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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어느 그리스도인의 장례식

며칠 전 남편과 나는 얼굴도 잘 모르는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편의 친구분의 아내다.     고인과는 10여 년 전 그 집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고인은 큰 며느리다. 남편 동창들이 부부동반으로 모여 장례식이 끝나고 점심을 먹는데 그 부인은 우리에게 한 번도 오지 않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누군가하고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우리 중의 누구도 인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고인의 장례식장이 거리가 가깝고 남편이 젊다면 혼자 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장소도 멀고 고인의 남편이 직접 부고를 보내와서 성의가 고마워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고인의 남편을 만났다. 다소 불안하고 수척해진 얼굴에 흰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별말 없이 고인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고 조의금을 내고 고인의 관이 놓인 장례식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고인의 사진이 양쪽 전면 상단에서 살짝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반겼다. 그 모습은 오래전에 언뜻 봤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단정하면서도 정감가는 모습이었다. 동창 두 분과도 만나 인사 나누고 혼자 오신 동창분과 같이 자리를 잡았다.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고인의 조카인 목사님이 사회를 맡았다. 식순에 따라 기도와 찬송을 부르고 아들 딸 네 명 중 세 명이 엄마를 기리는 얘기를 짧게 이야기했다.     다만 막내 아들만이 엄마와 신앙에 관해 나누었었던 부분을 길게 얘기했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이 고인을 기리는 차례가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고인과의 관계를  짧게 한마디씩 했다.     대부분 고인의 남편과 같은 의사분들이었다. 그중 어떤 한 분은 몸이 불편한지 앉은 채로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은 고인이나 고인의 가족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3장을 인용한 말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던 말씀이다.   그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모태신앙인 그분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착하게 산다고 살며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날 고인이 “거듭나셨습니까”하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혹스런 질문에 기분이 나빴는데 결국은 고인의 그 말이 자기의 신앙생활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은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 신앙심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장례식장은 어느새 모두 숙연해지며 자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곧이어 고인의 남편 차례가 됐다. 고인이 본인을 만나 미국까지 와서 네 자녀를 키우고 본인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인과 만나게 된 사연을 회상했다.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가서 수술 한번 해보지 않았는데 욕창 환자가 생겼다 한다. 부하들 앞에서 체면상 못한다고는 할 수 없기에 용기를 내서 수술을 하고 ‘미제 마이신’을 듬뿍 사용해서 다행히 잘 나았다고 했다.   당시 군대에서는 미국산 약품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미제’라는 말에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미제라면 최고로 여기지 않았던가. 아무튼 욕창 환자를 잘 치료한 덕분에 소문이 잘 나서 그 동네 교장선생님이 찾아온 일, 그분의 딸인 고인을 만난 일 등 마지막 아내를 보내며 그 옛날 풋풋했던 젊은 시절이 그리운 듯  고인 앞에서 절절히 지난 세월을 이야기했다.     끝으로  고인에 대한 고마운 에피소드 5개를 이야기하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연되어 3개로 줄였다. 어찌 3개뿐이겠는가. 고인이 젊은 날 한국에 있을 때 KBS 아나운서 자리를 마다하고 극동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분의 신앙심을 알 수 있었다.     남편 분이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따라나온다고 해서 장례식장인데도 웃음바다가 되었다. 참으로 흐뭇한 장례식이었다.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인은 양쪽 정면 상단에서 만족한 듯 처음부터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 어머니를 잃은 두 딸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 울고 있었다. 이제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이 그들을 한없이 슬프게 한 것 같았다.     구약 성서 전도서 7장1절에서 4절까지 말씀을 보면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좋고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칫집에 있다”고 했다. 그날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후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모두 그 세계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이 높아진 이 가을에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답을 얻은 것 같다. 집에까지 오는 내내 고인의 언니와 가족이 부른 “거기서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의 찬송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마당 그리스도인 장례식 장례식장 입구 그날 장례식 대부분 고인

