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55년된 장갑과의 화해
나는 선을 본 지 이틀 만에 약혼을 했다. 나흘 뒤에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은사님께 갑작스레 청첩장을 드리러 가던 날, 외투를 입고 가죽장갑을 꼈지만 한국의 2월 한파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앞서 걷던 약혼자가 문득 돌아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만난 지 사흘. 우리는 아직 어색한 사이였다. 난생처음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괜스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날 서로의 체온이 장갑 너머로 전해졌고, 그 기억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몸속에 선명하다. 결혼 초기에는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자주 상했다. 그러면 나는 서랍 속에 나란히 둔 우리 둘의 장갑을 꺼내 다른 서랍에 따로 넣었다. 그러다 마음이 풀리면 장갑을 다시 포개어 넣곤 했다. 장갑은 내 마음이었다. 몇 해를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웃음이 났다. 장갑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벌을 주고 있는 걸까. 지금은 그 시절보다 마음이 상할 일도 줄었고,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장갑을 따로따로 넣어두는 일도 없다. 처음 내 손을 잡아주던 남편의 따뜻한 손길과 오랜 세월 함께해 준 그의 삶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서랍 속에 나란히 놓인 장갑을 볼 때마다 처음으로 손을 잡던 그날의 떨림과 부끄러움이 다시금 마음 가득 번진다. 이제 손은 주름지고 거칠어졌지만, 온기는 젊은 날보다 더 깊다. 세월의 추위를 함께 견뎌온,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온도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이 장갑들이 필요 없는 날이 오겠지. 그러나 그때까지는 추운 날에는 장갑을 꺼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을 것이다. 장갑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라, 한평생 함께 걸어온 세월이 빚어낸 사랑의 온도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기온이 뚝 떨어지는 날이면 55년 전 한국의 2월이 떠오른다. 그때는 남편이 내 손을 잡아주었지만 이제는 내가 남편의 손을 먼저 잡는다. 세월과 함께 쌓인 연민과 감사가 마음 깊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 살이나 어린 나를 가르쳐주고 이해해주며 함께 걸어온 그의 삶은 내 마음속 저금통에 고마움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남편은 노년이 된 지금, 내 저금통의 고마움을 날마다 조금씩 꺼내어 쓰고 있다. 며칠 전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장갑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번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물었다. “당신, 무슨 좋은 일 있어?” 남편은 내가 장갑과 화해한 걸 모른다. 이 장갑은 우리 결혼의 초판본 같은 것이다. 가죽이지만 부드러운 진심이 담겨 있었고, 손을 맞잡으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천천히 책장을 넘기듯 쌓여왔다. 이제는 손으로 기억을 나눈다. 말보다 먼저 닿는 손끝의 온기, 말없이 다정하게 잡은 손길에 인생의 온도가 있다.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세월의 가장 따뜻한 기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소박한 손끝에서 나왔다. 그걸 늦은 나이에 비로소 깨닫는다. 서랍 속 장갑이 조용히 속삭인다. “참 잘 살아왔어.” 얼마 전부터 손이 시리다는 남편에게 55년 전 가죽장갑을 꺼내 주었다. 장갑 안쪽의 오리털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다며 좋아했다. 날이 풀리면 장갑을 깨끗이 닦아 다시 포개어 서랍에 넣어둘 생각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장갑 화해 입고 가죽장갑 장갑 안쪽 마음속 저금통
2026.01.20.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