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3월 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날이다. 1975년 UN이 국제 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한국에서도 2018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어 매년 성평등 사회를 위한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인터넷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이날은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성취를 기리고 성평등, 여성 인권, 노동권 향상을 촉구하는 날로, 전 세계적으로 기념식, 행진, 토론회 등이 열리며, 여성의 성취를 축하하고, 성평등 사회를 향한 목소리와 함께, 남녀 임금 격차 해소, 직장 내 차별 없는 노동 환경 조성,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등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고 한다. (세계 남성의 날도 있는가? 있다! 11월 19일이다. 남성과 남자아이들의 건강에 집중하고, 여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성평등을 추구하며, 긍정적인 남성 롤모델을 주목하는 날로, 영국을 포함해 약 60개국에서 이날을 기념한다고 한다. 참 별 날이 다 있네! 유엔이 지정한 공식 기념일은 아니라고 한다. 아, 이건 명백한 남녀차별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성의 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참으로 부끄럽게도, 긴 세월 여성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유교,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가부장제도가 지독하게 완고했다. 그 바람에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하층 인간으로 취급하는 야만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야만성에 반대하는 깨어있는 지성인도 있었다. 그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가까운 예를 들면, 장일순 선생 같은 분이다. “이 땅의 여자들은 이제까지 주고만 갔네, 그러나 그것은 온 세계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난초 그림에 쓰인 글귀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기만 하고 간 여성들 덕에 세상이 자유로워지리라는 깊은 뜻의 말씀이다. “어머니는 끝이 없네”라는 붓글씨도 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母心是海(모심시해)’, 즉 ‘어머니 마음은 바다’라는 붓글씨도 깊고 정겹다. 이런 여성 존중은 동학에서 배운 것으로 김지하 시인에게 이어졌다. 장일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인 이인숙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장일순 선생이 아이들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여느 집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고 한다. 가령 부인에게 늘 존댓말을 썼다. 부인이 바깥나들이를 다녀오면 “그래 바깥에서 하신 일은 잘되었어요?”하며 깍듯이 공대하는 말씨로 물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저 양반이야. 나는 건달이고 하숙생이지. 나는 원래 허튼 구멍이 많은데 그때마다 아내가 일침을 가하듯 딱딱 일러준다네. 뭐냐 하면 그런 점에서 아내는 선생님이시지.” 장일순 선생은 거의 평생을 백수로 살았다. 많은 일을 해내고 이루었지만, 돈벌이는 하지 않았다. 정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물이었기 때문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세운 대성학교 교장과 이사장을 잠시 맡은 것 이외에는 어떤 직함도 가져본 적이 없다. 부인 이인숙 여사는 경기여고와 서울대학 사범대를 졸업한 엘리트로,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남편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며, 평생 든든한 울타리 노릇을 묵묵히 감당했다. 그 덕에 장일순이 큰일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말은 쉽지만 참 눈물 나는 이야기다. 각설하고, 여성의 날이 따로 필요 없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실제로 지금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넘어서는 ‘여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여성 상위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문득 엉뚱한 걱정이 든다. 혹시, 인공지능의 본질은 여성이 아닐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세계여성 성평등 여성 세월 여성 장일순 선생
2026.03.05. 20:13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지난 7월21일이 1주기였다. 세월 참 덧없이 빠르다. 고인의 뜻이 워낙 완강했던 탓인지, 요란한 1주기 추모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다만 김민기가 20살 때인 1971년에 발매되었다가 판금 조치를 당해, 희귀본이 되었던 첫 음반을 54년 만에 복각하여 LP판으로 다시 냈다. 또 김민기를 존경하는 후배 음악인과 과거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입주해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이 공동 개최하는 ‘김민기 뒤풀이’ 공연이 열리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김민기의 예술정신과 인간성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조용하지만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연계의 모판이었던 학전(學田) 소극장은 어린이 연극에 힘을 쏟았던 고인의 뜻을 살려 아동극 전용 ‘아르코 꿈밭극장’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학전김민기재단’을 올해 안에 설립하여 고인이 일생에 걸쳐 남긴 음악과 뮤지컬 작품과 작업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뒷것’ 김민기답다. 하지만,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다. 인간 김민기를 널리 알리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민기처럼 결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세상도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뒷것’ 정신에 대해서…. “‘뒷것’ 김민기 뒤에 장일순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장일순(張壹淳, 1928년-1994년) 선생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민주화운둥의 대부로 알려진 큰 어른이다.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 민중 속의 철학자로 김지하 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김지하 철학의 바탕인 생명사상은 장일순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랜 감옥살이로 생긴 정신의 상처를 먹그림 그리기로 치유하는 지혜를 가르친 분이기도 하다. 