한국 이민자들이 쇄도 하고 있던 때라 강의를 들으며 이런 좋은 정보를 제대로 가르쳐 줄 한인 운전학교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길로 차량국(DMV)을 찾아가 운전학교 개업 절차를 알아봤더니 운전교사로 500시간 일한 경력이 필요하다 해 LA에 몇 안 되는 운전학교 중 하나였던 LA운전자교육센터에서 1년간 근무했다. "DMV에 학교 오픈을 문의하러 갔을 때 담당자가 한인 운전 시험관이 없다며 시험관 시험에 응시하라 권유해 얼떨결에 시험을 봐 합격했지만 운전교사에 대한 꿈을 포기 못해 다시 운전교사 시험을 봤죠. 합격 후 DMV 담당자가 가주 첫 한인 운전교사라고 말해주더군요." #44년 외길 인생 1974년 그는 LA한인타운에 문을 연 김스 운전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엔 운전교사들이 자기 차로 운전을 가르쳤는데 1년 마일리지가 4만 마일이나 나올 정도로 정말 바빴죠. 한 달 수입은 2400달러 정도였는데 당시 DMV 운전시험관 월급이 2000달러인 걸 감안하면 수입도 좋은 편이었죠." 이처럼 학생들이 밀려들다보니 오전 7시에 나와 오후 8시 퇴근이 예사였다. 그래도 그는 운전 가르치는 즐거움에 힘든 줄도 몰랐단다. "대학시절 가정교사로 제가 꽤 날렸어요.(웃음) 가르치는 게 천직이었는지 운전교사도 제 적성에 딱 맞아 몸은 고돼도 정말 즐겁게 일했죠." 그렇게 운전교사로 1년여 정도 재직하다 1975년 김스운전학교 오너로부터 학교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운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김스운전학교는 DMV가 지정한 LA시 최초의 트래픽스쿨 1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되면서 타운 최초의 한국어 트래픽스쿨을 시작했다. "처음엔 한인회관 2층에서 클래스를 시작했는데 자리가 없을 만큼 성황을 이뤘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기다렸다 수업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트래픽스쿨에 1년 평균 2000여명이 다녀갈 만큼 성황을 이루면서 비즈니스는 승승장구했고 덕분에 그는 1979년 베니스 길에 지금의 김스운전학교 2층짜리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잘나가던 비즈니스도 80년대 들어서면서 타운에 운전학교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수강생들이 급감하자 적자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학교가 1984년 LA카운티가 지정한 음주운전자 교육학교 124곳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불황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시대가 변하면서 굽이굽이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는 지금껏 운전을 가르치며 얻은 보람이 훨씬 더 크다고 말한다. "지금껏 제가 운전을 가르친 이들만 4000명이 넘어요. 그들 중엔 청각장애부터 한쪽 시력이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이들, 공황장애를 겪는 이들도 있었는데 분명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운전면허를 딸 때면 제 일처럼 기뻤죠. 그들에게 운전면허는 단순한 면허 취득이 아닌 삶에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일이거든요. 누군가의 삶에 보탬이 될 수 있으니 보람 있을 수밖에요." #운전교사는 평생의 소명 이렇게 하루 12시간씩 일에 매달리는 일상이 10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40대 중반에 이르러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어느 날부턴가 두통이 심해지고 만성피로로 코피를 흘리는 일도 빈번해졌다. "그 후부터 건강식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래서 지금까지 아침엔 생식주스와 사과, 고기 한 점은 꼭 먹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철 과일을 챙겨 먹는 게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라 할 수 있겠네요." 또 매일 아침 30분씩 걷고 일주일에 2~3차례씩 수영도 꼭 한다는 그는 나이 60에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을 찾다 등산에 입문한 이래 65세이던 2004년엔 위트니산 정상 등반을 할 만큼 등산의 매력에도 푹빠져있다. 어느새 여든이 코앞이지만 그는 여전히 현업에서 뛰고 있다. 하루에 2시간씩 운전 강습을 하고 정기적으로 음주운전 교육 및 트래픽스쿨 강의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시니어 운전기술 향상프로그램. "DMV 발표에 따르면 이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는 65세 이상 운전자 대부분이 90세가 되도록 무사고 운전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한인 시니어들에게도 나이에 맞는 운전 기술을 가르쳐 90세까지 무사고 운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운전교육 강의 외에도 현재 그는 300쪽에 달하는 캘리포니아 교통법규의 한글 번역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현업에서 95세까지 일하고 싶어요. 운전학교가 이민자도 줄고 온라인 수강 등으로 사양산업이 됐지만 분명 제가 할 수 있는 몫이 있는 거니까요. 지금껏처럼 이 길이 소명이려니 하며 살아가는 거죠.(웃음)" 그래서인가 보다. 그가 평안하고 행복해 보인 이유는. 소명 받은 길이라 믿고 걷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그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4.16. 12:14

[인물 오디세이] 김영교 시인…병마의 고통 속에서 '시' 를 만나다

94년 투병 중 시인 등단 시집 8권·수필집 4권 내 장학회 운영·후학양성 열심 "암 통해 감사·은혜 깨달아" 눈 맑은 노시인과 마주 앉았다. 화가 모딜리아니 연인 잔 에뷔테르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긴 목을 가진 시인은 닿으면 베일 듯 섬세한 그녀의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털털하고 소박했다. 김영교(76) 시인이다. 지천명 넘어 두 번이나 불쑥 들이닥친 암이란 녀석 덕분에 평탄치 않은 시간을 통과했을 터인데도 그녀는 그늘 한 점 없는 아이처럼 유쾌하고 밝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덕분에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부터 암투병과 시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 그녀와의 오랜 대화 혹은 수다는 꽤 즐거웠다. #유학생에서 주부로 경남 통영이 고향인 그녀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은행 국제부에서 잠시 근무하다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공부했다. 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미 정부에 폐결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X레이 원본 필름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는 흑백 다큐멘터리 같은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그녀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 유학 와 첫 여름방학 때 샌프란시스코 친구 집에 갔다 유학생인 남편을 보고 첫눈에 반해 학교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1년여 열애 끝 결혼에 이르렀단다. 꽤나 21세기스러운 20세기 러브스토리 속 여주인공이 당시로선 보기 드문 강단진 신여성 캐릭터인 것 같다고 농을 건네자 그녀가 웃는다. "뜨거운 청춘이었으니까요.(웃음) 학업을 포기한 걸 후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덕분에 듬직한 남편과 멋진 두 아들 만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득이죠.(웃음)" 결혼 후 1969년 LA로 이주해 시작한 남편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말 그대로 그녀는 '부잣집 사모님'이 됐다. 두 아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암 환자에서 시인으로 그러나 꽃길만 걷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93년 임파선 암 말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녀 나이 54세. 대학 때부터 쳐온 테니스가 수준급이고 싱글 골퍼에 당시 수영까지 배우는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녀에게 위암 선고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당시 다른 증상은 없었어요. 살이 좀 빠지긴 했는데 수영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남편이 출장을 간 날 시어머니 댁에 갔다 새벽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어머니 가 절 살리신 거죠." 그날로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7시간의 수혈을 거쳐 위의 3/4가량과 비장까지 절제하는 큰 수술을 했다. 수술 후 다음날이 돼서야 깨어난 그녀는 수술 후 절제한 위 때문에 한 숟가락만 먹어도 바로 토했다. 먹고 토하고, 토하고 먹는 일상이 반복됐다. 어디 이뿐이랴. 이후 2년간 30여 차례가 넘는 독한 키모테라피도 견뎌야 했다. 그 고통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시였다. "병상에 있으며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됐죠. 그러면서 살아 있는 것에,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기록하고 싶어 일기를 쓰게 됐어요." 펜을 들 힘도 없어 하루에 몇 줄씩 써내려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렇게 꾸준히 쓴 그녀의 병상일기는 1995년 시집 '우슬초 찬가'로 엮여 세상에 나왔다. 그녀의 문단 데뷔는 이보다 1년 앞선 1994년 '자유문학' 4월호에 시 '이민 우물'을 발표하면서다. "한국에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큰 오빠가 미국에 병문안 왔다 제 습작 노트를 보고 등단을 권유했죠. 분명 투병 중인 이들에게 삶의 의지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오빠의 말에 힘입어 등단을 했어요." 병마가 가져다 준 '선물'은 비단 시집뿐만이 아니었다. "암에 걸리기 이전까진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며 살았죠. 그러나 병상에서 진정한 저를 발견하면서 그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니 삶 앞에 겸손하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됐습니다. 축복이며 은혜였죠." 건강이 회복되자 그녀는 왕성한 창작의지를 불태워 지난해까지 총 8권의 시집과 4권의 수필집을 발간했다. 또 해외 문학상(2005), 노산 문학상(2010), 미주 문학상(2014), 올해의 재미시인상(2016) 등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미주문인협회 부이사장 및 재미시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주 문단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런가하면 1999년엔 시어머니와 자신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딴 '귀영장학회'를 만들어 장학사업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암을 통해 행복을 배우다 이후 그녀는 가디나 글사랑 창작교실과 사우스베이 평생대학에서 시 창작 지도를 하는 등 후학양성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2014년 두 번째 암이 들이닥쳤다. 정기검진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소리가 절로 나왔을 듯싶었다. "뭐 담담했어요. 그래도 그때라도 알게 돼 천만 다행이다 싶었죠. 그러면서 암에게 말했죠. 나 림프암도 이겨낸 여자야라고.(웃음)" 수술을 통해 왼쪽 가슴을 부분절제 했고 1년간 방사선 치료도 받아야 했다. "분명 힘든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제게 암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고 이전엔 몰랐던 감사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일흔 중반에 만난 암과 동행한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그녀의 시작(詩作) 열정은 꺾을 수 없었다. 2012년 출간된 수필집 '꽃구경'에서 그녀는 '글을 쓰고 싶은 열정과 꿈이 가늘게 흔들리던 나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지 않았나 뒤돌아보게 된다. 눈물도 많았고 외로운 날도 많았다. 밤잠 설치며 내 몫의 고통을 잘 감당하도록 참을성 없는 내가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밤잠 설쳐가며 쓴 시들을 모아 지난해 여덟 번째 시집 '파르르 떠는 열애'를 펴냈다. 시집 속 수 많은 시들 중 서울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에도 게시돼 서울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쉬어가는 의자'가 눈길을 끈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이제 앉기로 한다/(중략)/내리막길이 다리 뻗고 앉으니/맑은 바람이 앉고/햇살이 퍼질러 앉고/마음을 지나가는 고마운 생각들/무리지어/어르며 흔들며/아삭아삭 앉는다' 아마도 이 시는 삶을 향한 수줍은 떨림과 치열한 열애 사이를 건너온 노시인의 자기고백인 동시에 세상 모든 약한 것들에게 내미는 따스한 위로이며 응원일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4.09. 14:47

