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2024년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의미하는 축제의 날로서 세상은 그야말로 기쁨과 즐거운 분위기로 한창이다. 이맘때쯤이면 6.25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1년 연말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한 일촉즉발 위기의 전투 기억이 새롭다. 전투지역은 강원도 양구 북방 25km에 있는 1090고지다. 이 고지에서 크리스마스인 12월25일에 전투를 했다고 하여 이후 이 고지를 ‘크리스마스 고지’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6.25 전쟁에서 한국군과 북한군과의 실제 전투는 불과 30%, 나머지 70%는 대부분 대규모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한국전쟁사에는 처절한 전투를 상징하는 지역 이름들이 꽤 많다. 피의 능선을 비롯해 단장의 능선, 펀치볼, 철의 삼각지, 김일성 고지, 스탈린 고지, 모택동 고지와 함께 ‘크리스마스 고지’등이 있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크리스마스에 중공군과 한국군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벌어진 전투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1951년 12월25일부터 12월28일까지 4일에 걸쳐 치러졌다. 240만 중공군 병력중 제 68군 204사단과 국군 보병 7사단이 나흘동안 수차례에 걸쳐 싸워 고지의 주인이 낮과 밤으로 바뀌었다. 치열한 전투로 흰 눈에 뒤덮였던 고지는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피아간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또한 천지를 울렸다. 돌이켜보면 압록강을 넘어 남침한 중공군과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양측은 11월27일부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고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휴전선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중공군은 결국 이 약속을 어기고 재공격을 감행했다. 고지를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의 연속에 피아간의 피해는 그야말로 핏물의 홍수였다. 처절한 혈투 끝에 승리했지만 고지는 순식간에 죽음의 동산으로 변해버렸고 결사 항전한 아군은 22명이 전사 21명이 실종됐다. 우리 군은 중공군 172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이 전투에서 국군 7사단의 중대장이던 이순호 대위의 크리스마스 고지 진지 방어 임무 수행담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적의 공격으로 고지가 함락되면서 다급해진 중대는 수류탄과 총검으로 중공군에 맞섰지만, 적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포위됐고 삽시간에 적과 아군이 한데 엉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끝까지 진지를 탈환할 것을 각오하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며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중대장 이 대위는 전투 중에 적의 총탄이 왼쪽 팔과 우측 정강이 두 곳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으면서도 중대원들과 함께 수류탄 투척과 총검전을 벌이며끝까지 진지를 지켰으나 가슴에 흉탄이 관통하면서 장렬히 전사했다. 양구 두메산골엔 지금도 크리스마스 고지전 당시의 아픔과 슬픔이 남아있다. 크리스마스 고지에 평화롭게 울리는 캐롤송을 듣고 있자면 핏빛 물든 곡성이 들리는 듯 해 가슴이 찡해 온다. 크리스마스에는 전선에 복무중인 대한민국 장병들에게 평안이 넘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올 성탄절에도 ‘하늘엔 영광, 땅 위엔 평화로다’라는 메시지가 가득할테지만 지구 한 편에선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 전쟁하는 그곳에 임하옵소서!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크리스마스 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기억 군사분계선 설정
2024.12.15. 21:09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의미하는 축제의 날로 세상은 기쁨과 즐거운 분위기로 한창이다. 이맘때쯤이면 6·25 한국전쟁사에 남을 치열했던 전투 하나가 생각난다. 시기는 1951년 연말,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시기에 강원도 양구 북방 25Km에 있는 1090고지에서는 한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시작돼 나중에 ‘크리스마스 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따지고 보면 6·25전쟁에서 한국군이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는 대규모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한국전쟁사에는 처절한 전투를 상징하는 이름들이 꽤 많다. 피의 능선을 비롯해 단장의 능선, 펀치볼, 철의 삼각지, 김일성 고지, 스탈린 고지, 모택동 고지 등이 있고 ‘크리스마스 고지’도 그중 하나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1951년 12월 25일부터 12월 28일까지 총 4일간 이어졌다. 중공군 제 68군 204사단 소속 부대와 국군 보병 7사단 소속 부대가 전투를 벌여 고지의 주인이 낮과 밤으로 바뀔 만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혈전을 펼쳤다.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고지는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피아간 부상자들의 신음이 천지를 울렸다고 한다. 압록강을 넘어 남침한 중공군과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던 시기였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양측은 11월 27일부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고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약속을 어기고 재공격을 감행했다. 