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평범한 것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훗날엔 지금 이 순간도 몹시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다. 십여년 전 푸르던 시절을 공유하는 네 자매와의 해외여행은 축제처럼 들뜨고 설레었다. 아침에 눈 뜨며 시작된 우리의 수다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저마다의 말투, 표정, 몸짓을 보니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떠오르고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되살아났다. 중년 이후에는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그리워진다는데 그것은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추억이 없기 때문 아닐까? 어느새 50 전후의 나이들이 되어 흰머리와 얼굴 주름이 생겼지만 부모와 자식, 남편보다 더 긴 세월 함께 가는 깊고 질긴 인연이 아닌가 싶다. 미풍이 부는 해변, 밀려오는 파도, 길게 뻗은 야자수, 이국적 음식들…. 함께했던 모든 시간은 내 가슴에 바닷속만큼이나 깊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 하였다. 요즘도 자매들은 카톡방에 그때 사진을 올리며 그리워한다. 지금보다 풋풋하고 팽팽했던 얼굴들이다. 반가움에 문자 주고받으며 추억에 잠긴다.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의 촉감, 살랑거리는 나뭇잎, 물속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겨울에 먹는 야채와 과일을 햇볕에 말리면 맛과 풍미가 더해지듯 옛 기억들도 되돌아보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이 들수록 몸은 사막처럼 건조해지고, 땅이 갈라지듯 주름이 지고, 건망증은 심해지지만 아직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많다.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고달픈 인생길,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짜증 나고 의욕 상실에 빠졌을 때 자매들과의 동행은 무척이나 즐거운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때 충전했던 힘과 생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또 한 번의 타임아웃이 하고 싶어진다. 손선애 / 리버사이드독자 마당 자매 여행 얼굴 주름 가도 추억 희로애락 생로병사
2024.03.05. 18:27
나의 네 자매 카톡방은 언제나 봄날이다. 어디 가서 이런 말 하겠니, 하며 애들 자랑 남편 흉 시시콜콜한 것 다 털어놓는 수다방이라고나 할까. 화기애애하던 카톡방에 한국 대선이 불쑥 올라왔다. “내일 잊지 말고 투표해~” 셋째가 손가락 이모티콘으로 대통령 후보 번호를 올렸다. “당연하지” 넷째의 활짝 갠 이모티콘이 즉각 올라온다. 응원에 힘을 얻은 듯 셋째가 지지 후보의 실시간 유세 장면을 줄줄이 올린 후 다시 손가락 이모티콘으로 지지 후보 번호를 강조했다. 깜짝 등장한 언니가 역시 손가락 이모티콘으로 답을 했다. 그런데 후보자 번호가 다르다. 카톡방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수시로 만나 의기투합하는 언니와 동생들, 함께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적금을 붓고, 그때 가서 합류하기로 한 나는 그 날을 꿈꾸며 코로나가 완전히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친밀한 자매라고 정치 성향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황당한 기분으로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언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느껴지는 셋째의 외마디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모티콘으로 후보 번호를 정정해 주었다. 그제야 슬며시 “알지” 하는 이모티콘으로 답신을 올린 언니, 전날 밤 언니네 가족 모두 지지 후보 당선을 위해 단합한 것까지 알고 있는 동생들을 살짝 놀린 것이다. 새벽 시작도 전에 나가서 지지 후보 찍고 왔다는 둥,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뒤풀이 하게 우리 집에 오라는 둥 화해 무드로 돌변했다. 사실 나는 좀 놀랐다. 온순한 시민의 모습만 떠올렸던 내 자매들을 보며, 유튜브나 SNS를 통한 사람들의 과열된 듯한 열망들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비호감 덜한 후보 뽑기라는 것 알지만 자매들은 지지하는 후보가 되기를 소원하며 다들 날밤을 새우고 있었다. 나는 자매들의 일이 내 일인 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통령 선거 실시간 개표 상황을 지켜보았다. 후보들의 면면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매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가슴이 미어질 때가 많다 보니 더욱 그랬다. 대선뿐이랴, 이런저런 인연으로 인해 사람 뽑는 일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판단과 성향이 뚜렷하다면 흔들릴 확률이 적지만, 평소 관심을 두지 않던 일이거나 자기 소신이 없을 때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라 할지라도 나와 다름에 대한 좋고 싫음의 감정에 휘둘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언니가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드디어 제20대 한국 대통령이 탄생했다. 5년 전과는 달리 카톡, 유튜브, 페북을 통해 자신이 찬성하는 혹은 반대하는 후보에 대한 표현이 너무도 노골적이었던 것 같다. 당선인을 축하는 하되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감정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 사심 없이 화면을 여러 번 돌려보며 기뻐했던 5년 전을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지기 때문이다. 개표 진행 상황을 한국 자매들보다 더 정확하게 꿰고 있는 나에게 셋째가 감동한 듯 한마디 던진다. “미국에서도 보는구나.” 투표권도 없는 내가 답했다. “당근이제! 나 한국 사람이거든.” 오연희 / 시인이 아침에 대통령 자매 대통령 후보 대통령 선거 한국 자매들보
2022.03.16.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