[인물 오디세이] 가수 박재란, '산 너머 남촌…'을 부른 만인의 연인

60년대 최정상 스타 가수 73년 도미… 타운서 노래 이혼·생활고 신앙으로 극복 간증집회 열며 '인생 2막' 8년 새 두 차례 대수술 가수 딸 심장마비로 잃기도 최근 TV출연…인기 재점화 상반기 새 앨범 발표 계획 여든 해쯤 살다보면 미간에 혜안(慧眼) 하나쯤은 훈장처럼 반짝이려나. 문득 돌아본 지난 발자국 갈지(之)자 선명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려나. 그러나 아직 그 시간에 가 닿지 않은 이들에게 생은 여전히 비밀투성이이며 진부한 농담일 뿐. 그리하여 '인생은 아름답다'는 오래된 명제는 젊은 비관론자들에겐 그저 빛바랜 낭만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평탄치 않은 결혼사와 생사를 넘나든 두 차례의 대수술, 그리고 딸의 사망까지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고희의 여가수가 전하는 '인생은 아름다워' 라면 믿어봄직 하지 않을까. 바로 6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디바 박재란(76)씨다. 간증집회 차 LA를 방문한 그녀를 햇살 좋은 오후에 만나봤다. #삼천만의 연인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중학생 때 이미 노래실력 하나로 천안 일대를 주름잡던 그녀의 재능을 눈 여겨 본 작곡가 박태준씨가 그녀를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에 추천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군예대 시절 첫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못 얻다 1961년 발표한 '럭키 모닝'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님' '산 너머 남촌에는' '푸른 날개' '맹꽁이 타령' '진주조개 잡이'까지 연달아 히트시키며 그녀는 명실상부 1960년대 한국 가요계의 디바로 등극했다. 또 빼어난 미모로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천생연분'(1961) 등에도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도 다졌다. 이처럼 가요계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삼천만의 연인'이라 불리던 그녀는 동갑내기 대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스타 가수와 대학생의 사랑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1966년 결혼 후 후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그곳에서 2년여 간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돈도 있고 사랑도 있었던 시절이었죠.(웃음)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사랑만으로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행복도 잠시,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빚을 갚기 위해 그녀는 쇼단을 꾸려 전국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후암동 저택을 팔고 전셋집을 전전하게 되었고 부부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부부는 이혼했고 1973년 그녀는 홀로 LA에 왔다. #고단한 LA살이 LA에 온 그녀는 LA한인타운 8가길에 있던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를 부르며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이민국 단속반에 걸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도 하고 사기까지 당하는 등 갖은 풍파를 겪었다. 타향살이 외로움에 지쳐갈 무렵 그녀는 열 살 연하인 한인 남성과 1975년 재혼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그리 길지 않았다. 재혼 후 5년 만에 파경에 이른 것이다. "이미 한차례 이혼을 했기에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잘 안됐어요. 당시 한국사회에서 이혼은 특히 여성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에 두 번째 결혼 실패 후엔 죽을 만큼 괴로웠죠." 결혼 2년도 안 돼 별거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왔고 악성 위궤양으로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 아파트 화재로 그녀는 전 재산을 다 잃었다. "당시 자살 직전까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나락에서 저를 구한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변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삶을 긍정하고 기쁘게 살게 됐죠. 그러면서 간증집회 요청이 쇄도했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LA는 물론 뉴욕, 시카고, 알래스카 등 미국 전역을 돌며 간증집회를 열었고 찬양 앨범도 3집까지 발매했다. #전설의 디바, 다시 무대로 1990년대 중반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녀는 지금까지 2000여 교회를 다니며 간증집회를 이어갔다. 이혼 후 어느새 강산이 네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재혼할 생각은 없었냐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재혼은 무슨…현모양처로 사는 게 꿈이었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지 못했잖아요. 두 번의 실패 후 결혼이 겁도 났고… 나 좋다는 남자도 없었고. (웃음)" 롤러코스터 같던 젊은 날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듯 했으나 그 고요한 바다에 다시 풍랑이 일었다. 8년 전 심장수술을 비롯 5년 전엔 위종양이 발견돼 위절제술까지 받으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 된 것. 설상가상 2014년엔 둘째 딸 가수 박성신씨가 지병인 심장마비로 4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성신이가 팔삭둥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어요. 가수가 되겠다고 할 때 죽어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제가 가수가 돼 제대로 가정을 지키지 못한 탓에 불행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성신씨의 사망 후 그녀는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기도로 아픔을 달랬다. "이 세상에 오래 못산 건 아쉽죠. 그러나 천국에 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고나니 평화가 찾아오더군요. 인명은 하나님께 달린 거니까요." 현재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고 가수로서 활동도 재개했다. 지난 연말 주현미, 혜은이, 정훈희 등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던 후배가수들과 KBS '가요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지난 1월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시니어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리고 지난달 25일 KBS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편에 전설로 초대 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현재 그녀는 상반기 중 앨범 발표를 목표로 노래 연습에 여념이 없다. "정말 세월 빨라요.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생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살아보니 행복은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미리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1960년 발표한 '푸른 날개'를 통해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가슴을 털어놓고 노래합시다/ 하늘은 푸르고 마음도 즐거워/(중략)/날마다 괴로운 시름에 닥쳐도/가슴을 털어놓고 위로합시다/산 너머 산이요 강 건너 강이요/젊음의 푸른 날개여'라고.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4.02. 12:45

[인물 오디세이] 민족학교 윤대중 회장 "이민 청소년에 희망주고 싶습니다"