고지를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피아간의 인명 손실은 컸다. 국군은 처절한 혈투 끝에 승리했지만 흰 눈으로 덮여있던 고지는 순식간에 죽음의 동산으로 변해버렸다. 결사 항전한 아군은 22명 전사에 21명 실종, 중공군은 172명이 전사하고 5명이 포로로 잡혔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서 진지 방어 임무를 수행했던 고 이순호 대위의 전공 담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적의 공격으로 고지가 함락되면서 다급해진 이 대위의 중대는 수류탄과 총검으로 중공군에 맞섰지만, 적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포위되는 상황을 맞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적과 아군이 한데 엉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대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끝까지 진지 방어를 각오하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며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이 대위는 전투 중에 왼쪽 팔과 우측 정강이 등 두 곳에 관통상을 입었지만 중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는 혈투를 벌여 끝까지 진지를 지켰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끝내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크리스마스 고지는 이제 적막이 흐르는 평온한 곳이 됐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고지가 있는 강원도 양구 두메산골엔 지금도 아픔과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캐럴이 평화롭게 울려야 하는 크리스마스 고지지만 그곳에서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숨진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 온다. 남북은 아직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원컨대 휴전선을 지키는 장병들이 크리스마스 때만이라도 평안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늘엔 영광, 땅 위엔 평화로다.’ 지구 한편에선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 전쟁하는 그곳에 임하옵소서!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크리스마스 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하나 실종 중공군
2024.12.08. 18:00
━ 원문은 LA타임스 9월3일자 ‘Hot, dirty, dangerous: Aerial firefighting is a labor of love’ 제목의 기사입니다. 가주 산림화재예방국(California Department of Forestry and Fire Protection)의 소방 항공기 파일럿 제프 레이놀즈(Jeff Reynolds)는 첫 산불 시즌의 어느 날 비행중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비행기의 빈 날개에는 연료가 가득 차 있었고, 기체의 배 속에는 화재 억제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뜨겁고 얇은 공기를 헤치고 ‘무겁게 비행’하고 있었다. 저고도로 낮고 천천히 비행함으로써 비행기의 기동성을 제한한 터라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변 지형도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 속으로 일부러 다이빙하고 있었다. 한가지만으로도 위험한 조건들이 쌓이면서 결국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마치 재앙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죠.” 레이놀즈는 당시 목표 지점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항공조정사는 그에게 회항해 다시 목표 지점으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1000갤런의 화재 억제제를 실은 채 그는 자동추력장치(throttle)를 밀어넣어 엔진에서 더 많은 힘을 짜내고, 기체를 천천히 상승시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창문 너머 바로 눈앞에서 이상한 흰색 물체를 발견했다. 산 언덕을 따라 올라오고 있던 트럭이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고도까지 와있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그는 이미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고, 오른쪽에 있던 언덕과의 충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레이놀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의 충격적인 순간은 여전히 날 괴롭히고 있다”면서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우리는 종종 뉴스 영상에서 높은 상공에서 항공기가 화재 진압을 위해 붉은 화재 억제제를 불길 위에 뿌리는 장면을 본다. 또는 헬리콥터가 거대한 물 양동이를 매달고 주택 주변에 뿌려 불길을 막는 멋진 광경도 목격한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규모의 산불이 매년 발생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소방 항공기 파일럿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소방 항공기 파일럿은 극소수다. 이들은 대형 여객기나 사설 제트기 회사에서 제공하는 상대적인 호화로운 환경과 높은 임금을 마다하고, 뜨겁고 더럽고 위험한 공중 소방 작업에 뛰어들고 있다. 직접 비행기를 청소하고 연료를 채우며, 때로는 낡은 작업복을 입는다. 임금도 상업 항공기 조종사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다. 근무 환경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연방교통안전위원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전국에서 공중 진화 작업중 최소 14건의 항공기 및 헬리콥터 추락 사고가 발생해 최소 25명의 파일럿과 승무원이 사망했다. 