2025.10.30. 18:35

[수필] 아내가 없어졌다

몇 달 전에 갑자기 아내가 없어졌다. 그녀의 침대는 그 후로 죽 비어있다. 은퇴했으니 일을 나가진 않았을 테고, 외출했나? 곧 돌아올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아내가 쓰던 달력은 아직 종착역도 아닌데 3월에 고장이 난 듯 멈춰 서있다. 옷장의 옷들, 신발장의 구두들은 눈 한번 뜨지 않고 그대로다. 응접실의 세간도 그렇고 부엌에 가면 그녀가 꾸려놓았을지 모를 반찬이 아직도 냉장고에 있을 듯하다. 아내가 가꾸던 앞뜰과 뒷마당 잔디밭 끝의 나지막한 비탈 위로 화초와 꽃들은 속없이 활짝 웃는 듯 피어나고 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아내가 몇 달 전에 하늘나란지 어딘가로 떠났다. 죽기 2주 전, 응급실에 들어갈 때, 늘 그랬듯이 하루 이틀 응급처치 후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꿰뚫고 있어서 상태가 안 좋을 때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스스로 가늠하고 여부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거였다. 몇 차례 수술할 때를 제외하곤 중환자실은 처음이었다. 저혈압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아내는 직장암 수술에다 소장이 꼬여서 했던 수술 자리와 방사선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질러댔다. 진통 효과가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모르핀 주사로 아내 몸뚱어리의 단단한 고통을 흐트러트리고 멈추게 했다. 그녀의 통증은 내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들어 의료진에게 제발 통증만은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모르핀 진통제의 함량은 날마다 점점 높아갔고 코에 끼웠던 산소 호스가 얼굴을 덮어쓰듯 큰 산소마스크로 바뀌면서 아내의 몰골과 의식은 현존하는 세상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거역할 수 없는 강물의 물살에 밀려 가물가물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차디찬 손을 잡아보지만 떠내려가는 그녀의 온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아니면 최소한 잘 있으라는 작별의 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칠고 힘겹게 쉴 때 내 마음에 담아 준비해뒀던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미안해. 용서해주고 다 내려놓고 가벼이…’, 그리고 (티벳사자의서)에서, 또는 많은 임사 체험자들의 증언대로 ‘어디선가 황홀한 빛이 나타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빛을 따라 들어가’라는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길 떠나는 아내에게 끝내 노잣돈 한 푼 못 주고 낯선 먼 길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거칠게 쉬던 숨이 잦아들다가 멈춰버리자 결국 그게 그녀의 세상과의 마지막이었다. 태어나 꽃피고 아름답고 슬펐던 삶이라는 한바탕 꿈이 깨어지는 찰나였다. 또한 삶의 괴로움과 병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내가 남은 식구들과 작별하는 마지막이 어떻게 이렇게 엉성하고 간단하고 허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은 창세기에서 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귀띔이라도 안 해주었나?     밀려오는 통탄, 내 아내에게 준 많은 잘못과 상처들을 용서받지 못한 회한 등 엄청난 무게의 슬픔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나는 희미한 온기가 남은 아내의 벌어진 눈과 입을 꼬옥 눌러 죽음을 닫았다. 신의 사랑이라던가 무슨 계시나 은총 같은 공허한 약속들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아내의 죽음에 함께 가둬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긴가민가하면서 알고 있거나 추구했던 삶의 의미나 죽음에 관한 신관, 종교나 철학적 사고는 무용이었다. 내가 알지만, 내 반쪽이었던 아내의 삶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무의미했다. 세상 만물에 대한 의미도 내가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달렸을 뿐 어떤 고정된 절대적 가치는 없는 것처럼. 그러니 아내가 살아온 삶과 남겨진 추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의 예순아홉 생애는 죽음 앞에서 백 살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한들 매한가지 아닌가.   나는 장례식 없이 가족만 모여서 조용한 이별식을 한 후에 화장하기로 장례회사와 계약했다. 평소 조문객 불러 모아 치르는 장례식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례식은 죽은 자와는 상관없이 산 자들 위주로 치러졌고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신을 진열하고 장례식장 입구에서는 부조금을 접수하는 방식을 나는 혐오해 왔던 터였다. 그리고는 그 접수된 부조금으로 장례비 계산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아내와 평소에 그런 죽음 후의 절차를 상의한 적도 없으니 그 사항은 공란이었기에 나 혼자 내린 결정의 이유이고 배경이었다. 그러나 곧 내 결정을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과 처가 형제들이 반대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장례 일정을 잡고 장례회사와 연계된 작은 교회를 정했다.     장례식은 교회에서 불교식으로 치렀다. 시작할 때 나는 조문객에게 일러뒀다. 기독교 신자로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으나 이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겠다며 몇 년 전 불교에 입문했으므로 불교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내겐 예수와 석가모니 부처와의 경계가 없노라고 덧붙였다. 장례식을 끝내고 화장한 유골함을 영정 사진, 꽃과 함께 집안 응접실에 봉안해 모셨다. 산소에 갈 필요가 없어 좋았다. 때때로 사진을 보고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을 건네곤 한다. 요즘엔 ‘왜 그랬어?’는 원망 투라서 뺐다. 딸내미도 제 아들 생일에 유니버설 스튜디오 다녀왔다고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잖은가,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진다고. 이제 시간은 비밀처럼 흘러 후회되는 아픔도 그리움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아내가 없어졌듯이 그리움도 차차 없어지겠지. 김윤기 / 수필가수필 아내 아내 몸뚱어리 장례식장 입구 석가모니 부처님

2022.09.2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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