서류미비자 대학입학 등 이민자 권익옹호 앞장 "저소득층 청소년 위한 교육기관 건립이 꿈" 그는 쾌활하고 따뜻했다. 언제나 청년일 것 같던 그의 얼굴에도 주름이 내려앉았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곤 있지만 청춘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민족학교 윤대중(46) 회장이다. 지금껏 이민자 인권문제 및 권익옹호 등 무거운 주제와 함께 한 삶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들을 꽤 유쾌하게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그리하여 그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따뜻했으며 리드미컬했다.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지내는 그를 LA민족학교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이민자 권익운동에 눈뜨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3 때인 1988년 시카고로 가족이민 왔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10대 때 이민 온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터프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너무 힘들었죠. 영어를 못하니 학교생활이 쉽지 않아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렸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돼 좌절감과 스트레스가 컸죠." 그러면서 주말엔 부모님이 운영하는 빨래방에 가 일손을 도왔다. 이처럼 고단하고 힘든 시기 그에게 위로와 용기가 돼 준 것은 한인교육문화원(현 한인교육문화 마당집)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저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셨죠. 그분들의 진심어린 태도가 제게 큰 감동과 위안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자원봉사를 하게 됐죠." 낯설고 물선 타국 땅에서 처음 맛본 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미국 인권운동 역사와 한인 이민역사 등을 공부하면서 차츰 자신감도 회복해 갔다. "인종차별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흑인 인권운동을 공부하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미국이 왜 멋진 나라인지를 알게 됐죠. 그러면서 저도 소수민족으로서, 이민자로서 자부심도 생기면서 자신감도 회복했던 것 같아요." 고교 졸업 후인 1992년 UIC(일리노이주립대 시카고)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하다 1학년을 마친 후 휴학하고 시카고 마당집 풀타임 상근자로 근무했다. 그러다 1996년 뉴욕 소재 마당집 자매단체에서 도움을 요청하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무보수 파트타임이었지만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결혼 1년차 가장이기도 했다. "제가 좀 단순해요.(웃음) 같은 뜻을 가진 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저를 필요로 한다고 하니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죠. 당시 활동하며 만난 아내도 제 결정을 지지해줘 가능하기도 했고요." #민족학교와 20년 뉴욕에서 그는 마당집 외에도 한인봉사단체협의회(NAKASEC) 전국본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이민자들의 권익을 위해 눈썹 휘날리며 뛰어다녔다. "당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이민자 인권옹호를 위해 싸우는 일이 정말 보람 있고 평생을 바쳐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98년 LA 민족학교로 왔다. 당시만 해도 상근자 2~3명이 근무하는 작은 단체였다. "LA는 미국 최대 한인 커뮤니티이기에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해 이주를 했습니다. 이곳에 와 제일 처음 배운 게 무료 세금보고였어요. 그 외에도 각종 서류번역 등 영어가 불편한 한인들을 도와드렸는데 그러면서 한인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배워나갈 수 있었죠." 1998년 사무국장에 취임한 그는 3년 뒤인 2001년 마치지 못한 학업을 위해 시카고로 돌아갔다 대학 졸업 후인 2003년 다시 LA 민족학교 사무국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2013년부터 2년간 NAKASEC 사무국장직을 수행한 걸 제외하고는 줄곧 민족학교 터줏대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현재 그는 민족학교 회장과 NAKASEC 사무국장 직을 공동 수행하고 있다. 그가 민족학교와 인연을 맺은 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물으니 ▶2000년 가주 정부가 이민자 현금보조프로그램(CAPI)을 폐지하려하자 한인 200여명과 함께 주지사 사무실 비폭력 점거농성을 벌여 하루 만에 이를 철회시킨 것 ▶2008년 오렌지카운티 내 일부 커뮤니티 칼리지가 서류미비 한인 및 아시안 학생 150여명의 입학을 거부하자 나성법률보조재단 등 시민단체와 공동 항의해 입학허가를 받아 낸 것 ▶2011년 메디캘 관련 서류에 한국어 번역본 첨부 캠페인 성공 등을 꼽았다. 이외에도 2007년부터 시작해 난항 끝 지난해 완공된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인 두레 아파트 건립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일들 중 무엇보다 도움을 줬던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교사, 변호사, 심리상담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인으로 자리 잡았다는 연락을 받을 때 보람을 느끼죠. 또 그 청년들이 민족학교 봉사자로 활동하는 걸 보면 더 뿌듯하고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20년 새 민족학교의 규모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98년 첫 근무당시 2~3명이던 상근자는 20여명으로, 자원봉사자도 40여명에서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연예산도 13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살림살이가 커지면서 더 분주해졌지만 요즘 그는 그 어느 때 보다 정신없이 바쁘다. 바로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 때문이다. "민족학교가 이민 관련해 한 달 평균 150여 통의 전화를 받는데 최근엔 두 배 늘어난 300여 통의 전화를 받을 정도죠.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 때문에 힘들어 하는 한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를 위해 민족학교가 이민단속반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고 교회나 단체에 가 관련 교육도 실시중입니다." 이처럼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지만 여전히 그는 가야할 길이 멀다 말한다. "언젠가 서류미비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공부도 하고 직업교육 및 커뮤니티 봉사활동도 하면서 아이들이 기죽지 않고 꿈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고 싶거든요. 그렇게 미국사회를 이끌 리더들을 키우는 게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말했다. '날지 못한다면 뛰어라/뛰지 못한다면 걸어라/걷지 못한다면 기어라/당신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뛰기도 하고 때론 걷기도 하며 오늘에 이른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3.26. 16:38

[인물 오디세이] 신경정신과 전문의 수잔 정 박사…나이듦, 그 즐거움을 말하다

입대해 미군 병원서 근무 카이저병원서 33년 진료 가정상담소·교회 상담 등 한인사회 봉사도 열심 "쉰 넘어 비로소 나를 사랑 삶의 지혜도 함께 커져" 일흔의 여의사는 아름다웠다. 열정적이었고 솔직했고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다. 그녀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 절로 들게 하는 여자, 수잔 정(71)박사다. 대화 내내 그녀는 진지하게 경청했고 답변은 간결했다. 나이들 수록 남의 이야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줬다. 아픈 과거사를 건너오며 힘들었던 속내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리하여 나이 들어가는 것이 꽤 괜찮을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 고희의 정신과 전문의와의 대화는 신선하고 즐거웠다. #문학소녀, 의사가 되다 해방둥이인 그녀는 평양 인근 개천에서 태어나 돌 지나 서울로 왔다. 숙명여고 재학시절 이화여대가 주최한 전국문예콩쿠르에서 시조부문 1등과 희곡부문 가작을 동시 수상할 만큼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국문과에 진학해 희곡 작가를 꿈꿨다. "고교시절 영국 수의사인 스코필드 박사가 선교사로 와 이끈 바이블 스터디에 참여했는데 박사님께서 하루는 저를 불러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려면 의사가 많이 필요하다며 제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셨어요. 저는 그때 콩쿠르 수상으로 이대 입학이 예정돼 있기도 했고 의대 학비를 댈 집안 형편도 안됐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그녀에게 후원가를 연결해 장학금을 주선해줬고 1964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의대 재학시절 만난 한 학번 위 동갑내기 선배와 4년 열애 끝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원주 통합병원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돼 원주기독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이후 1973년 그녀는 5개월 된 첫딸을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뉴욕으로 건너와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병원 정신과 레지던트로 취직했다. "당시 외국인 의사가 취직하는 게 쉽지 않아 가장 빨리 취직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니 당시 의사 수가 턱 없이 모자랐던 정신과였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진료하면서 같은 병이라도 행복한 이들이 빨리 회복되는 걸 보면서 정신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이기도 했죠." 한국출신 여의사의 미국 병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힘들었죠. 그러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 환자들도 마음을 열고 치료가 되는 걸 보면서 기쁘기도 했고 미국 와 위축됐던 자신감도 회복됐죠.(웃음)"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다 그렇게 쉽지 않은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도 1년 만에 연방의사 자격증을 땄고 그해 뉴올리언스 툴레인 의대 정신과 레지던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 대학 최초의 동양인 레지던트로 들어간 그녀는 일반 정신과와 소아 및 청소년 정신과 수련과정까지 거쳐 1980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미국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소아·청소년의 정신세계부터 이해해야 되겠다 싶어 좀 힘에 부쳐도 2년 더 수련 과정을 거쳤죠."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끝낸 1977년 그녀는 미 육군에 입대했다. 둘째 딸 카니(39·한인가정상담소 소장)씨를 출산하고 6주 만의 일이었다. "남편이 장남이었는데 홀로 되신 시어머니 환갑을 꼭 직접 가 치러드리고 싶다 하더라고요. 미군에 입대하면 한국 주둔 미군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다 해서 남편과 동반 입대했죠." 용산 미군 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워싱턴주 타코마시 소재 육군병원에서 소아정신과 과장으로 3년6개월간 근무했다. 그리고 1981년 제대 후 LA로 이주해 아시안 정신건강센터를 거쳐 84년 파노라마시티 소재 카이저병원 소아 및 청소년 정신과에서 근무했다. 그러면서 한인가정상담소 수퍼바이저를 비롯 한인청소년센터(KYC)에서 청소년 상담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한인사회 봉사활동도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92년 4·29 LA폭동이후 한인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해 출석교회에서 격주로 무료 상담을 시작해 25년째 이를 지속해 오고 있다. #고난을 넘어 행복으로 LA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직장생활도, 한인사회 봉사활동도 그녀에게는 보람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 예고 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1994년 여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조깅을 나간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남편의 나이 49세였다. "건강했던 남편을 그렇게 갑작스레 보내고 나니 충격이 너무 컸죠. 침대에 일어나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당시 병원 일이 없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낮 시간은 환자를 보며 슬픔을 잊을 수 있었지만 퇴근 후 남편이 없는 집으로 귀가하는 게 힘들었던 그녀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 등록해 야간 수업을 들었다. 강의를 들으러 가는 차안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단다. "당시 신이 원망스러웠죠. 그래서 무작정 신학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그녀는 남편과 지난 미국생활에 대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죠.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8개월간 녹음을 했어요." 그녀의 이 녹음기록은 1997년 '아메리카를 훔친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후 그녀는 한인 언론매체에 활발히 칼럼을 기고했고 이 칼럼들을 묶어 '튀는 아이, 열린 엄마' '문제아는 없다' 등 총 5권을 출판하기도 했다. 또 한인사회 우울증 관련 각종 세미나도 팔 걷어붙이고 앞장섰다. 이렇게 환자를 보고 글을 쓰고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마라톤에도 입문하며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통과했다. 그리고 2007년 연대 의대 7년 선배인 외과전문의 김규환 박사와 재혼했다. 현재 그녀는 카이저 병원에서 1주일에 2차례씩 진료를 하고 있고 USC 의대에서 임상조교수로 레지던트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여전히 한인가정상담소와 교회 상담일도 꾸준히 하며 각종 세미나도 열심이다. "쉰 넘으니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삶의 지혜도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즐거워요.(웃음) 누군가의 도움으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듯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도움을 주며 살아가야죠." 아름다운 삶이 그 어떤 책보다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밤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3.19. 16:19

