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삶과 살아온 삶의 격돌 속 피어난 인간애
노아 바움백의 영화들은 언제나 묘하게 서로 닮아 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장면에도 슬픔이 스며 있고, 가장 우울한 순간에도 문득 웃음이 튀어나온다. 그의 영화는 늘 ‘웃프다’. 감정의 경계가 흐려진 상태에서 웃음과 눈물이 한 호흡 안에 뒤섞이는 그 묘한 진동은 바움백만의 리듬이다. 바움백 영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거침없고 빠른 대사다. 말싸움 속에서 드러나는 영화의 핵심 감정, 대사를 통해 구축되는 캐릭터들의 성격, 그리고 현란한 일상의 유머들. 바움백 감독은 극적인 사건보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순간들에 더 관심이 많다. 바움백은 이런 미세한 결, 말과 말 사이에 깃든 흔들림을 통해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사람들은 대개 작가, 예술가, 영화인, 교수처럼 사유와 언어를 업으로 삼는 지성인들인 경우가 많다. 세계를 해석하려 노력하는 사람들, 동시에 그 해석 때문에 더 상처받고 흔들리는 사람들. 그들은 삶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번번이 감정의 미세한 틈에 걸려 주저앉곤 하는 존재들이다. 바움백의 신작 '제이 켈리(Jay Kelly)'는 수퍼스타의 삶이라는 외피 아래 숨은 중년의 자기 성찰과 인간관계의 회복을 잔잔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는 AFI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2025년 ‘올해의 영화 톱10’에 올랐고, 작품상을 포함한 오스카상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제이 켈리는 커리어의 정점에 올라선 세계적인 배우다. 그러나 오랜 명성과 숨 막히는 일정 속에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스타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여전히 밝지만, 그 뒤편 그의 삶에서는 알 수 없는 균열음이 들려온다. 새 영화 홍보를 위해 유럽을 도는 여정에는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매니저 론이 동행한다. 론은 단순히 일정을 관리하는 조력자를 넘어 제이에게는 거의 가족 같은 존재다. 그러나 오래된 관계가 흔히 그렇듯, 오랜 시간 쌓이고 눌러온 감정적 피로와 해결되지 않은 사적인 상처들이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으로 서려 있다.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침묵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아 서로에게 무게가 되어온 것이다. 여행 속 크고 작은 사건들은 오랫동안 눌러왔던 두 사람의 갈등을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린다. 제이와 론은 서로에게 깊이 의지해 왔지만 그만큼 감추어온 상처도 많다. 제이는 론에게 지나치게 기대고, 론은 제이가 자신 없이도 제대로 설 수 있을지 늘 걱정한다. 그러나 그 걱정마저 말로 꺼내지 못한 채 관계는 서서히 굳어져 왔다. 론은 매니저라는 직함을 넘어 아버지이자 친구, 그리고 제이를 짊어지고 가는 감정적 지주였다. 그는 조용히 제이를 위로해 왔지만 그 충성은 때때로 제이의 무심함에 의해 상처로 돌아왔다. 깊은 연민은 곧 피로가 되었고, 그 피로는 말없이 켜켜이 쌓여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균열을 만들어 왔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제이가 마주하는 옛 연인과 옛 동료들, 그리고 불현듯 되살아나는 과거의 흔적들은 그가 오랫동안 마음 깊숙이 눌러두었던 감정들을 다시 끌어올린다. 도시의 공기, 오래된 골목의 냄새,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속에서 과거가 현재를 잠식하듯 스며들고, 제이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사람들과의 거리를 스스로 멀리해 왔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수많은 ‘가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온 세월이 오히려 그의 내면을 잠식해 버린 듯하다. 화려한 스크린 속에서는 늘 주인공이자 영웅이었지만, 그 겉모습 아래에는 외로움과 공허를 견디는 한 중년 남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바로 그 틈에서 제이는 자신이 그동안 외면해 온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비로소 ‘스타’이기 이전의 불안과 회한을 지닌 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바움백은 제이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인물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제이를 ‘스타 이미지의 틈’ 어딘가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머뭇거리는 인간으로 남겨둔다. 화려한 외피와 내면의 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 모순의 공간, 바로 그 사이 어딘가에 제이를 가둬둠으로써 바움백은 인물이 가진 현실성과 불완전함을 끝까지 지켜낸다. 조지 클루니는 아이콘으로서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의 갈등과 후회라는 인간적 고뇌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그의 절제된 연기는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뮤지컬·코미디) 후보 지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스크린 위에서 가장 선명한 감정의 결을 남기는 배우는 아담 샌들러다. 론이라는 캐릭터가 제공하는 묵직한 감정의 무게가 없다면, 이 영화가 건네는 공감과 여운은 훨씬 덜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그는, 오래도록 자신을 따라다닌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를 조용히 벗어던지고 충성, 피로, 연민, 침묵이 뒤엉킨 인물 론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포착해 낸다. 영화는 스포트라이트가 만들어낸 눈부신 명성과 그 이면에 드리워진 인간의 그림자를 밀도 있게 파고든다. 이름이 커질수록 깊어지는 고독, 시간이 흘러도 봉합되지 않는 정체성의 균열을 따라가며 한 인간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차분히 굴려본다. '제이 켈리’는 이 감정의 층위를 조용히, 그러나 날카로울 만큼 정확하게 더듬어 나가며 관객을 스포트라이트의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실제 영화 산업이라는 생생한 무대 위에서 한 인간이 품어온 후회와 회한, 그리고 그를 버티게 만든 관계의 그림자를 세밀하게 비춰낸다. 인물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말과 말 사이의 공기, 침묵이 지닌 무게를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하는 바움백의 각본과 연출, 그리고 조지 클루니와 아담 샌들러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때로는 낮은 숨결처럼, 때로는 격렬한 파문처럼 서로의 감정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이 감정의 떨림이 인물들 사이를 건너 번져 가며, 영화는 끝내 한 사람의 내면을 관객 앞에 오롯이 드러내는 깊은 중심으로 응축된다. 그런 점에서 '제이 켈리'는 단순한 감정 이입을 넘어, 전혀 다른 결의 감정적·형식적 영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인간애 격돌 감정적 피로 핵심 감정 영화 홍보
2025.12.17. 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