김민기는 김지하를 통해 장일순을 만난 이후에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며 모셨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김민기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늘 사무치게 그리운 자리였다. 장일순 선생 또한 민기를 지극히 아꼈고, 민기가 지은 노래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가사와 우리 정서를 담은 선율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의 독창성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에서 나오며, 공동체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해준다”면서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늘 부르던 노래가 ‘아침 이슬’이었고, 술 한잔 걸치고 원주천 뚝방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도 아침 이슬을 부르면서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김민기가 군사정권의 엄혹한 감시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 생산자인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1989년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혜성 등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살림모임’을 창립할 때 김민기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장일순 선생은 여러 가지 호를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무위당(无爲堂)’과 ‘좁쌀 한 알’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뒷전에서 할 일 다 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분의 주된 가르침은 “밑으로 기어라”였다. 앞에 나서서 떠들지 말고,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 김민기의 ‘뒷것’ 정신과 바로 이어진다. 장일순과 김민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뒷것’으로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장일순 선생의 말씀 한마디…. “사람이 보이는 것만 너무하면 재미가 없어. 안 보이는 가운데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민기 장일순 장일순 선생 김민기 뒤풀이 인간 김민기
2025.07.24. 19:29
하늘의 별이 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는 새벽마다 ‘아침이슬’이 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이슬, 아주 작고 영롱한 물이다. ‘좋은 사람’ 김민기가 남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스스로를 ‘뒷것’으로 낮추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절실하다. 아무 데서나 앞에 나서서 설쳐대는 쓰레기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김민기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엄청난 죽비다. ‘뒷것’이라는 낱말을 대하면 ‘노자 도덕경’의 물이 떠오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도록 섭리하면서도,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같은…. 상선약수 편을 찾아 읽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도 물처럼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양한 해설이 있는데, 김민기가 아버지처럼 모신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풀이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장일순 선생이 강조한 가르침 중에 “밑으로 기어라”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 밑으로 기면서 섬겨 모시는 마음 없이는 참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물이나 민기의 ‘뒷것’과 같은 뜻이다. 물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그렇게 물의 덕성을 닮으려 애쓰며 산다면 세상이 한결 푸근하고 촉촉해질 텐데….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 더러움을 받아내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도 뚫어내는 인내와 끈기, 폭포와 같은 용기, 유유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대의 등을 물의 칠덕(七德)이라 부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지혜롭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물의 덕성은 도가사상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 여러 곳에서 물을 이야기한다. 가령,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힘센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여린 물이 화를 내면 대단히 무섭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 해병대 채상병 비극을 둘러싼 추잡한 소용돌이…. 이런 비극을 극복하고 물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모두가 서로 다투지 말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혹시 가장 낮아지려고 서로 다투는 희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의 물은 평평하다. 다툴 필요가 없다.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낮은 데로만 흐르는 겸손,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지극히 당연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희생하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 사람, 그런 지도자가 그립다. 김민기의 ‘뒷것’이라는 낱말이 새삼스레 감동으로 스며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우직스러운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우리는 잊고 산다.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런 사람다운 사람을 바보나 미련한 자로 낮잡아보며 함부로 대한다. 나도 그랬다. 부끄럽다. 아무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 그립고 아쉽다.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끝으로 실없는 농담 한마디. 나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유리하다. 키가 매우 짧기 때문에….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자 도덕경 고인 바다 장일순 선생
2024.08.01.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