[인물 오디세이] 디즈니 영화사 해외배급팀 백양희 디렉터

꿈 쫓아 고액연봉 포기 디즈니 영화사 입사 스타워즈 전편 디지털화 130개국 론칭 진두진휘 대학동문 록밴드 보컬 발레·살사댄스도 수준급 그녀는 엄친딸이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MBA를 거쳐 현재 디즈니 영화사 디지털 해외배급팀에서 근무하는 '고퀄리티 스펙'의 소유자, 백양희(37) 디렉터다. 세상 모든 엄친딸이 그러하듯 잘하는 게 어디 공부뿐이랴. 노래 실력도 출중해 현재 대학동문 밴드에서 보컬로도 맹활약 중이다. 게다가 빼어난 미모에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까지. 세상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유쾌·상쾌한 팔방미인을 그녀가 근무하는 버뱅크 디즈니 본사 스튜디오에서 만나봤다. #서울대에서 하버드까지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은행원이었던 부친이 뉴욕지사로 발령이 나 8학년부터 3년간 뉴저지에서 살았다. "한국에선 반장을 도맡아 하던 모범생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이방인이 되면서 충격과 상처가 꽤 컸죠. 그래도 다행히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귀국 후엔 고교 2학년으로 편입, 98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IMF로 이후 극심한 취업난 속 저학년부터 취업준비에 매달리는 수재들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공부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더 열중했다고 한다. "제가 어려서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유년시절엔 발레리나나 성악가가 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고교시절엔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를 열심히 쫓아 다녔고 대학시절엔 노래패, 댄스 동아리 활동도 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죠.(웃음)" 그렇게 놀고도(?) 최우등 졸업을 했다고 하니 지고는 못 사는 그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학 졸업 후엔 유명 외국계 컨설팅사에서 입사했다. 자정 넘어 퇴근은 말할 것도 없고 주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빡센' 사회 초년병 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3년 넘게 그곳에서 일하며 많은 동종 업계 선배들처럼 그녀도 MBA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하버드 지원서에 장래 엔터테인먼트 관련 경영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죠. 그런데 이미 미 명문대에서 MBA를 취득한 선배들이 제 에세이를 보고 지금의 경력과 연관된 장래목표를 기재해야 입학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고 조언했는데 저는 제 진짜 꿈을 쓰는 게 진심을 전달 할 수 있다 믿어서 그냥 제출했죠. 어려서부터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언젠가 이를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꼭 하고 싶었거든요." 그녀의 진심은 통했다. 2006년 그녀는 합격 통지서를 받고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컨설팅사에서 디즈니로 하버드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도 고됐다. 하루 3~4개 정도의 수업을 듣는데 전 수업이 토론식으로 진행됐다고 하니 그 만만치 않음은 더 이상 설명 필요 없을 듯싶다. "고3 때보다 더 힘들었죠.(웃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인 이들이 모인 곳인데다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과 섞여 공부를 했으니 주눅이 엄청 들었어요. 게다가 토론식 수업에 참여하려면 전날부터 철저하게 수업 준비를 해가야 했으니까 하루 3~4시간도 못자면서 버텼죠. 덕분에 1학년 때는 너무 우울해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웃음)" 그러나 그녀는 금세 적응했고 하버드에서 잊지 못할 추억과 경험을 쌓았다. "엘리트라 하면 자기밖에 모를 것 같잖아요? 그런데 하버드에서 그 편견이 다 깨졌어요. 수업이나 시험 때마다 관련 분야 종사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개인교습을 하는 등 열과 성의를 다해 도와줬죠.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시간이 금인 그곳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걸 보면서 저 역시 그들처럼 가진 걸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그녀가 디즈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7년 여름방학 동안 디즈니그룹 본사 국제전략팀에서 인턴십을 하면서부터. "졸업 후 꼭 디즈니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알아보니 자리도 없었고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을 뽑을 계획은 더욱이 없어 지원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하버드 졸업 후 2008년 그녀는 세계 최고의 컨설팅 업체로 손꼽히는 보스턴 컨설팅그룹 LA지사에 입사했다. 영주권 스폰서와 15만달러가 넘는 연봉 등 업계 최고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 2010년 그녀에게 디즈니에서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디즈니 영화사 배급전략팀에서 MBA 컨설팅 경력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입사지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 그녀는 드디어 디즈니에 입성했다. 이전 직장보다 연봉도 현저히 낮았지만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일이기에 그녀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감 있는 삶을 위해 입사 후 두 차례 부서 이동을 거쳐 현재 그녀는 디지털 해외배급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7년 간의 회사 생활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았죠. 영어도 힘들었고 미국식 기업문화도 익숙하지 않았고…그런데 워낙 제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웃음) 더 꼼꼼히, 더 실수 없이 하려 이 악물고 노력했죠." 최근 그녀가 담당했던 업무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스타워즈 디지털 론칭 프로젝트. 2015년 디즈니는 스타워즈 6편 전편을 디지털화시켜 130여 개국에 론칭했는데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것이다. "국가별 마케팅 문화를 이해해야만 성공적으로 론칭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4 판권을 가지고 있는 폭스사와 계약사항을 따로 조율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고요. 또 시차 때문에 새벽에 출근해 전화통화를 해야 해서 6개월 간 꽤 고생했죠." 그렇다고 그녀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은 결코 아니다. 2015년부터 서울대 동문들로 구성된 록밴드 '컬리프라이스' 보컬로 활약하며 1년에 2~3차례씩 공연을 갖고 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발레, 요가 클래스도 듣고 여행과 콘서트 관람도 빼놓지 않는 등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만끽 중이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일터에서 영감을 얻고 누군가에게 그 영감을 되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리고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한국 콘텐츠를 세계시장에 알리는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어느새 미국 직장생활 10년 차다. 지칠 만도, 매너리즘에 빠질 법도 한데 그녀는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 눈빛을 한 채 세상을 누비고 있었다. 열정이 이끄는 삶을 따라 꽤 근사하게 아주 부드러운 안단테 속도감으로. 글·사진=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3.12. 14:01