그 중 일부는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산비탈에 충돌하거나, 물을 끌어올리던 호스가 헬리콥터 로터에 엉켜 추락하기도 했다. 같은 기간 미국 상업 항공사 소속 파일럿중 비행 중 사고로 사망한 파일럿은 단 한 명도 없다. 항공 소방 파일럿들의 근무 일정은 고용주에 따라 다르다. 일부 계약업체들은 연중 내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산불이 발생하는 곳에서 비행한다. 반면, ‘화재 시즌’에만 일하는 파일럿도 있다. 그런데 시즌 파일럿들이 과거에는 여름철 건조한 시기에만 일했지만 최근 몇 년간 그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들은 대개 10일 연속 근무 후 5일간 휴식을 취하는 일정을 따른다. 최근 새크라멘토 메트로폴리탄 소방국에서 은퇴한 수석 파일럿 몬티 반랜딩햄은 “항공 소방은 ‘일상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전투 비행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항공 소방업계에 진입하려면 학생들은 기본적인 이착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거나, 넓은 시골 지역에서 전력선이나 송유관을 감시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수행하며 경력을 쌓아야 한다. 이들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지루한 업무를 견뎌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천 시간의 비행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항공 소방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열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새크라멘토 소방국 헬리콥터 파일럿인 브라이스 미첼이 전형적인 예다. 그는 10대 시절 소방국의 자원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항공 소방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의 첫 상사는 그를 ‘호스를 들고 헬리콥터를 세차하던 어린 소년’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미첼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아마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 그때 즈음이었다”고 말했다. 미첼은 소방관으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다른 동료들처럼 새 차를 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돈을 모아 6만 달러짜리 훈련용 헬리콥터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비행 교관을 고용해 비행을 배웠고, 교관 자격증을 얻은 후에는 비행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저렴한 비행 학교를 운영했다”며 “휴일에도 비행기 조종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비행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작은 R22 헬리콥터를 타고 협곡으로 나가 헬리콥터 조종사로서 항공 소방에 필요한 고난도 비행을 연습했다”고 말했다. 특히, 한여름의 더운 날에 강 위에 정지해 떠있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이는 화염 위에서 고고도로 비행하는 대형 헬리콥터 조종 상황과 비슷했다. 비행 연습 외에 다른 훈련들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첫 임무는 응급처치 요원이었다. 헬리콥터 케이블에 매달려 위험한 협곡이나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 부상자들 구출하는 일이었다. 이후 구출 작업의 지휘자 역할을 맡아, 조종사가 비행을 할 때 통신과 항로를 관리하고 구출 요원을 지휘하는 팀장이 되었다. 그의 역할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는 헬멧 속에서 동시에 10개의 라디오 채널을 듣는다고 설명했다. 이 채널들은 모두 중요한 정보로, 다른 항공기에서 보내는 보고, 지상 소방대원의 상황, 항공 교통 관제사들의 지시들이다. 미첼은 “극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만 비행을 하면서 때때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산기슭의 트럭과 충돌할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겪었던 레이놀즈의 열정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사우스LA 캄튼 공항에서 광고 배너를 끌고 비행하는 일을 하며 파일럿 경력을 시작했다. 2016년 그는 사설 항공 서비스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몬터레이 공항에 고객을 내려주던 중이었다. 그때 그는 활주로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청소하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의 비행기는 불길 위를 낮고 천천히 날며 비행한 흔적인 재와 죽은 벌레로 덮여 있었다. 그는 곧 그녀가 ‘산불 공중 진화(air attack)’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인근에 발생한 산불 위에서 항공 교통을 통제하는 임무였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소개로 소규모 사설 계약업체에 근무하게됐다. 레이놀즈는 7년 동안 약 3000시간의 비행 경험을 쌓은 후 처음으로 항공 소방 작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항공기를 조종하며 화염을 향해 다이빙하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 레이놀즈는 다른 파일럿들에게 자신의 일을 설명할 때, 그들이 종종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고 한다. 그들의 질문은 이렇다. “여름철 아르바이트 같은 거야?” “메이저 항공사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중인 거야?” 레이놀즈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니요, 이게 제 진짜 직업인데요.” 그는 비행으로 큰 돈을 벌긴 어렵다. 도쿄행 대형 여객기를 조종하거나, 유명인사들을 제트기로 칸 영화제에 데려다주며 고소득을 올리는 파일럿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목숨과 집을 구할 수 있다.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건 사명이라고 밖에 대답 못할 것 같습니다. 보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잭 돌런 기자비행 전투 소방 항공기 비행중 머리카락 상업 항공기