[인물 오디세이] iCAN 찰스 김 회장 "한인사회와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19세에 이민…미군 입대 제대 후 USC서 정치학 전공 대학시절 한인사회 봉사 열심 유권자 등록·청소년 학업 도와 83년 한미연합회 창립 주도 03년 KAC 초대 전국회장 07년 정치단체 아이캔 조직 "한인 청년들 정계진출 돕고파" 영원히 청년일 것 같던 그가 어느새 이순을 넘겼다. 1980년 이래 때론 뜨겁고 때론 위태롭고 때론 행복했던 한인사회 역사의 현장 곳곳에서 고군분투했던 아이캔(iCAN ) 찰스 김(61) 회장이다. 우리에겐 한미연합회(KAC) 사무국장으로, 영 김(54·공화당) 전 가주 하원의원의 남편으로 친숙한 그는 2007년 KAC 전국회장 사임 후 잠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듯 했지만 그동안 그는 정치활동 단체인 아이캔을 조직해 오렌지카운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다.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청년처럼 바쁘고 활기차게 살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음악 청년에서 정치학도로 서울 출생인 그는 고교 졸업 후 19세 때인 1975년 가족이민으로 LA에 왔다. 학자와 예술가가 많았던 외가 쪽 영향으로 그는 차이코프스키와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시절엔 명동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LP 300여장을 모을 만큼 클래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이 음악 청년은 LA에 와 석 달도 채 안 돼 미군에 입대했다. "영어도 배우고 제대 후 학비도 지원받을 수 있다 해서 남동생과 함께 육군 입대를 했죠. 당시 김치 G.I라는 말이 성행했을 만큼 미군 혜택이 좋아 적잖은 한인들이 미군에 입대를 하던 시절이었죠." 앨라배마 육군 항공본부에서 헬리콥터 정비 기술을 익힌 그는 훈련을 마치고 하와이 25사단에 배치돼 그곳에서 2년 반 가량 복무했다. 당시 그는 미국 최초의 한인교회에 출석하며 청년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백세가 넘으신 최초 한인 이민자들을 만나며 한인이민 역사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당시 매주 병원으로 찾아가 가스펠 송을 불러드렸는데 병상에 누워서 눈물을 흘리며 제 손을 잡던 그분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한인사회와 이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제대 후 LA로 돌아온 그는 1년 뒤인 1980년 캘스테이트LA를 거쳐 USC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그는 캘스테이트LA 한인학생회 교지인 '넝쿨'을 창간,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USC 재학시절엔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의 학생기자로도 활동했다. 또 KYC에서 활동하며 한인 청소년들의 대학진학을 돕기 위해 SAT 강의를 했고 영어가 힘든 한인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개인교습과 멘토링을 하는 등 한인 청소년들의 이민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원조 1.5세 그는 1.5세라는 말을 처음 쓴 이다. 1983년 한인청소년센터(KYC·현 KYCC)와 UCLA가 공동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그가 이 단어를 처음 썼고 이후 한인 언론매체들이 이를 사용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한미연합회(KAC). KAC는 1982년 한인사회 최초의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며 인연을 맺은 그와 정동수 변호사, 던컨 리 변호사 등이 주축이 돼 한인 인사 30여명이 의기투합해 1983년 한인사회 권익을 대변하고 정치력 신장, 리더십 양성을 위해 조직된 비영리단체다. "KAC가 설립된 1983년은 한인사회의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 해 한인사회 대표 비영리단체들이 대거 출범했고 그 무렵 매년 3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면서 한인사회 및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활동도 활발했어요. 또 연극, 가요제 등 한인사회에서 문화 활동도 가장 왕성했던 때이기도 했죠." 이뿐만 아니다. 그는 1983년 UCLA-USC 한인 학생회와 힘을 합쳐 양교 간 스포츠 대항전을 시작했고 가스펠 송 모임인 '필그림'을 조직해 공연도 하는 등 한인 청년들과 어울려 다양한 예체능 활동도 펼쳤다.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었던 셈. "맞아요. 당시엔 별걸 다했죠.(웃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뛰어가 일하다 보면 또 다른 필요가 보여서 또 그 일을 하게 되고…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네요." #한인 정치력 신장위해 뛰다 그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KAC 사무국장으로 활동했고 당시 만난 영 김 의원과 결혼했다. 이후 네이트 홀든 LA시의원 보좌관을 거쳐 89년과 91년 두 차례 세리토스 시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2년 4.29 LA폭동 당시 그는 KAC 이사로 정부기관과 한인사회를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며 폭동 피해자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1994년 그는 KAC 사무국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2003년까지 근 10년간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KAC의 연예산은 1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로 껑충 뛰었고 LA뿐 아니라 알래스카, 시카고, 워싱턴D.C 등에도 지부를 건립, 2003년 그는 KAC 전국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07년 KAC 전국회장에서 물러난 뒤 곧바로 오렌지카운티에 전문적인 정치활동 단체인 iCAN (inter-Community Action Network)을 창립해 청소년 인턴십 프로그램, 한인 유권자 성향 분석, 한인 후보 발굴 등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이캔은 2008년 부에나파크 시의원 선거에서 친한파 정치인인 프레드 스미스 전 시장을 당선시킨 이래 오렌지카운티 각종 선거에서 10여명을 당선시키는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아이캔을 조직한 지 10년이 다 되가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역시 리더십 트레이닝이죠. 미국에서 손님으로 사는 것이 아닌 주인으로 살기위해 한인 젊은이들의 정계 진출을 도와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에 일조하고 싶은 게 제 오랜 꿈입니다." 그렇게 한인사회 곳곳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눈썹 휘날리며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30년 넘는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감사하죠. 그 시간동안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인사회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현장을 목도하고 힘을 보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보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그의 머리카락도 어느새 희끗희끗해졌지만 여전히 오랜 꿈 좆아, 소명을 따라 전진하는 한 그는 영원한 청년일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3.05. 13:15

[인물 오디세이] 안재엽 변호사…꿈을 이루기 늦은 나이는 없다

심리학·법학 공부해 석사학위 4개 취득 쉰에 변호사 시험 합격 가디나에 사무실 열어 여기 호기심 하나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가 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청년시절 꿈을 이룬 안재엽(51·미국명 데이비드) 변호사다. 지금껏 그가 취득한 석사학위만 4개라 하니 한 가지 학문에 꽂히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이 고스란히 읽힌다. 잘 나가는 한국 대기업 억대 연봉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꿈을 좇아 오늘에 이른 그를 만나봤다. #억대 연봉 박차고 LA로 서울대 법대 84학번인 그는 3형제 중 막내로 형제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어머니 치맛바람이 거셌거나 혹은 대대로 수재 집안이었냐는 농 섞인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아니에요. 가난한 공무원 집의 평범한 형제들이었죠. 공부야 해야 하는 거니까 그냥 알아서들 한 거고요." 장황하게 자랑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담담하다 못해 싱거운 답변만이 돌아왔다. 자기자랑엔 별 소질 없어 보이는 이 수재 청년은 대학 졸업 후 연대 대학원에서 헌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대학 선·후배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시에 낙방한 뒤 강단에 서는 걸로 진로를 바꿨다. 그래서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1993년 연봉 높기로 소문난 캐피털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3년 반 뒤 그는 삼성생명으로 자리를 옮겨 법무팀 및 재무기획팀 등에서 근 10년간 재직했다. "당시 형님들이 모두 유학중이었는데 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계셔서 유학을 갈 형편이 아니었죠. 그러다 99년 어머니마저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한동안 유학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모친은 뇌사 판정을 받고 병상에 있다 2011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이렇게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인지, 진정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지 말이죠. 그러면서 심리학과 기독교 상담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죠." 그래서 그는 퇴근 후 유명 정신과전문의가 운영하는 정신분석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심리학 서적들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학중이던 형제들이 귀국하며 본격적으로 심리학 공부를 해보고 싶어 미국 유학을 계획한다. 그 후 2년간 그는 퇴근 후 토플과 GRE 등을 공부하며 미국 대학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사직 후 그해 8월 패서디나 소재 풀러신학교 심리학대학원 가족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억대 연봉과 코앞에 둔 승진을 박차고 한 결정이었다. "당시 기독교 상담학을 공부해 보고 싶은 열망이 컸죠. 그리고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건 제 인생에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선택했습니다." #다시 법조인의 꿈을 좇아 2년 뒤 그는 가족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결혼 및 가족치료(MFT) 석사과정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2008년 여름 샌퍼낸도밸리 커뮤니티 정신건강센터에서 1년간 수습상담사로 근무하며 트레이니십을 했다. 그러나 1년간의 트레이닝 후 그의 미국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9년 예정대로 MFT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후 일자리 찾기는 힘들었고 체류신분 문제 역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보딩케어와 양로보건센터 등에서도 일했지만 전문적인 경력을 쌓기는 힘들었다. "아마 그 무렵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살겠다 결정은 했지만 커리어를 쌓기가 힘들었고 체류신분 문제까지 있어 정말 앞이 막막했거든요." 평생을 모범생으로, 명문대생으로,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으로 엘리트 코스만 밟고 살아온 그에겐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 싶었다. "엘리트 의식요? 어휴 그런 게 어딨어요. 한국에서 10년 넘게 직장생활하면서 그런 우월의식이 사라진지 오래고 더욱이 미국 와 힘든 시간들을 거치면서는 더 이상 한국 배경이 걸림돌이 되진 않았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그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돼 준 것은 그 무렵 만난 아내다. 2011년 임상 간호사(NP)인 아내 고정화(48)씨와 결혼 후 그는 2012년 법대 진학을 해 변호사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 후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청년시절 못다 이룬 변호사의 꿈에 도전한 거죠." #지천명, 변호사가 되다 그는 채프만 유니버시티 법대에 진학해 외국 법대 학사학위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석사 과정을 시작해 이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생애 4번째 석사학위였다. 미국에 유학 와 심리학 및 상담학 관련 학위를 취득하느라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울 법도 했다. "물론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케이스가 아닌 한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변호인이 될 수 있다 믿으니 지금 돌이켜봐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죠." 그리고 지난해 그는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이달 초 가디나에 이민법 전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취업비자로 체류했지만 저도 영주권이 없어 힘들었던 적이 있어 신분 문제로 고생하는 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죠. 무엇보다 제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무실 명도 이런 뜻을 담아 '컴패션(compassion)법률그룹'이라 지었다. 그렇다고 그가 늘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부터 즐겼던 클래식 음악 감상부터 등산, 스포츠댄스, 합기도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는 휴가 때마다 유럽 미술관 순례를 떠날 만큼 미술에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LA에 와서는 지인들과 프랑스 철학연구모임을 꾸려 니체, 푸코 등에 대해 공부하는 등 그는 예술과 철학 분야에 관심이 지극하다. 그런가하면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 이사,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행위원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등 커뮤니티 봉사에도 열심이다. "큰 뜻이 있다기보다는 한인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것뿐이죠. 그렇게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이 조금은 특별한 늦깎이 변호사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괴테의 말처럼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으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2.19. 14:59

[인물 오디세이] 웨딩플래너 케빈 리씨, 할리우드 스타들도 인정한 마이더스의 손

대학 때 LA와 꽃배달 시작 베벌리힐스서 꽃가게 오픈 상류층 스타들 사로잡아 웨딩·파티 장식으로 유명 98년 에미상 꽃장식 담당 그래미·오스카까지 도맡아 디스크 수술로 2년 휴식 후 세계적 웨딩플래너로 명성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다. 열정적인 웨딩플래너이며 타고난 플로리스트, 그리고 영리한 비즈니스맨의 면모까지. 이 재주 많은 팔방미인은 오스카와 에미 시상식장 꽃장식을 담당한 플로리스트로 유명한 '케빈리웨딩스닷컴'(kevinleeweddings.com) 케빈 리 대표다. 최근 웨딩플래너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TV 리얼리티쇼까지 종횡무진 하는 그를 그의 LA 스튜디오에서 만나봤다. #뮤지션, 플로리스트가 되다 서울 출생인 그는 부유한 사업가였던 부친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예원중·고를 거쳐 단국대 음대에 진학해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열두 살 때 부친의 사망과 함께 힘들어진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가족들과 함께 LA로 이민 왔다. 고교시절 누나를 쫓아 꽃꽂이 강습에 갔다 아예 전문가 과정을 이수할 만큼 꽃꽂이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LA에 오자마자 웨스트할리우드 한 꽃가게에 취직했다. 서툰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꽃꽂이 솜씨에 반한 가게 주인이 그 자리에서 그를 채용한 것. 그렇게 낮에는 꽃가게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하루 3시간도 자지 못하는 녹록지 않은 LA살이가 시작됐다. 그러나 꽃가게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남다른 꽃꽂이 솜씨는 금세 입소문을 타면서 그만을 찾는 단골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종 꽃꽂이 콘테스트에도 참가해 상을 휩쓸며 로컬 신문과 잡지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또 주말엔 개인적으로 실내 꽃장식과 결혼식 꽃장식 등을 의뢰받기 시작하며 수입도 점차 늘어 주당 1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1986년 베벌리힐스에 'LA 프리미어'를 오픈할 수 있었다. 오픈과 동시에 그는 베벌리힐스 부호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을 단골로 확보하면서 승승장구해 1년 뒤 800스퀘어피트짜리 매장에서 3000스퀘어피트로 확장 이전했다. #화려한 성공시대 물론 그의 이런 화려한 성공 뒤엔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 그의 노력과 땀방울이 숨어 있다. 사업이 번창해 직원 수가 늘어도 몸에 밴 부지런함 탓에 오전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LA다운타운 꽃시장을 들러 꽃을 사고 아무리 작은 부케 하나도 직접 손이 가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성공비결은 역시 할리우드가 반한 섬세한 솜씨와 안목. "상류층을 상대로 사업을 하려면 제 눈높이도 그에 맞춰야 해요. 그래서 늘 최고의 패션과 인테리어 안목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죠." 덕분에 사업은 날로 번창해 직원 수만도 30~40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5명은 전화주문만 접수하는 이들일 정도였다고. 또 하루 평균 꽃 1만 송이가 소요되고 밸런타인스데이 때면 1500여건의 주문이 밀려들었다고 하니 당시 LA 프리미어의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그의 실내 꽃장식과 웨딩 꽃장식은 상류층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베벌리힐스 부호들은 그에게 집안 꽃장식을 통째로 맡겨 로비부터 안방과 화장실까지 집안 곳곳의 꽃장식을 정기적으로 교체했다. 이런 고객 한 명이 그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월 1만달러 수준. 그러면서 그는 프랑크 시나트라, 로저 무어,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스타들과 고객으로 만나 시간이 흐르면서 둘도 없는 절친이 됐다. 특히 프랑크 시나트라의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의 요청으로 그가 영정사진을 들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8년 에미상 시상식 꽃장식을 맡으면서부터. 이후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그는 그래미와 오스카 시상식의 꽃장식을 담당하면서 명실상부 미국을 대표하는 플로리스트이며 이벤트플래너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러나 이처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2010년 디스크 수술 후 담당 의사는 '한 번만 더 같은 증세로 병원에 오면 휠체어를 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제야 그는 휴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당시 하루 3~4시간씩 자며 일만 했죠. 그러나 아무리 사업이 성공한들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후 2년 동안 사업체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현장을 떠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죠." #진정한 행복을 배우다 2년간의 휴식기를 거친 뒤 그는 웨딩플래너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가 이전과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 십 수 년 간 그는 제니퍼 애니스톤·브래드 피트, 드류 베리모어,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 미국 최상류층 결혼식을 진두지휘해 왔다. 또 1991년 개봉된 영화 '신부의 아버지' 속 웨딩플래너가 그를 모델로 한 것인데다 2010년 케이블 TV TLC에서 방영된 '브라이드 오브 베벌리힐스'에서도 웨딩플래너로 출연하는 등 이미 그는 미 주류사회에서 각광받는 웨딩플래너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그가 지금껏 지휘해온 결혼식은 50~1000만달러에 이르는 초호화 예식이 대부분인데 예식장소도 LA, 뉴욕, 마이애미 등 미국 대도시는 물론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한다. 요즘도 이런 결혼식들이 한 달 평균 3건 이상 잡혀있다 보니 여전히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 이면 결혼을 앞둔 예민한 신부들을 상대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듯했다. "특별히 힘들지는 않아요. 예비 신부들이 예민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해진 예산 안에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집행하느냐를 놓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면 다들 이해하고 잘 따라주니까요. 좋은 친구이며 냉정한 카운슬러인 셈이죠.(웃음)"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이 직업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좋은 친구들을 통해 인생을 배우게 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한창 땐 성공만 쫓았던 적도 건방졌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돈도 명예도 남부러울 것 없는 고객들과 친구가 되면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과 인생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은 짧은 인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결국 세상 모든 화려함의 끝에서 그가 배운 건 소박한 일상의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찾아 헤맨 파랑새는 바로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2.12. 12:19