2024.09.04. 18:13
지난 11월 LA에서 FORGOTTEN VICTORY라는 다큐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행운을 얻었다. 레인 빅토리호 선상에서 금발 미모의 발레리나가 갑판을 누비며 첼로의 반주와 환상적인 안무로 시작되는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한 편의 예술영화 서막 같았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배를 타고 피난 왔던 실존 인물들이 들려주는 회고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 선박은 6·25 전쟁당시 흥남 철수작전에 참여해 피란민 7000여 명을 피난시킨 화물선으로 지급은 산페드로 항구에 정박해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 한국정부에서 매입을 희망한다는 보도를 접한 적도 있는 선박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화물선은 메리디스 빅토리아호이고(아이러니컬하게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되었다), 레인 빅토리아호는 이름이 비슷한 다소 혼동스러운 이름들이다. 마식령 산맥에 자리한 장진호의 1950년 12월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영하 30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침을 뱉으면 얼음판 위에 동전을 던진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장편소설 ‘얼어붙은 장진호’(고산 지음), ‘Break out’(마틴 러스, 임상균 역)을 적당히 난방된 뉴저지 아파트에서 다시 읽었다. 그리고 15회에 걸친 다큐멘터리 장진호 전투 영상을 편안히 감상하였다. 당시 들어 보지도 못하였던 한국이라는 전쟁터에서 희생된 미군들의 조국에서, 나는 합중국의 시민이 되어 산화한 미군장병들의 안방을 차지한 것 같은 송구한 마음이 드는 불편한 심기이기도 하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전세가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의 우세는 삼팔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였다. 하지만 맥아더 원수나 트루먼 정부는 중공이 참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동경의 극동 사령부는 동결된 압록강을 야간에 도보로 침투하는 중공군의 12만 8000명의 대군이 도강하는 정보를 놓쳤다. 그후 포로된 중공군의 실체를 보고 받았으나 이 또한 간과하였다. 유엔군은 국지전에서 전술적으로는 우세한 전투가 많았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만주 폭격을 허용하였다면 한반도는 통일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아쉬움이 앞선다.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 부근에 매복한 중공군의 유인작전에 완전포위되어 북진을 멈추고 후퇴하며 막대한 인명손실로 그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동상과 동사의 위협 속에 힘겨운 후퇴를 하면서도 미 해병대의 자존심 때문에 후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억지를 쓰며 흥남으로 퇴각하였다. 기록영상이나 전쟁사를 보면 연합군은 항공지원과 막강한 대량살상의 화력을 가졌지만 파도처럼 겹겹으로 밀려오며 꽹가리, 피리, 수류탄으로 무장한 야간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미국의 풍요로운 삶을 등지고 오직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에 입대하여 듣도 보지도 못한 한국의 산하에서 꽃같은 목슴을 바쳐 산화한 그들을 생각할 적에, 전후 미국 땅에 정착한 재미 한인의 한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것 같다. 한반도를 지켜주며 산화한 미국 군인들과 참전하였던 미군 장병들에게 12월의 추위 속에서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윤봉춘 / 수필가이 아침에 장진호 전투 다큐멘터리 장진호 장진호 부근 다큐영화 시사회
2021.12.10. 17:05
“산다는 것은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로맹 롤랑·프랑스 작가한마디 한복판 전투 프랑스 작가
2021.10.27. 19:21
미시간 지역 언론은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기관(DPAA) 발표를 인용,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육군 소속 윌리엄 E.캐벤더 병장의 유해가 고향 미시간주로 돌아와 가족 품에 안겼다고 지난 14일 전했다. 캐벤더 병장은 이날 오후 어릴 적 살던 동네인 미시간 중부 소도시 레슬리에 있는 공원묘지의 부모님 곁에 안장됐다. 안장식에는 육군 소속 현역 및 예비역 장병들이 다수 참석했고, 예포로 애도와 조의를 표했다. 캐벤더 병장은 1950년 11월 28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소속 부대원들과 함께 중국군의 공격을 받은 후 실종된 것으로 보고됐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평생 기다리던 부모님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이미 팔순이 다 된 두 여동생이 오빠의 유해를 맞았다. 이들은 “오빠와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 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오빠가 해외로 파병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알고 있다”며 “오빠의 실종은 가족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어 “오빠가 하늘나라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생각을 하며 위로로 삼는다”면서 “유해로나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정부의 노력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2021.10.17. 19:00