[인물 오디세이] 워렌고교 데이비드 차 교사…동생 잃은 슬픔을 딛고 선 교육자의 길

가정 형편 힘든 학생들 대학진학 16년째 도와 교회서 노숙자 사역도 "용기와 희망 전하고파" 질문은 힘겨웠다. 평탄치 않은 가족사를 간직한 한 남자의 인생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상처를 캐물어야 하는 건 꽤나 곤혹스러웠으니까. 그의 삶에 걸어 들어갈수록 냉정은 길을 잃었고 가끔씩은 눈가가 뜨거워왔다. 이 쉽지 않았던 만남의 주인공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데이비드 차(41)교사다. 스물도 채 안된 동생의 교도소행과 출소 후 사망까지. 그러나 그 힘겨운 시간을 거치며 그가 열정적으로 보여준 사랑과 나눔의 실천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힘겨운 이민생활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1986년 미국으로 가족이민 온 그는 대학시절과 독립해 살던 7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LA한인타운에 살아온 타운 토박이다. LA로 이민 오자마자 부모님은 마켓에 취직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한국에서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그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한 살 터울 남동생을 돌보며 쉽지 않은 이민생활 첫 발을 내디뎠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형제가 기댈 곳은 친구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대부분이 갱 단원들이다보니 자의반 타의반 그곳에 합류하게 됐다. "그때가 8학년이었는데 저는 얼마 뒤 금방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동생은 그러질 못했죠." 동생은 10학년 때 USA 주니어태권도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딸 만큼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결국 범죄사건에 연루돼 청소년 보호관찰 캠프에 구금되는 등 가족들을 늘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평탄치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는 12학년 때 학년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고 그 해 여름방학 땐 LA타임스에서 인턴십을 하는 등 활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또 인턴십 당시 선배기자의 권유로 자신과 동생을 소재로 한인 이민자 가정에 대한 칼럼을 써 주목을 받았다. 이후 칼럼을 본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방송 제안을 해와 1994년 가을 그의 가족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학교에 희망을 심다 고교졸업 후 그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UC샌디에이고에 입학해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그러다 그가 2학년 때 동생이 범죄사건에 연루, 체포돼 9년 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당시 가족에게 큰 충격을 준 동생을 원망했죠. 그때 어머니가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제가 갱단에서 탈퇴하려 했을 때 그들이 제게 보복할까봐 동생이 자신은 남을 터이니 형은 제발 건들지 말라며 저를 보호했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줄곧 동생을 원망만 한 제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죠." 동생의 교도소행은 그와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그때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이 출석교회 전도사님이셨습니다. 저희 가족을 위로하고 물심양면 도와주셨죠. 그 모습에 너무 감동받아 저 역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그렇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접고 교사가 되기 위해 전공도 역사학으로 바꾸고 교직과목도 이수했다. 그리고 졸업 후 1999년부터 다우니 소재 워렌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교단에 서자마자 그가 팔 걷어붙이고 시작한 일은 바로 저소득층 학생들의 대학입학을 돕는 것. 그래서 그는 샌디에이고 소재 고등학교 근무 때 알게 된 저소득층 대학진학 장려 프로그램인 AVID(Advancement Via Individual Determination)를 워렌고에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LA카운티 교육부에 AVID 프로그램 내 SAT 수업 신설과 이에 대한 교사들의 전문적 훈련을 건의했다. 그렇게 1년간 꾸준히 요청한 끝 마침내 교육부가 이를 수용해 타 학교 교사들 10여명과 함께 겨울방학 3주간 SAT 교수법을 수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1년 9학년 재학생 30여명을 모아 AVID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 #고난을 축복으로 "당시 아이들조차도 대학진학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약속을 하나 했어요. 낙오하지 않고 이 프로그램에만 있으면 반드시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요."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방과 후 일주일에 2~3차례, 하루 3시간씩 학생들에게 개인지도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6~7시에 퇴근하기 일쑤. 시간외 수당이 지급되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의 이런 열정은 동료 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1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혼자였던 담당교사는 10명으로, 참가 학생들도 250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동생도 좋은 멘토나 가이드가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르니까요." 그의 가족 모두에게 생인손에 다름 아니었을 동생은 2004년 출소했지만 영주권 갱신 문제로 한국으로 추방됐다. 1년 뒤 그는 한국으로 가 동생을 만나 그동안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2년 뒤인 2007년 동생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갔을 때 미안하다 말했어요. 좋은 형이 못 돼줘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그때 동생은 한사코 아니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좋은 형이었다고…." 끝맺지 못한 말의 행간 속 슬픔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 모든 걸 축복이라 믿는다고 했다. 믿기 힘들었다. '신은 감당할 만한 고난만 준다'는 오래된 명제에 신의 과대평가라 대꾸한들 누구하나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 앞에 축복이라니. "고통과 고난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제 고난을 연결고리 삼아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무엇보다 제 이야기를 통해 상처받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회복되고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는 5년째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노숙자 선교사역인 '러브LA'에도 참가해 매 주일 거리로 나가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설교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고난을 축복으로 역전시키며 살아온 그의 삶은 100년 전 톨스토이가 했던 근원적 질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가장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가 말했듯 사람은 걱정과 보살핌이 아닌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는.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2.05. 19:08

[인물 오디세이] '돌판' 주문권 사장, "고난은 절망 아닌 전화위복 기회"

5년 만에 가게 7곳 확장 파산 후 식당 주방일 시작 4년전 고깃집 인수 재기 짬뽕·족발 등 사업 확장 뚝심이란 이런 것이리라. 새옹지마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전화위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냉정이며 동시에 열정. 물론 이런 내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리 만무하다. 넘어져 무르팍에 생채기도 나고 딱지도 앉으며 나무가 나이테를 더하듯 그렇게 삶의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일 테니. 바로 그 삶의 경험에서 나온 뚝심 하나로 반백년을 살아온 남자 구이전문점 '돌판' 주문권(54) 사장이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수십 년 살다보면 특별한 사연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유독 마음을 흔드는 것은 실패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뚝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뚝심의 사나이를 그의 식당에서 만나봤다. #광부에서 정치보좌관으로 강원도 강릉 출신인 그는 중학교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깡촌'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 유년시절 땔감을 주워 장에 내다 팔았고 중학생 땐 시내에 나가 구두닦이를 고교시절 방학엔 중국집 배달원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이 모험심 강하고 영민한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1981년 강원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계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휴학하고 한 학기 등록금을 한 달 만에 벌 수 있다는 강릉 탄광으로 가 광부가 됐다. "탄광에서 일해 보면 막장이라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돼요. 2년간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그러나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집에다 전화도 놓고(웃음) 남은 학기 등록금도 벌 수 있었으니 고생한 보람은 있었죠."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인 80년대 중반 복학한 그는 총학생회 간부로 졸업 후엔 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전교조 활동을 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팔 걷고 나섰다. 그후 그는 안정적인 교직생활을 6년 만에 그만두고 1994년부터 강원도지사 특별보좌관으로 4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 무렵 그는 메이크업아티스트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당시 아내가 미국 연수를 계획하고 있어 그도 관심 있던 정치학을 공부할 요량으로 1998년 미국행을 선택했다. #바닥부터 일군 아메리칸 드림 가진 것도 아는 이도 하나 없는 LA에서의 이민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먹고 살기위해 페인트며 빌딩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1999년 LA한인타운 '알배네' 짜장면 배달을 시작하며 식당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고기집인 식도락에서 일했는데 당시 타운 고깃집에서 서빙 하는 남자 종업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때였죠. 그래도 워낙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다보니 진짜 재미있게 일했어요. 그러면서 친하게 지내는 단골들도 생겼는데 그중 몇 분이 투자할 테니 식당 하나 차려보라 하더군요."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그가 식당을 한다면 분명 성공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하는 투자였으니 말이다. 제안을 받자마자 그는 LA한인타운 고깃집 17곳을 돌아다니며 맛과 서비스 등을 분석하며 창업 준비를 했고 2000년 버몬트 길에 '마당쇠'를 오픈할 수 있었다. 마당쇠는 당시 유행하던 무제한 고깃집이었는데 여기에 무제한 주류까지 더해 이목을 끌었다. 생에 첫 사업이었지만 남다른 콘셉트와 열정으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매출은 쑥쑥 올랐고 그는 2003년 세리토스에 2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2004년 일식당 '나고야'를 비롯해 신선정육점 장터보쌈 등 5년 만에 식당이 7곳으로 늘어났다. 당시 매출만도 월 50만달러. 덕분에 베벌리힐스에 집도 사고 고된 이민 생활에도 여유가 찾아오면서 아메리칸드림을 일군 듯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터지면서 은행 융자금을 제때 상환지 못하면서 식당들은 은행에 넘어갔고 그는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한 게 패인이었죠. 그때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간이었죠. 집도 차도 다 뺏겨 버스타고 출근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전화위복의 시간이기도 했죠." #실패를 디딤돌 삼아 분명 남 보기엔 쫄딱 망했지만 그에겐 식당 사업가로 내실을 제대로 다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간 그는 마당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고기도 썰고 메뉴도 개발하며 하루 12시간을 꼬박 주방에서 보내며 제대로 된 요리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개발한 메뉴가 100여 개에 이른다 하니 당시 그의 노력과 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묵묵히 내실을 다진 끝 그는 2013년 지금 버몬트 길 '돌판' 자리에 있던 닭갈비 전문점을 인수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닭갈비를 접고 그 자리에 무제한 구이전문점인 '돌판'을 오픈했다. "사업이란 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래서 요즘은 제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려 노력중입니다.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셰프로서도 최고의 브랜드가 되고 싶거든요."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작년 봄 한국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가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가진 전지훈련 캠프에 셰프로 초빙되기도 했다. "당시 40일간 매일 85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어요. 선수들이 그동안 전지훈련하며 먹어본 식사 중 으뜸이라고 말해 줄 때 가장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맛은 입소문을 타고 한국까지 퍼져 지난 연말 한국 프로야구팀 kt위즈와도 계약을 맺고 지난주부터 애리조나 투산 전지훈련 캠프로 가 선수들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업도 날로 번창했다. 지난해 10월엔 '명가 짬뽕'을 11월엔 '명가 족발'을 오픈했고 LA한남체인 내에 호떡과 붕어빵 판매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직접 한국에 가 잘나간다는 대가들에게 제대로 비법을 전수받아 오기도 했다. "다들 망한 경험은 아픈 상처라 생각하는데 전 그 경험이야 말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랬다. 전화위복이었다. 인생사 굽이굽이 맞닥뜨리는 고난을 길동무 삼아 걷다보니 넘어졌던 길조차 꽃길이었다. 그리하여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1.29. 16:56

[인물 오디세이] '미군과 나의 인생' 펴낸 앤드루 정씨

4년 후 약사시험 합격 약사장교로 파격 임관 전역 후 예비군 편입 정보장교로 16년 복무 31년 군 생활 은퇴하고 최근 미군 관련 책 출판 군인의 삶은 운명이었다는 이 남자, 이등병으로 시작해 중령으로 전역하기까지 미군에서 31년 세월을 보낸 앤드루 정(71)씨다. 왜 아니겠는가. 유년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해 육사 생도의 길을 걷다 약대 졸업 후 이민 와 약사 장교를 거쳐 정보 장교로 복무한 걸 보면 말이다. 최근 미군 제도와 혜택을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엮어 책을 출판한 그를 만나봤다. 인터뷰 내내 그는 고희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반백년 전 일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놀라운 기억력과 집중력으로 그간의 삶을 열정적으로 들려줬다. #약사, 미군이 되다 남원 출생인 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주에서 다닌 토박이다. 전주고 졸업 후 어려서부터 동경했던 군인의 꿈을 좆아 1964년 육사 24기로 입교했지만 1년 만에 자퇴 후 1965년 원광대 약대에 입학했다. 2학년 때 등록금 마련할 형편이 안 되자 육군에 입대했고 1966년 월남전에 참전해 그곳에서 2년을 보냈다. 1968년 제대 뒤 학교를 마치고 한독약품 광주지사에 취직했다. 취직 후 미국 약사 이민을 준비해 1974년 약대 동문인 아내와 5개월 된 딸을 데리고 LA에 왔다. LA에 온 그는 주유소며 밤 청소며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세 식구가 먹고 살기엔 빠듯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통역을 해주면서 알게 된 모병관이 그의 이력을 듣고는 군 입대를 제안해 와 이민 온 지 3개월 만에 미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입대 후 입소한 육군 훈련소에선 육체적 고달픔보다는 낯선 땅에서 홀로 고생하고 있을 아내와 딸 아이 생각에 더 괴로웠죠. 그래도 어떡해요? 가족들 이끌고 살아야했기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착같이 견딜 수밖에요." 두 달간의 고된 훈련병 생활이 끝난 후 LA에 있던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약사보조 교육을 받기 위해 텍사스 샌안토니오 소재 샘휴스턴 기지 내 군의학교로 갔다. 4개월 후 그는 100여명의 동기들 중 탑5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을 마치고 1975년 뉴저지 포트 딕스에 배치돼 부대 내 약국에서 근무하게 됐다. 당시 한 달 급여는 300달러 정도였는데 이 빠듯한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밤에는 택시운전을 했다. "퇴근 후 4~5시간씩 택시운전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5시간 자기도 힘들었죠. 게다가 당시엔 약시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때라 돌이며 보면 미국생활 중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병에서 장교로 억척같은 주경야독 끝에 1978년 그는 뉴욕주 약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장교로 진급도 했다. "제가 소위로 임관했을 때 소속 부대 내에선 큰 뉴스거리였죠. 동양인 장교라는 것도 그러했지만 사병이 장교가 되는 일은 아주 드문데다 입대 4년 만에 소위 임관을 했으니 화제가 될 수밖예요." 그 후 그는 한국 주둔 미군에 자원해 1980년부터 1년간 미 2사단 약국장으로 근무했고 대위 진급도 했다. 그리고 한국 근무를 끝으로 7년간의 현역군인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당시 봉급도 혜택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치열한 진급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지 실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고심 끝 전역을 결정했습니다." 1981년 전역하자마자 그는 휴스턴으로 이주해 재향군인 병원 약사로 취직했다. 연방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3년간의 직장 생활은 그에게 군 시절에 대한 향수병만 키웠다. "군대는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능력에 따른 보상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회생활은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군 생활이 적성에도 맞았고 봉급과 혜택도 훨씬 나았기에 현역 복귀 신청을 했죠." 당시 예비군이었던 그는 유럽이나 한국 주둔 미군 부대로 발령을 희망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IMA(Individual Mobilization Augmentees)편입을 선택했다. IMA는 평소엔 민간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1년에 3~4차례씩 육군 예비군센터의 명령이 있으면 지정 부대에 입소하여 현역 군인들과 똑같이 최소 2주정도 근무하는 예비군이다. 그렇게 1984년부터 IMA로 복무하면서 1988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이듬해 정보장교에 지원, 정보 계통과는 상관없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파격 발탁돼 국방정보본부와 태평양사령부에서 IMA 정보장교로 복무했다. 그리고 1995년 중령으로 진급 했다. "미군에 몸담으면서 언젠가는 한반도와 북한 문제를 꼭 다뤄보고 싶었는데 마침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정보장교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이거다 싶어 지원해 기적적으로 선발됐죠. 제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군에서 성공여부는 자기하기 나름이에요. 성실히만 하면 성공과 도전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오니까요." #사업가로도 성공 일궈 그는 IMA 예비군으로 복무하면서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갔다. 1984년 IMA 편입 후 재향군인 병원을 사직한 그는 휴스턴 한인 밀집지역에 작은 약국을 개업했다. 처음엔 경험 부족으로 폐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 약국을 오픈 한 이후엔 5년 만에 약국 3곳을 운영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투자회사도 설립해 경제적 성공도 거머쥐었다. 그리고 2005년 9월 60세 생일이 되던 날 그는 전역 신청을 했다. 미군으로 살아온 지난 31년 세월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은퇴 계획대로 LA로 이주했다. 현재 그는 LA에서 투자 컨설팅업체를 운영하며 LA한인미군재향군인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등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2012년부터 미군제도와 혜택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집필을 시작, 지난해 9월 'US Army: 미군과 나의 인생'을 출간하기도 했다. 3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저서는 미군 입대시험부터 미군 제도는 물론 예비군 은퇴연금 산정법, 제대 후 가족혜택까지 미군에 대한 모든 것이 그의 성격처럼 꼼꼼하다 못해 치밀하게 기술돼 있다. "미군에 관심 있는 이들 특히 이제 막 이민 와 커리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출간한 책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미군에 관심 있는 한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방법을 계속 모색하고 싶습니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노병은 죽지도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듯싶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걸 보면 말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7.01.22. 19:4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